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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거실과 우리가 사는 방식

by 격암(강국진) 2015. 9. 23.

15.9.23

단독주택에 살건 아파트에 살건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대개 거실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리는 대개 거실에 티브이를 놓고 거실에서 시간을 많이 쓴다. 그런데 거실이란게 뭘까. 그것은 당연하게 지금처럼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몇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거실이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도 가족들이 거실에 나와 시간을 같이 보내는 일이 많았을까. 한옥에는 거실이 없다. 대청마루는 거실과 다르다. 아니 적어도 다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거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더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사실 거실은 온돌을 쓰지 않고 내부에서 불을 피워 난방을 하는 집의 핵심이다. 즉 온돌난방이 아닌 경우 집의 핵심이란 어떤 폐쇄된 공간 하나인 것이다. 지붕밑 공간에 난방이 되는 공간, 그 안에서 가족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 그게 집의 핵심이다. 후일 여유가 생기게 되자 각자의 침실과 식당과 접대용 공간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분열되어 나갔을 뿐이다. 세익스피어 시대에만 해도 서구에서는 하인들과 주인이 같은 침대에서 뒤엉켜 자는 것이 당연한 삶의 풍경이었다. 

 

집안에서 불을 피워 난방을 하는 것은 에너지 효율이 나쁘다. 더구나 공기순환의 문제때문에 작은 공간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자살하고 싶지 않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가족들이 모두 각각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그 각각의 공간이 가질 수 있는 크기에는 하한선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부자가 아니라면 가족은 모두 한공간에 뭉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실은 서양식 집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집은 이것과 다를까? 다르다. 일찍부터 온돌을 썼던 한반도에서는 방안에서 난방하는 것과는 달리 방바깥에서 불을 피웠기 때문에 공간을 훨씬 쉽게 분할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한지붕밑에서 온가족이 살았겠지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각자 아궁이를 가진 분리된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온돌집의 근본은 가족 구성원마다 아주 작은 집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작은 집을 마루로 이어붙인다. 우리가 보통 한옥집의 방 하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각각이 분리된 난방시스템인 각자의 아궁이를 가진 작은 집이다. 

 

서구의 집은 하나의 덩어리에서 출발하여 개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조선의 집은 그 근본부터 개인적이었다. 조선에서는 하인과 양반이 사는 곳이 서로 다르며 부모와 자식이 사는 곳이 서로 다르다. 서양사람은 부자라도 성같은 큰 집을 하나 지었다. 조선의 양반은 넓은 부지에 여러 채의 집을 지었다. 사랑채는 손님받는 공간이라고 말해지는데 그런 공간은 대개 사적인 공간과 아주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거실은 서구집의 근본이며 애초에 공적인 공간, '우리'의 공간이었다. 반면에 조선의 집은 그 근본에 있어서 부터 매우 개인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집의 근본에는 거실이 없다. 우리의 공간을 찾기 전에 먼저 개인의 공간이 확보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대가족이 모두 모이는 일이나 손님이 와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부분이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 해결책이 현대나 서구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말하기 전에 한 다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EBS는 아파트 중독이라는 3부작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다. 그 1부에서 방송국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 한옥에 사는 사람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바닥에 선을 긋고 가짜 벽을 움직여서 각자 자기가 살고 싶은 공간을 만들게 한다. 말하자면 가상의 집짓기를 시킨 것이다. 

 

