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9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에 전주대학교와 전주비전대학교라는 대학이 있다. 나는 아침에 그곳으로 산책을 가곤하는데 오늘도 가보니 취업관련 현수막이 걸려있고 대학이 수익활동도 벌이는것도 보인다. 21세기의인재는 어떤 것일까, 21세기의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사실 20세기나 그 이전에 그 답은 어느 정도 나왔다.
몇년전부터의 일이다. 나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 비유는 서구의 중세에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가 현대의 세계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그 비유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교회는 대학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바로 대학의 몰락과 현대사회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나는 가끔 이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은 인재나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정리해서 써보면 재미있을 것같이 느껴진다.
한때 교황은 대제국의 황제같은 위치였으며 유럽의 여러 왕들은 교황에게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속적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왕국들은 점점 더 강력해 졌다. 그같은 변화는 적어도 두가지의 흐름과 같이 했는데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이고 특히 인쇄술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그렇게 해서 학문이 발전하자 대학이 서고 점점 더 교회가 지식과 교육의 중심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는 교회가 지식과 교육의 중심이었다. 신학은 학문중의 학문이고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진 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세속적 정치세력 혹은 세속적 공동체가 발달함에따라 반드시 종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가 전부가 아니라고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신은 좋다. 하지만 나는 먹고 즐기는 것도 좋다. 신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식인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은 맛없는 죽만 먹고 살아도 신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는게 죄가 아니라면 나는 하루 종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팔아서 부자가 되는데 내 힘과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성립하려면 물론 물자가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해야 한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과 지식의 축적이 그런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적 권력과 세속권력간의 투쟁은 결국 세속권력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는 이 투쟁을 인간은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권력이 말하는 것은 인간은 신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속적 권력은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인간은 법칙을 발견하여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적어도 초기에는 법칙의 존재야 말로 신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종교인들은 말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한데 신의 생각과 행동 즉 만물의 변화를 어떻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오랜 시간동안 인간은 신에 의지해서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다. 인간이 인간의 영역 이상을 넘어 가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시도해도 되지 않겠지만 된다고 해도 인간은 자멸하게 될지 모른다. 과학따위는 비합리적인 주장이다. 따라서 유명한 종교재판을 통해 과학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하고 화형을 처하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이 가져온 무지의 벽을 허물고 그 바깥으로 간다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원칙인 인간은 신을 의지하고 산다는 원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종교인들이 실감하지 못한 것은 정보기술과 수학이 가진 힘이었다. 언어의 힘이었다. 언어는 정보를 소통시킨다. 새로운 학문은 새로운 언어를 통해 표준화된 정보를 축적한다. 그렇게 축적시킨 정보의 힘은 종교인들이 상상할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날아서 달에도 갈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 전에도 이미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에 매달린 종교인들은 점점 더 터무니 없어보이고 반이성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적 관습으로 자신들에게서 상상과 인식의 자유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종교에 물든 그들은 새 시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에 덜 물든 사람이 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교회가 대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학이 상징하는 것은 논리적 이성이다. 즉 이 세상의 일들은 다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이 그 법칙을 찾아 연구하면 이해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객관적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법칙을 찾아내는 존재다. 그것을 위해 대학은 거대한 지식의 탑을 쌓았다. 그리고 전문가를 육성하고 그 전문가들이 생각하고 소통하는데 쓰는 전문용어들을 발달시켰다. 그 전문언어 즉 전문용어의 시스템을 가르켜 우리는 통상 학문이라고 부른다. 현대에서 대학은 지식과 교육의 중심이다. 그리고 세속권력 즉 국가권력에 의해서 지원받았고 거의 성스러운 위치에 올랐다. 적어도 한 때는 말이다. 대학은 교회와 그 몰락에 있어서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사실 학문의 탑은 이미 상당부분 무너졌다. 학문이 널리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지만 학문은 이미 그 성스러움을 잃었다. 20세기는 그런 혼돈의 시기였다. 한때 유클리드 기하학은 인간이 절대적 진리를 순수히 이성의 힘으로 찾아낼수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수학이야 말로 엄밀한 지식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도 사라졌다. 