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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탈중심화와 참여 자유주의

by 격암(강국진) 2016. 4. 23.

2016.4.23

탈중심화의 시대

 

비가 오면 길은 우산을 쓴 사람들로 채워진다. 사람들이 우산쓰기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들 비가 온다라는 조건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무의식적으로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다. 현대의 삶이라는 같은 조건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묘사하기 위한 말들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말중의 하나는 분명히 탈중심화일 것이다. 즉 우리는 중심이 붕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중심의 붕괴란 이념의 붕괴이고 질서의 붕괴다. 붕괴란 비극을 불러오는 일이 많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낡은 질서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모순을 누적시키기 때문에 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붕괴란 합리적인 개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정치의 탈중심화 혹은 탈이념화는 또렷하다. 김영삼의 3당야합이래 정체성이 불분명해진 한국의 정치판은 이인제와 손학규를 거치면서 더 애매모호해 졌다. 지금 민주당을 이끄는 김종인은 오래전도 아니고 바로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지휘하던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리틀 김대중이라고까지 불렸던 한화갑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이다. 적어도 민주당의 일부는 노무현이나 이른바 친노 성향의 정치인보다는 아예 새누리당의 정치인을 더 선호한다는 느낌이다. 이래서야 전두환이나 박정희와 싸웠던 민주화운동도 그저 개인적인 권력싸움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다. 안철수도 대개는 야권으로 생각되어 지금의 여당과 입장이 매우 다른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은 구식의 2분법이 만들어 내는 착시일뿐 과연 안철수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의 역사를 계승할 의지가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그가 문재인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낡은 악으로 판단하는 느낌이다.

 

이 혼란 속에서도 여러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이념 혹은 비전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널리 알려져 있는 가치를 지키고 실현하겠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정도차는 있을 지언정 누구도 큰 설득력은 없는 것같다. 그들은 대개 정치적 대립자에 의해서만 그 존재의미가 결정된다. 따라서 하나의 쌍으로 파악하면 그들 대부분은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무능한 존재로 파악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희망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념이 아예 없거나 그들의 이념이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새누리당의 반공이데올로기도 이젠 그 효력이 전보다 약하고 여야의 이분법으로 당의 노선에 따라 영혼없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은 출신 지역의 입장에서 보면 때로 역적처럼 보인다.

 

이제 선거판은 점점 더 개인의 인격이라는 애매모호한 가치를 평가하는 자리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인격은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의 근본이 정치가의 인성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왕조로의 퇴행이다. 왕조는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감당할 수 없어서 붕괴한 것이다. 그러니 대안이 될 수 없다. 대통령 임기동안에 모든 것을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권력을 중앙에서 틀어쥐는 사람이 국정을 운영하면 그 사람이 설사 선의를 가졌다고해도 현대사회의 복잡성속에서 나라는 엉망이 될 수 밖에 없다. 일은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잘되면 내 업적이요 안되면 나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변명이나 늘어놓는 권력자가 될 뿐이다.

 

분권과 위임은 복잡한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탈중심화는 그것이 이제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말이다.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 모두가 각자 살아가는 시대, 다양성이 극대화되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설득력을 가지는 대응은 작은 지자체가 자기 살길을 각자 찾고 마을 만들기 등으로 지역 공동체를 활성하고 우리가 자기의 집과 자기의 가정과 자기 개인의 삶에 보다 집중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숲과 집을 키우고 가꿔야 한다. 물질적인 의미에서든 정신적인 의미에서든 말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이미 마을 만들기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개발과 문화활동은 시대적 대세가 되었다. 인문학과는 인기가 없지만 인문학 강좌는 인기가 높다. 방송은 어느새 집에서 밥을 해먹는 방법이나 집을 리모델링하는 것에 대한 것 그리고 여행과 여러가지 취미활동에 대한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국제시장보다 훨씬 더 신파조로 애국애족을 주장하는 드라마들이 방송되고는 했다. 산업역군의 애환을 그리는 드라마같은 것 말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흥행을 보면 그런 정서가 다 죽은 것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은 확실한 옛 노래다. 우리는 물론 여전히 한국 사람이고 세금도 성실히 내고 한국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머리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국가나 민족같은 거대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탈중심화, 탈이념화되었다.