먼저 외국인들이 만들어낸 공간을 보면 거실이 있고 부부침실이 있는데 그 둘사이가 긴 복도로 이어져 있게되어 있었다. 공적인 공간인 거실에서 부부침실은 떨어져 있게 만든다. 이것은 서양사람들이 우리에서 분리된 개인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공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사는 아파트, 한국어디나 있는 흔한 아파트의 구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구조는 전체주의적이고 후진적이다. 우리만 있고 개인이 없다. 아파트는 대개 거실이 집의 중앙을 차지하고 그 거실주변에 방들이 붙어서 배치된다. 그 방들은 문을 열면 바로 거실이 보인다. 그래서 공적인 공간과 각자의 방이 그저 문하나의 두께만큼의 거리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 구조에서 거실에 사람이 버글대면 사람들은 집안에서 어디에도 자기혼자 있을 곳이 없다. 개인의 공간은 확보되지 못한다. 따라서 입시생 자녀라도 하나 있으면 거꾸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 거실에 있는 티브이를 켜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옥에 사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한옥에 살아보니 모든 공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좋았단다. 이 말은 언뜻보면 내가 위에서 쓴 말과 정반대로 들린다. 한옥은 기본적으로 아주 작은 방내지 집으로 구분되어있고 이것이 마루로 연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벽과 문이 서구의 문이나 요즘의 문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면 온가족이 모일 공간을 만들기 어렵다. 예를 들어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한옥에서는 어느 공간에서 해야할까?

 

그 해답은 한옥의 문이나 벽은 떼어내거나 위로 접어올려서 공간이 분할되었다가 이어졌다가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문을 닫아걸면 집은 작은 공간들로 분할된다. 그러다가 문을 걸어 올려서 하나로 하면 집의 공간이 다 이어져서 하나가 된다. 

 

 

 

우리의 아파트를 생각해 보자. 이제 우리는 높다란 탑이나 성같은 고층 아파트에 산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거실에서 보낸다. 그 아파트는 개인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사생활이 없는 것을 당연시한다. 요즘 짓는 아파트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왜 그런 집에서 살아야 할까? 그것은 일정정도 집단에 억압되지 않는 개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조건 가족인데 숨길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여름에 속옷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티비를 보는 아빠의 앞으로 다 큰 딸이 지나가는 것이 현대 한국인의 삶이다. 그러는 가운데 가족 예절은 무너진다.  조선의 한옥이 한국식 예절의 근본이라면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그 예절의 죽음이다. 

 

나는 최근 10여년동안 대형아파트의 가치가 폭락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기여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한다. 문제는 구조가 나빠서 그 엄청난 가격에 비해 사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개인을 강조하게 되는 현대인의 취향과 생활에 맞지 않다. 두배 넓은 아파트도 두 채의 아파트와는 프라이버시라는 점에서 비할 나위없이 다르다. 서울에서 50평 60평아파트의 값은 천문학적이지만 뻔한 구조를 가지면 개인의 공간은 찾기 어렵다. 

 

아파트건 단독주택이건 우리는 이제 서구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아파트도 사실 온돌집이다. 이왕 온돌집을 만들어 놓고 왜 굳이 공간소비에 대한 상상력은 서구식으로 발휘 하는 것일까. 그 공간이 보통 공간인가? 엄청나게 비싼 것이 요즘 공간의 값이다. 평당 몇천만원씩 하는 곳도 있다. 현대 한국인들은 33평짜리 아파트 하나 사기 위해 평생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그 비싼 공간에 온돌까지 깔아서 쓰면서 애초에 공간활용방식이 달랐던 서구식으로 써야 할까? 아니 동양서양따지기 전에 잘 쓰고 있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타이니 하우스 운동 혹은 작은집짓기 운동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런 집을 짓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집을 보면 불과 3평의 공간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갈 수 있는가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나서 30평 40평하는 우리의 집을 보면 우리가 그 비싼 돈을 주고 쓰고 있는 이 공간을 정말 잘 쓰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는 꼭 필요하지도 않을 잡동사니를 쌓아놓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뼈빠지게 바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의 문맥에서 말했을 때 공간을 쓰는 한옥 방식의 핵심은 공간을 가변적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최대한 분할시켰을 때 집은 여러개의 개인적 공간이 된다. 그렇게 되면 가족들은 집안에서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다가 공적인 공간이 더 넓게 필요하다면 그 분할의 벽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커다란 통합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공간의 활용도를 최대한 올리는 것이다. 즉 비싼 공간을 알차게 쓰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다가 이것이 모든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만 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할 주거방식의 최종판을 내놓을 재주는 없다. 원하기로는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집을 지어보고도 싶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며 고민도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가지 작은 예들을 들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해보자. 나는 몇년전에 재미있는 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좁은 홍콩에서 살면서 공간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한 디자인이었다. 이런 집을 모두가 좋아할거라는 것도 이런 집이 최고라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예는 우리가 노력하면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좀 더 일상적인 것을 말해보자. 한국의 아파트에 아주 흔한 풍경은 이것이다. 거실의 한쪽 벽에는 소파를 놓고 그 반대쪽 벽에는 티브이를 놓는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원룸수준의 작은 집이면 몰라도 종종 소파와 티브이의 거리는 적정거리가 넘는다. 모처럼 대형티비를 사도 이래서는 화면이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소파를 내버려 두고 거실 한중간 바닥에 앉아 티비를 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가지는 소파를 거실의 중앙으로 당겨서 소파로 거실을 양분하는 것이다. 그럼 근사한 멀티미디어 시청공간이 생기고 소파의 뒤쪽에는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우리 집에서는 그 공간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족 공용 컴퓨터 사용공간으로 쓰고 있다. 만약 큰 거실이 필요해 지면 소파를 잠시 뒤로 밀면 된다.  

