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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망의 시대

망의 시대 6. 망속의 삶

by 격암(강국진) 2015. 6. 16.

망속의 삶

 

우리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보다 더 급한 질문은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하나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 행동도 선택하지 않고 매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즉 매순간 우리는 행동하고 있다. 행동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것보다 답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비한다면 다른 질문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돈은 어디서 버는가, 인간은 어떻게 진화해서 현재의 인간이 되었나, 민주주의의 미래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은 덜 급하고 2차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것은 설사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이 없어도 우리는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서재에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색하고 공부하기로 한다라는 선택 조차도 애초에 지금 여기서 그러기로 선택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뭘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다.  

 

일단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앞의 질문은 지금 현재 여기서 우리가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질문은 그러한 행동이 지금 현재와 여기서의 상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일 수는 없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사회적으로 보다 넓은 문맥속에서 어떤 연속성과 어떤 관계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저 어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아야 할 것인가,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상관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인가, 부모나 가족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고 뭔가를 느끼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통상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삶을 살게 되기 시작한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아기도 물론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혀 느끼는바가 없이 그저 눈앞의 먹이를 먹으며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삶이라기 보다는 짐승의 삶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고 물고기나 자연같은 환경도 있어서 애정을 나누고 이익을 주고 받고 나눠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해야 우리는 겨우 인간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을 시작했다고 해도 그 폭과 양식에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큰 차이를 가지게 되므로 따지고 보면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란 무의미한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1층위에 2층있고 2층위에 3층있는 식으로 무한히 층이 나아가는데도 그 건물을 고작 1층과 그 위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당연히 그 위라는 영역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다. 우리는 엄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거나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는 정도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골치덩어리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진짜 답을 알고 나서야 삶을 시작해 보겠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굶주림이나 갈증같은 외부적인 요건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 때까지 무한히 사색만 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는 결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걸 모를바야에 하나도 알려고 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 모르는데도 사는 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이 처한 상황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무지와 불확실성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서 우리는 처음의 질문에 즉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에 답해야 한다.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종교다. 우리는 신이나 도와 같은 추상적 존재를 그 답이라고 부르고 마치 그 답이 책상위에 놓여진 책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비록 다 보지는 못했어도 그 답은 이 책에 있다는 식이다. 우리는 종종 신의 뜻대로 살고 도에 따라서 산다고 하지만 신이나 도는 정의되지 않는다.

 

종교적 해결책에는 한가지 커다란 장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지하다는 생각을 잊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 종교의 또다른 이름은 우리의 무지다. 종교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신이나 도나 불성앞에서 먹고 마시며 생활하는 우리는 작은 존재다. 종교적 영향력이 약해진 현대에 우리는 쉽사리 종교적 예식들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그들의 오만때문에 서서히 썩어가듯이 변질되어 가는 사람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어떤 종교든 그 종교적 예식에는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즉 일상을 초월한 뭔가를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 최소한 성당에 가서 울려퍼지는 성가를 듣는다던가 혹은 절에 가서 스님이 독송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알 것이다. 종교적 예식은 우리가 단순한 욕망과 고정된 목표로 가득찬 일상에 젖어서 점점 더 짐승처럼 변해가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 종교적 예식에서 우리는 무한한 무지앞에 서고 우리가 작고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주변을 둘러보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종교가 가진 그런 힘이 없었더라면 몇몇 종교가 사람들사이에서 그토록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먹고 마시면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경계를 초월해서 그 너머를 바라볼, 우리의 정신을 계속 가다듬을 나름의 예식이 필요하다. 설혹 그것이 종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매일 계속되는 산책일 수도 있고 문학이나 독서에 대한 열정이 되거나 이득에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해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일을 하고 일상에 따라 사는 것의 의미를 원초적 욕망보다 좀 더 높은 것에 두는 것이다. 뭐가 되든 우리는 우리를 일상의 위로 끌어올려서 우리의 무지를 직시하게 해줄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썩어버리고 작아지고 추락한다.

