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
외국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동네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어서 좋다.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도청도서관만 가도 많은 책들이 있다. 거기 말고도 시립도서관들도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몇개월을 살아보니 모순적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책이 많아서 독서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외국에 살면 아무래도 책이 귀하다. 내가 영어책을 읽는다고는 해도 한국어 책 읽는 속력보다 느리고 한국어 책은 귀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보고 읽고 하다가 책을 살 수도 없으니까 인터넷에서 주문해서 받는다고는 해도 책을 살 때는 천천히 골라서 사게 된다. 한권에 몇만원이나 하는 책을 마구 샀다가 사보니 별로라고 하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책이 귀하니까 좋다고 생각되는 책을 다시 읽기도 한다. 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정말 수십번은 읽었다.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한때는 틈만 나면 다시 돌아가 부분 부분 읽고는 했다. 고리키의 어머니, 키다리 아저씨, 곶감과 수필 같은 책도 다시 읽었고 부분과 전체도 노먼베순도 싯달타도 전태일 평전도 다시 읽었다. 칼 포퍼의 자서전도 간디의 자서전도 다시 읽었다. 노자나 장자도 여러번 읽었다. 한국에 오니 책을 다시 읽기가 쉽지 않다. 언제나 새로운 책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귀해야, 굶어야 우리는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먹음직스러운 것이 주어지고, 여기저기 식당이 너무 많으면 좋은 음식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좋은 식당을 찾기가 어렵다. 단순히 좋은 것이 너무 많아서 좋은 걸 좋은지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좋은 것에 붙어있지를 못하게 된달까. 먹고 나면 혹은 읽고 나면 뭐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일단 보면 손이 가고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좋지 않은 것들에 휘둘리면서 살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니까 표지나 제목만 보았을 때 내가 한번은 보고 싶은 책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어지면 오히려 독서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같다. 읽기는 더 열심히 읽으려고 하는데 돌아보면 읽은 책들이 좀 만족도가 떨어져서 잘 고르지 못한 것같다. 나는 기억할만한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써둔다. 좋은 책을 읽으면 읽는 도중에 여러가지 영감을 얻어서 다른 글을 쓰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근래에는 읽고서 독후감을 쓰지 않은 책들이 꽤된다. 그런 책들은 시간이 좀 지나면 내가 뭘 읽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잊혀진다.
이런 풍요의 문제는 생각해보면 단순히 독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만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친구가 너무 많으면 정말 내가 좋아하고, 가까이 했을 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구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설사 그걸 알아도 자꾸 쓸데 없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더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다.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렵다. 사업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먼저 아무 것도 안하는 것부터 배워야 할지 모른다. 돈도 기회도 다시는 없을 것처럼 조심하고 천천히 하게 된다면 정말로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사업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습을 보면 남들에게 뒤질까봐 서둘러 먼저 시작하려고 야단이다. 내가 해서 성공하는 사업이라고 해서 남이 해도 성공하고 남이 해서 성공하는 사업이라고 해서 내가 해도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 설사 성공해도 그 성공속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돈이 많고 기회가 많으면 자꾸 이것저것 해보게 된다. 돈도 없고 기회가 없어도 마음에 평화가 없고 공포가 크면 자꾸 이것저것 해보게 된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외국에 비해 높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오니까 이런 저런 가게가 정말 많다. 하지만 가게를 방문해 보면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가게를 열었다기 보다는 어쩔수 없어서 자영업으로 몰리고 요즘 이게 인기 있다니까 그냥 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동네마트를 하건 커피숍을 하건 이불가게를 하건 그냥 한번 해보고 싶다는 식으로 가게를 열어서는 요즘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 경쟁이 심하고 인터넷 쇼핑 같은 것이 있어서 가게를 하는 사람에게 전문적 면이 없으면 굳이 그런 가게를 다시 가야할 이유가 없다. 사실은 좋은 식당, 좋은 카페, 좋은 마트도 새로 생긴 가게들 가보느라 바빠서 다시 가기가 힘들다.
없이 살던 시대에는 명절이 되어야 사치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제하고 참는 시간과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너무 풍요가 넘치는 환경에 있으면 그 분리가 사라진다. 그래서 점점 더 둔해지고 좋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좋은 것을 알아도 좋은 것에 붙어있기가 힘들다.
문득 생각하니 집에 있는 책들에게 미안하다. 가능하면 그들을 다시 한번 읽어줘야겠다.
'주제별 글모음 > 생활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를 좋게하는 몇가지 방법 (0) | 2015.08.05 |
---|---|
백종원과 진보 정신 (0) | 2015.07.06 |
재미있게 살기 (0) | 2015.03.30 |
바보와 욕망 (0) | 2015.03.19 |
진리를 찾아서 (0) | 2015.03.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