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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농담

by 격암(강국진) 2015.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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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황제같은 권력자는 자신의 유머감각에 대해 큰 착각을 할 수 있다. 주변사람들은 황제에게 아첨하기 바쁠 것이고 따라서 황제가 어처구니 없는 농담을 해도 미친듯이 웃을 것이다. 그러면 황제는 자신을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반드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아첨하기 위해서 웃다보면 주변사람도 바뀐다. 황제를 둘러싸고 아첨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스스로가 보고 있다. 즉 자신이 웃고 있다는 그 사실을 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 때문에 사실 그 농담이 실제로도 조금쯤은 웃기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웃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농담이 웃긴 정도를 가지고 1에서 10까지 등급을 매긴다면 황제의 농담은 1등급은 아니지만 3등급쯤은 되는데 자신은 다만 그것을 약간 과장해서 1등급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제도 주변 사람들이 아첨하는 것은 알지만 자기 농담이 3등급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나마 상식적인 겸손함이 있는 지혜로운 황제라면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에게, 그러니까 그 농담을 누가했는지를 모르는 많은 사람에게 그 황제의 농담들은 7등급이나 9등급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황제의 신하들은 때로 황제의 농담에 진심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웃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황제의 이번 농담은 진짜로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재미있었던 황제의 농담을 어디가서 반복해 보고는 그 결과가 형편없다는 것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황제가 아니라는 이유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즉 황제가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만큼이나 아첨하는 주변 사람들도 자신에 대해서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 황제의 세계는 그 안에 있는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면서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다. 그 안의 사람들은 자기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자체가 환상이다. 나는 내가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환상이다.

 

돌아보면 이런 예는 사방에 많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은 1973년에 있었던 인질강도사건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당시에 인질들은 강도에게 협조하는 정신상태가 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여러 인질사건에서 인질들이 인질범들에게 감화되는 현상이 목격된다. 생명의 위협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인질들은 어쩔 수 없이 인질범들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말을 듣다보면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인질범들이 강요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괜찮은 사람이고 도울만 하니까 돕게 되었다는 환상이다.

 

친일파 아니 민족 배신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말도 비슷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을 인질로 잡은 거대한 인질협박범들이었다. 그 안에서 앞장서서 일본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이 말한다. 조선은 못났고 그래서 혼자서는 발전할 수 없었는데 일본때문에 발전했다고. 일본이 훌룡하고 너무 대단해서 누구나 도울만 했다고. 일본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이런 모든 예가 보여주는 것은 소통 혹은 소통의 범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소통이 막히기 때문에 이런 환상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은 비교적 확실하고 알기 쉽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는 조금 더 알기 어렵지만 생각해 볼만한 것이 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만 주장할 것이다.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소통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객관화를 해야한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많은 경우에 옳지만 그렇다고 당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소통이 잘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한 고민과 대안없이 그저 소통을 많이하자고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일들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나혼자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과 나를 찾는 것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과 소통해서 자기만의 환상을 깨는 것과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세뇌에 빠져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도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은 외부의 정보를 얻을 기회인 동시에 독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다. 소통의 대상과 방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이니 많이 보고 소통하며 이러저러한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적 감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 일 수 있다. 당연하다니 뭐가 당연하다는 말인가. 황제의 궁정안에서 친화력을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람과 내성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지키는 사람 중 정말로 환상에 안빠진 쪽은 어디일까? 오히려 소통이 환상을 주입하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민족들간의 분열로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 가서 소통을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대개 하나 마나한 말이다. 물론 소통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는 큰 공감대가 필요하다. 그것없이는 소통을 위한 노력이 공감대를 창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비극만 만든다.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도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깊은 고민과 통찰로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한 채로 소통을 시도하면 원한만 쌓여서 소통이 더더욱 불가능해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그저 자주 자주 언쟁을 하면 결국 서로에 대한 인식이 좋아진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일까? 개신교신자와 무슬림이 자주 이야기하면 종교대통합이 올까 아니면 종교전쟁이 일어날까? 대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면 해결책이 된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더더 넓은 테두리로 소통을 무한대로 넓히면 저절로 좋은 세상이 온다라는 것도 자유주의 혹은 자유시장주의의 변형일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사실도 아닐더러 때로 다수가 소수를 침략하는 행위 혹은 돈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침략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객관의 이름으로 소수파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시대는 오히려 나를 찾는 시대고 지방자치의 시대다. 장벽을 없애고 더 큰 것만 바라보다보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시대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어디인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가 어딘가에는 테두리를 긋고 그 안의 것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불쌍한 나라의 사람들이 안타까우니 국경을 아예 철폐하고 누구나 한국 대선에서 투표권을 가지도록 하자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우리는 언젠가는 어딘가에 테두리를 긋고 그 안의 것과 소통해야 한다. 이것을 잊은 사람은 오히려 어떤 테두리가 너무 당연하다고 맹신하는 사람들이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테두리가 테두리로 보이질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라는 테두리를 긋고 그 안의 인간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환경은 무시하는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생물의 종하나가 멸종되어야 한다면 그 답이 당연히 사람 하나를 살리는 것일까? 여기에 당연한 답이 있는가?

 

우리는 우선 나의 내부에 나의 가족에 나의 지역에 행복을 건설해야 한다. 다만 그 테두리가 임시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무한한 객관성의 열정에 빠지는 것도 일종의 환상이고 그렇다고 작디 작은 세계에 갇히는 것도 환상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한명의 황제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면서 일상에서 위화감을 느끼려고 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확신을 너무 강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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