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의 결론은 시대의 변화가 인간이 신을 의지하는 시대에서 인간이 지식을 의지하는 시대로 변해왔고 그 이후 인간이 네트웍 혹은 망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시대로 변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망은 어떤 것이고 망의 시대에 맞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종교나 지식과 마찬가지로 망이란 답을 찾는 방법이다. 우리는 종교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지식의 체계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망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우리가 망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시대라는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 우리는 가족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뭘해야 하는지, 오늘은 뭘 먹어야 하냐고,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냐고 망에게 질문하게 될 것이다.
지식이 힘이듯 망도 힘이다. 지식의 시대에 먼저 진입한 나라들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망의 시대에 진입이 늦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망의 시대에 먼저 진입한 사람들에게 지배받게 된다. 이미 징조는 많이 있다. 인터넷과 무선통신이 곧 망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인터넷과 무선통신이 이미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들의 상당수는 이 망에 관련된 일을 한다. 오늘날은 메신저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가 천문학적 가격으로 팔리는 시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망의 시대에 걸맞는 망의 이론이 필요하다. 신의 시대에는 신학이 있었고 지식의 시대에는 지식의 이론 혹은 인식론이 있어서 그것이 철학의 중심적 연구분야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망이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식론적인 고민없이 지식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뭔가를 안다는 것을 그냥 뭔가를 보는 것이나 뭔가를 체험하는 것과 동일시 한다. 마찬가지로 망을 단순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망이란 그저 연결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망의 건설이란 그저 연결의 건설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망의 시대가 그것뿐일 수는 없다.
물론 망다운 망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필요조건이 빠른 소통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무래도 빠른 정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 고속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거나 빠르게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20세기에 이르러 비약한다. 전자통신과 컴퓨터의 발명 때문에 망에서 오고 갈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속력은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문자와 인쇄술은 인류 최고의 발명이라고 말해지지만 정보의 소통속력과 범위에 있어서 전자통신은 또다른 비약을 보여준다. 20세기 들어서 유선통신은 무선통신이 되었고 개인간의 통신이 되었다. 이제 망을 통해 흐르는 정보는 단순히 그 양이 많아지고 빨리 흐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목표를 향해 흐르게 되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정보는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흐른다. 정보의 송신자도 수신자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페이스북을 확인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개인방송을 할 수도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기술들이 구글같은 회사의 검색기술이고 유튜브의 동영상 추천 프로그램이며 SNS의 시스템이다. 이제 정보는 양방향으로 빠르게 소통되며 따라서 보다 빠르게 비교되고 재검토되어 조합된다.
그러나 진정한 망에서 연결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망의 건설은 그 연결들을 재조정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연결과 소통이 반드시 행복한 결과만을 만들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라는 것만으로 두사람으로 이뤄진 행복한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무조건 좋은 거라면 사람들간에도 비밀이 없고 사생활이 없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오히려 다툼과 전쟁으로 가는 길일 수 있다. 오늘날 대가족이 함께 사는 주거 공동체가 왜 분해되겠는가. 가까이 사는 것이 불편해서다. 그러면 싸우게 되니까.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간섭하게 되기 때문이다. 변두리와 도시 중앙사이에 전철이 놓인다고 해서 이것이 꼭 좋아할 일은 아니다. 이럴 때 종종 변두리 지역은 공동화된다. 사람들의 소비와 오락이 중앙쪽으로 흡수되고 변두리 지역은 그저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럴 때 독립적 지역공동체는 파괴된다. 뜨내기들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어떤 의미로 수탈한다. 더 빠르고 많은 연결이 곧바로 제대로 된 망과 번영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망이 쓸모있게 되기 위해서는 연결되는 주체들간의 상호이해와 신뢰가 필요하다. 망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거짓이거나 과장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정보를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해야 한다. 신문도 잘 못읽는 할머니가 이 나라의 대통령은 실은 북괴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라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보내온다면 우리는 그 정보에 대해 매우 미심쩍어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원래 거의 없다. 더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신문도 못읽는 할머니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었을 것인가. 그러나 어떤 공신력있는 첩보기관의 수장이 똑같은 말을 당신에게 한다면 그 정보의 의미와 해석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정보 그 자체 이상으로 그 정보를 주는 상대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보를 해석하는 속력 그 자체도 중요하다. 축구팀을 한번 생각해 보자. 축구팀의 멤버들은 서로 서로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협력은 빨라야 한다. 선수들이 경기중에 주장이나 감독에게서 계속 지시를 들으며 움직일 수는 없다. 상대편 팀의 반응에 따라 상황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상대편팀은 물론 서로를 관찰하고 서로의 의도에 빠르게 반응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팀 연습은 이걸 위한 것이다. 