 

정치의 종말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심지어 정치의 종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다. 정치란 사회적 운동이며 이념이 없는 정치행위란 있을 수 없다. 이념이란 우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문제가 뭔지 그리고 그 해결책이 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문제의식도 해결책의 제안도 없는 정치 행위나 공동체가 있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이념이나 정치적 정체성에 진심으로 신경쓰지 않는 정치판은 그저 사료통 앞에서 더 많이 먹겠다고 싸우는 짐승들의 싸움판일 뿐이다.

 

탈중심화란 이념의 붕괴이고 질서의 붕괴다. 그런데 그것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 있어서의 완전한 이념의 부재나 질서의 부재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고 결코 구시대에 대한 대안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사회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지 완벽한 혼란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은 존재할 수 없는 데 이념이 혹은 질서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은 적어도 첫인상으로는 해결불가능한 모순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이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풀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는 싸움과 혼란이 흔하다.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아보이는 이념들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무책임한 파괴자로 보이고 탄압해야할 대상으로 보인다. 제일 대표적인 경우는 바로 빨갱이나 종북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의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민족의 붕괴, 학교의 붕괴, 가정 질서의 붕괴, 성역할의 붕괴, 사무실 질서의 붕괴등 질서와 이념의 붕괴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

 

탈중심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낡은 질서와 이념의 붕괴가 절대선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 역시도 아마 완전한 무질서가 불합리한 질서보다 더 나쁘다고는 어렴풋이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도 후다닥 만들어 낸 어설픈 대안이 대재앙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고의로 축소평가한다. 반대로 어떤 이념이나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자고 하는 쪽은 기존의 질서가 모순을 축적시키고 있어서 그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부정한다.

 

우리는 물론 이것을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표현은 너무 진부하며 심지어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탈중심화는 너무나 빠르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일이므로 누구도 옛날 질서를 그냥 유지하자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대안이 있던 없던 누구나 개혁을 외친다. 변화해야한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시대다. 바꾼다면 뭘 바꿀 것인가. 나는 안 바뀔테니 온 세상이 바뀌어서 그런 나를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수많은 사안에 대해 의견을 가져야 하는 우리는 더이상 보수나 진보로 구분될 수 없다. 그런 선긋기는 무의미한 패거리 사이의 무의미한 씨움만 만들 뿐이다.

 

참여의 시대

 

탈이념화 혹은 탈중심화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질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탈이념의 시대에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이 모순적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난제를 해결하려고 우리 머릿속의 지식을 뒤지지만 나는 그 답이 우리 앞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 답에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하다. 머리보다 몸이 그것을 먼저 해결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답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 답이란 바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아이디를 가진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유로이 선택과 합의에 의해서 여러가지 사이트 혹은 게임 혹은 공동체에 참여한다. 편의상 이 것을 모두 게임이라고 부르자. 우리의 의무와 권리는 그 게임이 시작될 때 한계가 그어지게 되고 대개 유한하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소설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사이트에 가입했을 때 나는 아이디를 하나 만들게 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런 사이트는 그 소설을 같이 즐기겠다는 의도에 공감한다는 전제하에 가입된다. 물론 우리는 특정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종류의 모임이 될 것이다. 소설을 즐기겠다는 사람들은 모여서 그 기본적 전제를 깨지 않는 한도내에서 같은 아이디를 가지고 도움을 주거나 받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그 아이디는 신뢰를 쌓아 나간다. 사용자가 어느 날 매우 기분이 나쁜 나머지 도저히 커뮤니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불쾌한 말들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타격입고 그 존재가 위태로워 지는 것은 그 사용자의 특정 아이디다.