 

학생들방의 기본구조는 종종 침대옆에 책상을 놓는다. 그러나 이것도 책꽃이로 가벽을 만들어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책꽃이가 침대와 책상을 가르는 가벽이 되면 공부방과 침실이 구분된다. 극단적으로는 한쪽에서 누군가가 잠을 자도 책상에서는 공부를 할 수 있다. 기본은 분할하는 것이다. 가구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 유사시에는 분할은 바뀔 수 있다. 

 

안방에 우리는 보통 장롱을 놓는다. 그런데 장농은 비싼데다가 대개 덩어리가 큰 짐은 집어넣을 수가 없다. 안방도 분할해서 수납공간과 침실을 구분할 수 있다. 드레싱룸이 따로 없다면 가벽을 세우고 그 가벽 너머는 수납으로 쓰고 이쪽은 침실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없이 공간을 고정되게 분리한 주택이란 공간의 사치스런 소비다. 우리가 성처럼 거대한 집을 지으면 물론 우리는 얼마든지 개인의 공간을 가진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집을 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이제 성에 살지 않는다. 성은 너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마을에 가서 산책을 할 때에도 이런 생각을 한다. 저것들은 크기가 작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하나의 성들이라고. 그저 남을 흉내냈을 뿐 공간에 대한 고민은 깊지 않다고. 그들은 큰 성보다는 작지만 작은 성으로 그만큼 많은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고민없이 지어진 집에서 공간을 원하는대로 합쳤다가 분할했다가 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미래가 향하는 방향이 아닐까 한다. 좁고도 넓은 집이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집이다. 공간활용도가 높아지고 집을 짓는 비용이 싸지면 언젠가는 마침내 대중이 주거비용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3D 프린터로 멋지게 설계된 작은 집을 순식간에 프린트해 내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많은 공간분할이 있으면서 가변적으로 변하는 집이란 단순히 인테리어에 대한 것이 아니고 현대의 삶과 사회에 대한 철학일지 모른다. 현대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무 칸막이도 없는 사회도 아니고 어떤 고정된 칸막이로 우리를 속박하는 사회도 아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각자 자기의 삶을 가질 수 있는 다양성있는 사회를 원한다. 그러다가 필요에 따라 칸막이를 바꿔서 하나된 우리로 뭉쳐서 행동하기도 하는 사회, 즉 모든 구분과 호칭은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회, 이것이 현대적인 삶이고 사회가 아닐까? 

 

우리가 고민하기에 따라 우리는 훨씬 더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물론 누군가는 실험적인 집을 짓는 것같은 큰 프로젝트를 해보고 새로운 주거 형태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각자의 앞에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즉 우리 집의 공간을 쓰는 방식,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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