물론 경기중에 직접 명령을 듣기도 하고 세트플레이라고 해서 어떤 경우가 발생하면 선수들은 미리 연습을 많이 해둔 방식으로 공격이나 패스를 빠르게 하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그저 기계적으로 정해진 행동만을 해서는 축구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수 모두가 각자의 머리를 써서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 행동들이 가지는 의도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그럴 때 팀은 하나의 팀으로서 그 잠재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런 축구선수 11명의 팀이 아니라 천명의 망, 백만명의 망을 상상해 보자. 이런 망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거대한 망의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이 거대한 집단이 가장 합리적으로 그러면서도 집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되었으며 따라서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중앙집중식 망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망에서 모든 정보는 중앙으로 집중되고 처리되고 해석된 후에 전체 망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것은 때로 왕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고 때로는 투표에 의해 만들어진 권위에 의존하는 일이 된다. 이 망의 연결은 기본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중앙집중식 망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중앙의 명령과 파악하에 이뤄지는 것이다. 조직이 망가지면 중앙과 주변은 대립하고 그들간의 연결은 끊어진다. 중앙이 넘어지면 망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된다.
이런 망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받은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실제로 근대사회는 상당부분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인데 시장은 중앙집중식 사회의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규제를 깨고 자유로운 소통을 지향하는 시장은 이상적으로 움직이는 경우 좋은 망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것은 중앙집중식 판단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여 자동적으로 최적화된 답을 찾는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이상적인 망으로서의 시장은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칼 폴라니는 그의 책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시장이란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중앙이 의도를 가지고 강력하게 개입하는 일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중앙은 결국 시장의 규칙을 맘대로 조절해왔다는 것이다. 그건 권력과 돈에 대한 탐욕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완전한 자유는 금방 방임이 되고 이상적인 해결책이 찾아지기는 커녕 사회가 통제불능이 되는 것이 크고 작은 규모에서 여러번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교통법도 아무 교통법도 없는 상태보다는 좋다. 완전한 자유가 이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은 냉정히 뒤를 돌아보며 생각해 보면 누구도 게임의 규칙을 몰라도 최고의 게임이 진행된다는 엄청난 헛소리다.
이 시장의 예를 통해 우리는 두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는 이미 탈중앙집중식 망의 필요성은 예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이고 이미 어느 정도 세계에서 그런 망은 힘을 발휘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그런 망은 오직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탈중앙집중식이었으며 따라서 여전히 많은 사회적 잠재력을 억눌러왔다는 것이다. 망의 시대란 바로 이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시대이며 탈중앙화의 시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진정한 민주화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물론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기술적 진보가 필요하다.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같은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는 인간의 변화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새로운 망을 만드는 데에는 문화적 개혁이 필요하다. 연결이 하드웨어라면 이 문화와 관점은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한다. 인간의 마음이 새로운 시대에 적당한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학의 시대가 왔는데 그걸 종교의 관점으로 보고 박해했던 과거의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할 것이다. 이제 시작되려고 하는 망의 시대를 우리 스스로 망치게 될 것이다. 기술은 금지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문화적 개혁중의 하나는 바로 지식시대의 독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교육은 지식시대를 거치며 만들어 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시대에 만들어진 독단을 지금 이시대에도 지속적으로 교육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적인 모순과 충돌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걸 해결하지 못한 채 자꾸 문제를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사이버 공간에서 여러가지 망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에는 한가지 반복되어지는 문제가 있다. 일단 하나의 사이트나 게시판이 인기를 얻으면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 사람들은 이렇게 새롭게 발전하는 공동체 혹은 망에 감격적으로 접속한다. 유용한 가르침이나 새로운 정보가 그 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망이 커져가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다툼이 생긴다. 그리고 그 다툼에서 자주 보이는 형식이 바로 논리와 감성의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은 바로 지식시대의 문명을 비판한 책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논지와도 이어진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인 피어시그는 이것을 고전적 퀄리티와 낭만적 퀄리티의 분열로 이야기한다. 고전적 퀄리티 혹은 논리적 분석적 이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망을 중앙집중식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지식시대의 이성이란게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명한 규칙과 법에따라 이 망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다. 정의가 법으로 달성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이 규칙을 둘러싼 싸움은 점점 과열된다. 분석적 이성주의자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광신도라던가 낭만주의자, 미신을 믿는 사람들, 감정에만 호소하는 인간으로 말하곤 한다. 물론 그들은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에게 감성적이라거나 광신도라고 지적받는 사람들은 그 자칭 논리주의자들을 생각이 협소한 사람으로 느낀다. 그들은 말이 많고 말싸움은 잘하지만 왠지 눈이 먼 사람들 같이 느껴진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형식에만 빠져있고 감수성이 부족해 보인다.