괴델의 공리나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무한히 쌓아올릴 수 있는 법칙과 엄밀한 지식의 탑은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이 붕괴를 너무 사소하게 봐도 안되지만 너무 턱도 없이 크게 봐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천년전의 미신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세상에는 새로운 세속권력이 등장했다. 그 세속권력은 국가나 대학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다만 종교세력에 대해 과거의 세속적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말했듯이 대학에게 당신들의 가치가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 세속권력의 이름은 바로 기업이다. 20세기는 학문이 특히 과학이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시기였다. 학문을 하는 사람의 수가 크게 늘었다. 그리고 물론 점점 더 많은 돈을 기업이 학문에 투자하고 있다. 국가는 어디에서나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중세교황의 몰락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에 기업은 돈이 넘친다. 요즘 기업은 국가라는 테두리를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이미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역시 이것일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이것은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거의 같은 질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법칙과 지식을 믿고 살아간다는 원칙은 이미 20세기를 지나면서 그 신성함을 잃었다. 학문은 절대진리로부터 이미 멀어졌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기술적 발전앞에서 치명타를 맞으려고 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다. 유명한 천재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최근에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말을 해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호킹이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무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해 더 잘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말해온 문맥으로 말하자면 그는 현대의 과학자에 대해 과거의 종교가들이 취했던 입장과 같은 입장에 있다. 금단의 문을 열어젖히면 뭔가 엄청난 것이 튀어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끼기에 오히려 그것은 이단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인공지능 기술이 작년이나 올해 혹은 가까운 시기에 나와서 세상이 확바뀐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는 이미 20세기 내내 있어왔고 단지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인식이 그 변화를 따라왔는가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진실은 우리 귀를 언제나 울리고 있어왔다. 단지 그걸 보지 않는 사람이 많을 뿐이다.
새로운 변화는 근원적이고 원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신에 그게 뭐가 되었던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내는 것을 찾으면 된다라고 하는 입장의 변화다. 본질적 가치에서 도구적 가치로의 변화다. 그리고 그게 바로 기업의 입장이다. 우리가 발기부전인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개발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발기란 무엇인가, 어떤 때 우리는 발기하게 되는가를 연구해서 그에 맞는 화합물을 만들어 내야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비아그라는 원래 심장약으로 개발되었다. 개발하다가 보니까 발기를 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발기치료제로 팔아서 큰 돈을 벌게 해준다. 회사로서는 그러면 되는 것이다. 발기의 원리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20세기 이전의 인간들에게 그 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첫번째 원칙이었다. 물론 정도의 문제기는 하지만 이해를 못하면서 그냥 답을 맞추는 태도는 용서할 수 없었다. 비이성적인 행위다. 우리는 법칙과 이해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세상은 인과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20세기를 거치면서 전자통신과 컴퓨터가 발달하고 세상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복잡해지자 이야기가 점점 달라지게 되었다. 신의 자리를 대신하여 들어섰던 첫번째 원리에서부터 풀어나오는 논리의 탑은 무너지고 조각나 버렸다. 실은 비슷한 일은 뉴튼도 했는데 뉴튼이 했던 일이 다른 스케일에서 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대학교수가 멍청이가 되는 세상이다. 이 말을 대학교수가 모두 멍청이라고 하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건 개개인마다 다르다. 이 말은 지금 세상이 마치 중세의 종교시대가 학문의 시대로 바뀌던 시대같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학은 세상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위해서 거대한 전문용어의 탑을 쌓아올렸다. 그리고 대학교수는 그런 전문과정을 통해서 그 학문을 머리속에 집어넣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 학문으로 감당이 안될정도로 복잡해 지면 오히려 그 학문이란 걸 안한 사람보다 교수가 더 멍청하게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는 경제학의 경자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바보같은 경제적인 의견을 가지는 경제학교수가 있을 수 있다. 종교인이 종교를 통해 세상을 보듯이 교수는 학문을 통해 세상을 보도록 훈련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이 법칙과 이성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학문이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다. 세상은 불확실성에 빠진다. 고생한 사람은 이룬 것이 없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은 주목을 받고 부자가 된다. 인생이 로또다.
우리는 중세의 종교인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것을 비슷한 태도로 물을 수 있다. 우리는 논리와 지식에 기반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을 학문의 눈으로 이성의 눈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 서구의 중세시대에서는 합리적이란 종교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합리적이란 이성적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까?