 

인터넷에서는 무수히 많은 커뮤니티나 게임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게임들은 참여가 좋을 경우 진화하고 큰 영향력을 가지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참여 자유주의라고 부르고 이것이 육체를 가진 개인을 기반으로 구성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참여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러한 질서에 기반한 사회에서 가치의 근원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참여와 공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자유주의는 개인을 가치의 보존자이자 생산자로 본다. 다시말해 개인들은 뭐가 좋은 것인지를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서로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도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가지게 만들 때 우리는 최대한의 이익과 선함을 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개인은 뭐가 좋은 것인지 느끼고 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육체를 가진 인간을 말한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자유를 누리고 책임과 행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이미 어느정도 수정을 겪었다. 시장의 활동범위가 대륙과 바다를 뛰어넘을 정도로 넓어지자 개인만을 행동과 책임의 주체로 본다면 육체를 가진 개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환경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인간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전에 이미 가상의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바로 법인이다.

 

법인은 법체계 속에서 인간처럼 취급된다. 다만 차이는 법인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법인이 죽고 사는 것은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의 법인은 다수의 인간들에 의해서 구성될수 있기 때문에 종종 한 명의 인간이 가지는 능력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법인이 만들어지자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 그리고 인간은 사실 지금 법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지금 지구를 지배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아니라 법인이다. 우리는 알파고같은 인공지능을 보면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것을 걱정하지만 실은 이미 인간은 법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거나 그렇게 되기 직전인 것이다. 아마도 법인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사회속에서 투표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인은 주주총회에서 주식을 소유한 만큼 의결권을 가지듯 내는 세금에 비례해서 투표권을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공동체는 법인을 제어하고 반독점법같은 것으로 법인의 무한 성장을 막기도 한다. 그러나 육체를 가진 인간은 법인보다 여전히 약하다. 법인은 늙지 않고 죽어도 얼마든지 다시 되살날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참여 자유주의라는 것은 그렇게까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개인들을 자유롭게하면서도 다툼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개인도 늙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무한책임이라는 것은 거래와 소통을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는 윤리고 뭐고 따지지 않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축구나 탁구라면 비록 패배한다고 해도 그 손실이 한정적이므로 때로는 패배조차도 즐기게 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문제는 인간을 너무 쉽게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많은 약속과 의무가 우리를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한다. 삶이 그 자체로 함정이 된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한번 선택하면 다시는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는 종류의 선택은 피하고 싶다. 우리는 여러가지 삶들을 모두 살아보고 싶다.

 

자유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옳고 그르다는 것이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던 고전적 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옳고 그른 것과 정의 혹은 합리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다른 문맥에서 다른 세계에서 옳고 그른 것은 달라지게 된다. 세계가 단순하고 천천히 변하던 옛날에 세계란 단지 하나로 파악되었으므로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지만 탈중심화의 현대에서는 세계가 여러가지고 세계는 변한다. 따라서 옳다는 것도 여러가지고 옳다는 것은 변한다. 단 하나의 진리가 진리가 아닌 것들을 억누르고 승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내일이 되면 뭐가 승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참여 자유주의에서 인간은 육체적인 자기와 구분되는 다수의 아이디가 필요하다. 그리고 참여에 의해 그것들을 자유롭게 키워가는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뭘 하던 실명으로 단 하나의 아이디만 가지고 활동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많이 비판받는 주제이지만 인터넷에서 평생 오직 하나의 아이디 밖에 가질 수 없다면 인터넷의 가능성과 힘은 당연히 엄청나게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현실세계에서 인간들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참여 자유주의는 그것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참여의 주체로서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합의에 기반하여 게임을 만들거나 참여할 수 있고 그 게임안에서는 게임의 법칙의 제약을 받는다. 심지어 그 아이디의 파산이나 죽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른 게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 세계에서 어떤 질서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는 이 세계에 오직 하나 존재하는 진정한 질서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게임이 다수의 사람들의 참여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보이면 된다. 다시 말해 서로 상반되는 주장은 하나가 살면 다른 쪽이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난다.