현실에는 산수나 기하학같은 곳에서 보이는 깨끗한 논리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여도 사회에 대한 어떤 생각은 언제나 어떤 적용범위의 한계를 가진 작은 박스속의 생각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생각을 과신하고 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은 큰 위험을 부르기 쉽다. 그런데도 자신을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실은 많은 것을 근거없이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신의 논리가 자신의 눈을 가린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약간 더 엄밀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남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잊는다.
중요한 것은 논리와 감성사이에서 중용의 길을 걷거나 조화를 추구하는게아니다. 이건 논리적인 판단이고 저건 근거없는 감성적인 판단이다라는 것은 이미 어떤 편견을 가진 상태를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게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본래 객관도 없고 주관도 없다. 본래 논리도 없고 감성도 없다. 본래 마음이 있고 물질이 있는게 아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는 말한다. 본래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이러한 일원론이 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것은 모두 인간의 발명이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무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잊을 때 우리는 망을 파괴하게 된다. 모든 일에서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다시 망을 배신하고 지식으로 돌아가려고 하게 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과거의 중앙집중식 조직으로 망을 되돌리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중앙집중식 조직을 비판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시대의 정신에는 그런 원리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대중을 무시하고 지적 엘리트의 판단만 맹신하며 말싸움에 이기는 것이 진리를 보증하는 것처럼 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객관적 세계란 이 세상에 세계가 딱 하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세계안에서 더 많이 아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은 복종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니까. 내가 맞으면 너는 틀리니까. 그것은 마치 선의를 가졌지만 정치조직이라고는 왕조밖에 모르는 사람이 공화국에서 선한 왕을 세우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그는 자유를 외치면서 독재자를 옹립하려고 한다. 그는 공화국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역사를 되돌리는 것을 진보로 여기고 질서의 복원으로 여긴다.
시공을 초월 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객관적 지식의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의지하면 최선의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망의 시대 이전의 지식의 시대의 믿음이다. 그런 시스템은 설혹 존재한다고 해도 유한한 일개 인간이 기계의 도움없이, 인간의 언어로 기억하고 이해할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정말 신의 뜻을 이해하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망의 시대에 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지식의 시대에서 내려온 관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종교와 과학이 충돌한 것처럼 망과 지식은 충돌하게 된다. 그때 지식은 무조건 옳다라고 편을 드는 사람은 결국 제대로 망의 시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논리적 사고보다는 확률적 사고를 해야 한다. 이 두가지 사고는 그 근본에서 상당히 다르다. 논리적 사고는 흑백론적이고 확실한 인과적 법칙에 근거하여 사고를 전개하지만 확률적 사고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방대한 데이터를 사용해서 어떤 것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가를 추론하는 방식이다. 법칙은 이제 고작해야 확률적이고 인과적 관계는 많은 경우 분명히 해명되지 않았거나 해명될 수 없다.