 

종교적 접근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경험이 축적되고 분석되는 것이 우리의 제한된 기억력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기 쉽다. 우리는 정보가 조금만 많아져도 어느게 어느것인지 혼돈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다른 도움이 없이 타고난 기억력만을 가지고 경험을 축적해 나갈 때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관점은 아주 소박한 형태를 유지하거나 크게 잘못되기 쉽다. 그래서 문명화된 인간으로서의 삶이란 글을 쓰고 읽는 것 그리고 정보를 기록하고 분석하며 그렇게 더 잘 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엄밀하고 정확한 언어가 만들어 질 수록 우리는 비록 제한된 영역에서 일지라도 더 많은 지식을 더 엄밀하게 분석하고 조직할 수 있고 그런 언어가 없을 때 우리의 경험은 전달하고 기록하는데 훨씬 더 큰 한계에 부딪힌다. 따라서 수학적 언어로 설명된 과거의 과학적 이론, 예를 들어 뉴튼의 이론들은 후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쉽고 정확히 이해된다. 후대의 과학자들은 뉴튼을 존경하지만 뉴튼에게서 배울 새로운 과학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비록 수학은 시를 쓸 수는 없는 제한된 언어지만 수학이라는 언어는 현대문명을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었다. 반면에 선대 철학자나 시인의 뜻은 계속해서 다시 해석해야 할 대상이 되고 플라톤은 수천년전의 철학자이며 세익스피어는 수백년전의 작가인데도 현대의 누군가가 자신이 그들보다 더 철학적으로 또는 문학작품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하다면 그것은 대개 어리석은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지식들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로 그런 지식은 전체 시스템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잘못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수학적 공리의 증명을 절반만 아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단순하게 말하면 다 알지 못하면 하나도 모르는 것과 차이가 없다. 적어도 한계가 크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과학애호가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당신이 일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혹은 양자역학에 대해서 일반인을 위해 만들어진 백권 천권의 소개서를 읽고 외운다고 해도 그것을 수학적으로 공부한 과학도와의 사이에는 넘지 못하는 간격이 남는다.

 

그런데 오늘날 전체를 아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축적되면서 여러 학문분야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다시 세분화 되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 상황을 위해 그 학문분야들을 다시 결합하는 통합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은행금리는 올려야 하는가 내려야 하는가를 이야기 한다고 해보자. 이 결정에 관련된 학문분야들의 복잡도가 너무 커서 그런 분야들이 조합되기 어렵다면 그것은 마치 초정밀 부품들을 풀로 붙여서 제트기를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쉬울 것이다. 전문가들이 모여서 멍청이 같은 결론을 내는 것이다.

 

둘째로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 진실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즉 세상에 대한 유일하게 옳은 설명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들을 억압하고 우리의 무지를 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강력한 독재자와 비슷하다. 자신을 따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일어나서 독재자를 타도하던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물론 현대의 학문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쌓아올린 지식의 괴물같은 탑이다. 그 시스템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중 소수는 그렇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성공은 즉각적으로 더 극복하기 어려운 지식적 시스템을 남긴다. 이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무지와 관련해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르킨다. 종교는, 적어도 몇몇 종교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데 과학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종교는 우리는 비우는데 과학은 우리를 채운다. 물론 그 반대인 측면도 있지만 논리적 학문들은 그것을 연구하는 첨단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학문적 시스템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존재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객관적 설명이나 이론이란 기본적으로 그 설명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주장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테니스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하는 이론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테니스에 관련되지 않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워지게 된다. 반면에 종교적 설명은 지속적으로 너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당신은 작은 인간일 뿐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현대인이 몇백년이나 몇천년전의 사람들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교만이며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다. 집단적으로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현대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종종 착각한다. 물론 현대인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현대 교육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인들은 현대의 삶에 익숙해져서 과거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법한 일에 무지해 진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하고 옷을 만들고 채마밭을 가꾸는 일따위는 현대의 시스템에 의해서 소위 아웃소싱이 되었다. 즉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하는 대신에 그것들을 시장에서 산다. 그러나 그만큼 현대인은 무지해 진 것이다. 경험이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날마다 입시공부만 한 고등학생을 생각해 보라. 그 학생은 날마다 학습을 했는데도 매우 바보같아 보일 때가 있다. 기본적인 판단을 못한다. 자기가 무슨 옷을 좋아하고 건강을 돌보려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다. 현대인은 종종 그러면서도 본인의 무지와 삶의 협소함을 망각한다. 