요즘 인기있는 말이 빅데이터다. 어느 회사의 주식이 오를까 내릴까. 그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잘 맞지 않는다. 그런데 트위터에서 그 회사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가하는 것을 모두 모아다가 컴퓨터가 결론을 내리라고 하면 그것보다 더 잘 맞는다. 문제는 그런 프로그램이 귀신처럼 주가를 예측한다고 해도 우리는 왜 주식이 오르고 내린다는 건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그런 것에 무관심하다. 예측할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터넷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터져나온다. 그런 사람중에 직업도 없고 학력도 중졸쯤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이 적어도 최근 몇년동안에는 맞는 말만 한다. 정보분석프로그램은 혹은 네티즌들은 그 사람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최고의 유명대학교수의 말을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정확히 왜 그런가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는 척 할 뿐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답을 맞출 수 있다면 답이 왜 나오는 지는 잘 몰라도 된다. 이렇게 해서 대학교수 수십명이나 국회의원 수백명이 아무 명성도 없는 일개 개인의 지적에 당황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다.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이런 말도 안되는 데이터 분석기법이 정말 통한다고? 믿기어렵다. 그건 그저 유언비어다. 물론 안 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네트웍의 처리능력에 대해, 빅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마치 중세의 종교인들이 학문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듯이 말이다. 이제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발달된 정보처리능력을 가진 프로그램의 능력과 결합할 때 고전적 의미의 이성의 시대는 치명타를 맞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이런 시대를 앞당길 것이다. 그러나 각종 프로그램을 통한 자동화, 정보화는 이미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다. 미래는 이미 시작된지 오래다.
그런 미래에 대학은 어떻게 될까. 프랭크 도나휴는 최후의 교수들이란 책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수라는 직업과 대학이라는 장소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교회가 있듯이 미래에도 대학이 있고 교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이 가라앉고 승패가 갈리고 나면 그 위상은 상당히 크게 축소될 것이다. 뛰어난 사람은 모두 기업으로 가있을테니까 말이다. 대학이 지금의 고등학교와 크게 다를바 없는 학원이 되고 대학교수의 위상이 고등학교 선생님 수준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미 대학의 모순은 아주 크다. 많은 대학이 재정난 때문에 고등학교선생님보다 처우가 나쁜 대학강사에 의존해서 교육을 하고 있다.
다시 중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런 시대에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서 살게 되는가. 인간이란 누구인가. 종교의 시대에 인간은 신에 의존해서 살았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며 신의 종복이다. 신의 질서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성의 시대에 인간이란 세상의 관찰자고 법칙을 찾아내는 이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된다. 현대 국가에서는 시민은 독립적인 이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된다. 그래서 그 인간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의견을 결정하는 민주주의가 정당화 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꿈은 인간은 본래 이성적 존재인데 진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니 지식을 보급하기만 하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하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새롭지만은 않은 새로운 시대의 인간은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다. 네트웍이 인간이다. 정보가 인간이다. 우리는 이미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소산이다라던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같은 말에 익숙하다. 이건 마르크스다. 인간은 앞으로 어떤 네트워크와 공동체에 참여하는가에 따라 다른 미래를 가지고 다른 역할을 하고 다른 취급을 받게될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결코 독립적 이성의 존재가 아니다. 새 시대는 계몽의 꿈을 부정한다. 좋은 세상은 좋은 네트웍과 좋은 공동체가 만든다. 같은 지식을 가져도 그것의 해석은 그 사람이 어떤 네트웍에 노출되어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한 예를 인터넷을 하는 젊은 세대와 인터넷을 하지 않는 노인들의 인식차에서 목격하곤 한다. 스마트세대는 비스마트세대와 다르다. 네트워크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의 현명한 사람이란 자신을 적절히 네트워크에 노출시키는 사람이다.
우리는 네트워크의 소산이다.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 네트웍을 구축하고 네트웍에 의존하는 시대다. 하지만 네트워크에 의해 수동적으로 만들어 지는 인간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구축하는 인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 많이 듣는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시대가 아니다. 악성언론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그쪽 네트워크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줄 이야기를 선별하고 나를 환경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바꿔야 한다. 인간은 경제적 환경의 산물이지만 인간을 결정하는 환경은 경제적인 환경 이상의 것이다.
시대는 매우 빠르게 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이년에 세상이 확바뀌는 것은 아니고 인간은 일년은 커녕 일주일만 굶어도 죽는다. 그러니 너무 미래를 당겨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10년정도의 길이에서 보면 세상은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싶게 바뀌어 있다. 미래는 그리 멀지 않다. 네트웍은 이미 강대하다.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고 평가를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힘을 쓰지 않으면 네트웍은 당신이 당신을 지킬 수 없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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