올바른 망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꼽고 싶은 또다른 요소는 타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공감 능력이다. 우리는 남의 손가락에 망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움츠린다. 역겨운 것을 먹는 사람을 보면 내 입으로 그런 음식이 들어가는 것처럼 구역질이 난다. 우리는 영화나 라디오가 나오기 훨씬 전에도 단지 글자로 이뤄진 소설을 읽고서 눈물을 흘리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인간의 공감능력이다.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이해하는 이런 능력이 없이는 제 아무리 빠른 연락선을 가지고 제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소통은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방이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할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상대방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무한히 많은 해석 가능성을 가진다. 천사와 악마가 구분이 안된다. 의심이 일어난다. 따라서 소통은 안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지식시대의 교육은 이러한 능력을 파괴한다. 미국의 철학자 듀이는 현대의 교실교육을 말하면서 학생들이 모두 선생님에게 똑같은 것을 배우고 경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객관적 지식이나 인식에 기반한 현대사회는 기본적으로 세계에 단하나의 객관적 입장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자기나 주변을 쳐다보기보다는 답을 알고 있는 선생님을 쳐다보게 된다. 모두가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답을 내놓으라고 교육받는다. 따라서 그 안의 인간들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소통의 능력이 상실되어 있는 사람 혹은 그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입장을 바꿔서 느끼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괴물이 된다. 그들은 가치를 모르고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말라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전혀 소통하지 않으면서 모두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프면 과격하게 흥분하지만 남의 아픔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괴물들인 것이다. 지식시대에는 모든 것이 고정된 체인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괴물도 자기 할 일을 하면 그만이었다. 괴물은 묶여있었다. 그러나 망의 시대에 정보가 중앙을 약하게 하고 규제가 약해지면 괴물은 풀려나고 난동을 부리게 된다. 망은 망가진다. 이 세상은 단지 규칙과 시스템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시스템안에서도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망의 시대가 해방과 자유의 시대라면 우리는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식의 시대가 만든 점보 제트키같은 거대한 기계의 조종석에 원숭이같은 인간을 앉힐 수 없는 것과 같다.
망의 시대의 인간을 지식시대의 인간이 보면 광신도로 보이기 쉽다. 왜 그렇게 행동하고 어떻게 그렇게 서로를 신뢰할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왕조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공화국의 꿈을 꾸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보인다. 그게 될리가 없다. 사람들이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천한 것들은 중앙이 억압해야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양자간의 대립은 점점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급기야 서로는 서로를 사회악의 핵심으로 파악하게된다.
지식의 시대의 인간에게 솔직함은 그다지 중요한 덕목이 아니다. 이 시대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따위는 자연히 부수적이고 헛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혹 경험많은 전문가의 이야기라도 어떤 의견을 말할 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이 그저 감이 그랬다고 한다면 지식의 시대에서 그것은 배제되고 비판받는다.
이것은 안좋은 일은 양방향으로 만든다. 우선은 우리는 우리의 근거없는 감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우리의 감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증거고 논리다. 그런 게 없으면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로부터 격리시키는 효과가 있다. 다른 방향으로의 악효과는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것, 솔직해 지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린 솔직하기 보다는 되도록 자신감있게 말하라고 교육받는다. 자기 선전의 시대라고 말해지는 시대에는 과장도 미덕이 되어서 결국 모두가 과장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소통속에 과장과 거품이 끼는 것이 일상적이 된 시대는 망과 충돌한다.
망의 시대에 감정과 솔직함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된다. 뭔가를 안다고 말할 때도 내가 어느 정도나 그것을 확신하는지를 솔직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라는 말을 어느 정도 까지 그렇게 믿는 것인지 과정도 없고 축소도 없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집단적 결정이란 이렇게 자신의 판단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는 확신의 정도까지 투명하게 공유될 때만 그 효율이 올라간다.
솔직함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말하는 것이 솔직함이 아니다. 우리는 남의 말이나 암시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중 어느 것이 더 솔직한 소통이 될까. 어느 방식이든 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대개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글은 쓰고 나서 자기가 그것을 읽기 때문에 정말 내가 이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기분에 취해서 이렇게 쓴 것인지 생각하고 고칠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성찰이 있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진짜 자기의 말이 뭔지 생각해 볼수 있다. 그러나 말은 종종 일관성을 잃고 멋대로 말해진다. 느린 소통이나 느린 판단이 크게 보면 빠른 소통이고 빠른 판단이 될수 있는 이유다. 사실 자기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자기를 표현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억누르는 교육에 익숙해서 자기를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우린 일단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야 한다. 자기가 없는데 솔직하기는 어렵다.
바람직한 망이란 자신을 잘 표현하고 정서가 풍부한 사람들의 연결을 말한다. 이 망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순간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고 어떤 답이 나오게 되는가에 대한 것이고 이 순간의 행동에 대한 것이다. 그 답은 일관성이 좀 부족할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답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다. 결국 망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과 무지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그걸 위해서 우리는 더빠른 네트웍과 더 뛰어난 인공지능 기술같은 것이 필요할 테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만으로는 어렵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 미래의 그 인간은 문자를 쓰지 않고 수렵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간을 바라보며 낯설어 할 만큼이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낯선 새로운 인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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