 

지식이 산처럼 쌓이게 되면 현대인들이 그 기록과 지식들의 의미를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여유는 점점 사라져 간다. 그래서 지식은 피상적인 것이 되고 자세한 것은 점점 더 전문가가 독점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문학이나 철학은 일반인들의 생활과는 점점 더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치 야구선수에게 양자역학이나 유체역학 풀이를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야구선수들은 그런 물리학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야구경기라는 실질 상황에서 그런 지식은 거의가 아니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유체역학 공부하느라 야구연습할 시간도 없었다고 하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명 철학자들의 책을 읽고 그 뜻을 되새기는 사람은 오늘날 얼마나 될까?  그런 것들을 일상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쓰는 사람은 더더욱 적을 것이다. 문학이나 철학만 그런게 아니다. 지식이 쌓일 수록 학문들은 현실과 분리된다. 마치 차를 사고 운전하는 것이, 차를 만드는 과정을 아는 것과 자연히 분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식과 법칙과 과학의 세계관 혹은 인본주의적 계몽주의라고 불리는 세계관, 객관적인 이론과 개인을 강조하는 세계관에는 적어도 한가지 치명적 문제가 있다. 그러한 관점 속에서 개인은 불가능한 숙제를 받는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이 온 우주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개인의 유한함에 대한 인정이 없다. 오히려 모두가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라던가 인간은 위대하다는 민망한 구호를 과신에 차서 외친다. 그 결과 우리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이미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런 것이 한계의 인정이 아니라는 세뇌를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사실판단을 개인에게 남기지 않는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법률적인 시스템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의견이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빵을 어떻게 만드는가하는 질문을 제빵사에게 하는게 아니라 제빵에 대해 무지한 모든 사람에게 물어서 다수결로 답을 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16살먹은 아이는 성인으로서의 독립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투표권이나 재산권에 제한을 가지며 결혼도 맘대로 할 수 없다. 유치원생이 자신의 진학에 대해서 가지는 판단이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즉 우리는 우리가 성장하는 존재로서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영역에 이르면 거의 종교적 믿음을 가진다. 마치 19살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현대의 민주주의 투표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정과정에 동등하게 접근한다고 말해진다. 개인을 강조하는 이러한 관점은 너무나 강력하게 세상에 퍼진 나머지 거의 신성한 원칙이 되었다. 따라서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비록 그것이 비합리적인 것일지라도 수긍해야 한다고 말해진다. 만약 국민의 대다수가 신에 의한 창조론을 믿는다던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해서 교과서를 고치고 새삼스레 바다가 끝나는 곳을 찾기 위한 탐험대를 조직한다고 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수의 의견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에서 독립적 개인은 있었던 적이 없고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에 대한 객관적 이론의 존재는 있었던 적이 없다. 설사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객관적 이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다 이해하고 머리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무엇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찬반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질 것을 강요당한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다수결투표는 편의에 따라 선택된다. 실제로는 무엇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질문이며 누가 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인정받는가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선택되고 조정된다. 투표의 방식, 질문의 방식, 정보제공의 형식등 전체 시스템이 가지는 특징이 계몽주의적 이상을 비현실적인 몽상으로 만든다. 학교는 대개 네가 해야할 의무를 잔뜩 가르쳐 주는데서 그치고 진짜 가치있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건 너의 자유라는 말로 피해간다.