 

맺는 말

 

참여자유주의란 임시성과 동시성이 강조된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고 변하는 존재이므로 질서는 언제나 임시적이지 최종적이 아니다. 두개의 반대되는 이념은 진리가 객관적으로 오직 하나 존재하는 고전적 세계에서는 죽도록 싸워야 하지만 참여 자유주의의 세계에서는 그들은 공존한다. 서로가 서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은 참여를 기다릴 뿐이다. 축구와 농구는 서로 다른 게임이지만 우리가 게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공존하면서 같이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축구는 농구를 억누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축구 이외의 게임이 존재한다는 것은 축구팬에게도 좋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들도 다른 종류의 롤플레잉 게임을 통해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살아 볼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은 그렇게 살면서 공감이 되지 않는 쪽에 대한 참여를 줄여 가면 된다.

 

참여자유주의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오직 그들이 참여하는 게임의 역할 즉 개별의 아이디로 파악한다. 비록 법인이 있다고 해도 그 법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윤리적 책임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듯이 참여 자유주의에서도 하나의 아이디 뒤에 있는 사람들의 윤리적 책임이 모두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우리는 게임내부에서 하나의 아이디를 유한한 책임소재를 가진 존재로 파악한다. 법인이 빚을 지고 파산해도 그 주식소유자들에게 가서 책임지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게임을 의식해야 한다. 즉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에 모두가 존재한다는 개념보다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게임의 세계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계속 의식해야 한다. 우리가 농구를 하고 있다면 공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축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칙이다. 많은 사람들은 고의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게임들을 이리저리 뒤섞어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것은 참여 자유주의에서 금기시 되는 일이다. 게임이 가정하는 세계와 룰은 계속 의식되어야 한다. 목욕탕에서는 나체도 괜찮지만 결혼식에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는 말이다.

 

참여 자유주의의 사회란 고밀도 정보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미 여러가지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 익숙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져서 겹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온라인 아이디를 서로 부르며 만나는 모임에 이미 익숙하다. 한국인으로서 중학생과 중년남자가 만난다면 그들은 한국인으로서 행동할 것이며 대개 연장자인 중년남자에게 중학생은 존댓말을 쓰고 중년남자는 하대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인터넷 아이디를 서로 부르면서 만나면 오프라인에서도 대화는 온라인에서처럼 평등해 질 가능성이 있다. 굳이 만난다면 말이다.

 

참여 자유주의는 기술에 크게 의존한다. 아니 그것의 탄생 자체가 정보화 기술의 결과다. 옛날 시골의 집성촌에서처럼 소수의 사람들만이 매일 서로를 직접 만나는 환경에서 참여 자유주의는 무의미하고 번거로울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빠르게 처리되어야 하는 현대 사회의 환경에서 참여 자유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에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개의 생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한번의 잘못된 말이나 선택으로 인생이 회복불능으로 망가진다면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기술적인 면을 제외하고 공동체 정신을 논한다던가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설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느리고 단순하게 살고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목가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게임의 참여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체성중의 하나로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문명을 거꾸로 뒤집자는 말밖에 되지 않아서 현실성이 없을 것이다.

 

참여 자유주의는 언제 현실화 될 것인가. 이 글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정말 옳은 것일까? 이것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옳은가 그른가하는 질문은 본질을 벗어나 있다. 참여 자유주의의 아이디어는 그 자체가 참여 자유주의가 말하는 게임의 하나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퍼져나갈 때 그것은 그 아이디어가 절대적 진리라는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아이디어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면 충분하며 그래서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디어를 좋아하게 될 때 그 아이디어는 정말 생생한 실체가 될 것이다. 참여 자유주의는 현실이되고 옳은 것이 될 것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이 가지는 힘이 실체로 느껴지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참여의 힘이 실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를 경험해 본 것이다. 참여는 버튼을 누르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참여 자유주의적으로 살아갈 더 큰 동기를 가지게 되겠지만 미래는 언제나 우리의 선택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 게임에 참여하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술적으로 우리는 이미 참여 자유주의적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우리가 삶을 게임들의 참여로 이해하고 서로에게 이 아이디어를 설득해보고 이것이 가진 가능성을 발굴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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