 

계몽주의적 이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지금 세계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인간들보다도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게 되는 시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의 복잡성이 증대함에 따라 그 이상은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왔다. 지금 모든 인간들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다. 아이가 자라서 모두 어른의 옷을 입기를 바라지만 그 옷의 크기가 미친듯이 증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상대적으로 오히려 점점 더 작아진다.

 

망의 방식이란 먼저 인간은 성장할 수 있지만 삶은 유한하며 인간의 능력도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은 단계를 거쳐서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의 인간이 가지는 가치는 그가 참여하는 망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주의와는 다르다. 왜냐면 인간은 망을 선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망을 선택하고 조직화되어 가는 과정이 계속되는 가운데 더 큰 가치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이라던가 정의라던가 하는 것은 오직 어떤 망 혹은 어떤 공동체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이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나는 게임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도 테두리가 중요하다. 이 게임에서의 문제와 규칙은 그곳을 나가면 의미가 없어진다. 반면에 객관적 이론을 추구하고 계몽주의적 이상을 머리속에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인 윤리학을 만들려고 한다. 즉 객관적 근거에 의해서 그 존재가 자명한 정의나 윤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게임만 있다는 식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꼭 나쁜 결과를 만드는 것만은 아니고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동체의 존립기반을 허물거나 그 공동체를 느끼는 감수성을 잃어버리고서 각자의 정의를 추구해봐야 싸움만 날뿐이다. 누군가가 과학적으로 인간은 살인을 범죄로 여기도록 진화해 왔다거나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했다고 해도 어떤 인간들은 그런 말에다가 침을 뱉을 것이다.

 

우리의 정의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정의가 우리 주변에서 상식이 아니라면 그것은 먼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이 자체적 비일관성때문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발로 찰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에게 발로 차이면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 기본적 일관성이 문제가 아니라면 정의가 이룩되지 않는 것은 그런 정의에 대한 공감을 공유하는 망이 약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정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옳은 것이며 그것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정의의 세상은 오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것에 대한 공감이다. 우리는 지금 축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농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기본적 생각을 점검하지 않고 반칙에 대해 떠들어봐야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먼저 같은 게임으로의 초대가 필요한 것이다.

 

망의 방식은 계몽주의적 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먼저 당신 자신의 주변을 둘러 볼 것을 권한다.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법칙을 추구하고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성장하고 연결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물론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더 넓은 의미와 문맥을 배워야 하고 그럴 때 더 만족스런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우리는 뭘 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은 언제나 유한한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야 내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 유한한 정보는 다른 것보다 먼저 우리 주변의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가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에 휘둘려서 지금 여기를 잊어버리게 돠어서는 안된다. 당신은 먼저 당신을 쓰고 기록하고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더 지혜로워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짐승같아진다. 아예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이 세상은 능력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얻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망을 연결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다.

 

계몽주의는 중앙집중적 시스템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망의 방식은 지방자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것을 국가나 세계같은 것으로 말하고 보는 대신에 먼저 나와 우리가족, 우리 동호회, 우리 지역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망의 방식이 이기적이고 협소한 관점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가 관련된 망이 바뀌어 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의 망, 나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느끼고 보살피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할 뿐 지금 나의 공동체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타인으로 머물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무지의 경계선 바깥에 있는 것들과 같다. 무지의 경계선은 점점 더 후퇴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 경계선 뒤에는 무지가 남을 테지만 지금은 무지의 대상이었던 것이 얼마후에는 무지의 경계선 안쪽의 것이 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망속의 삶이란 이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권장되어지는 삶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20세기 후반부터 정보의 양과 순환속력은 인터넷때문에 폭증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하는 우리의 태도가 과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계속 아픔을 양산할 것이다. 원초적 감각에 매몰되는 배금주의만 퍼지거나 사이비종교의 신화에 빠지는 대중이 힘을 얻거나 그럴듯한 어떤 이데올로기가 절대라고 믿는 과격분자가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거나 하는 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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