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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우리의 다름과 같음

by 격암(강국진) 2016.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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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한다. 시험을 보고 붙거나 떨어진다. 유명해지거나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그렇게 느낄 것을 강요당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은 삶의 핵심을 이룬다. 무엇보다 먼저 독점적 소유란 현대 자본주의 속의 개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이 내 것일 뿐 어느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보다 더 성적이 좋아서 혹은 더 좋은 부모를 만나서 혹은 더 예뻐서 혹은 더 사교성이 좋아서 혹은 그저 더 운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더 좋은 지위에서 더 많이 존중되고 보호되고 있다. 이 다름들이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무너질 것이고 우리의 자긍심과 우리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무너질 것이다. 종종 다름을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의 자긍심과 양심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넌 왜 이렇게 사는 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언제나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물론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여러번 그 다름이 단단한 실체라고 우리가 주장해도 다름은 철학적 문제다. 다시 말해 그것의 의미는 우리의 생각과 관점에 민감하게 의존한다. 다름과 같음의 문제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름은 수단이고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과 쌍을 이루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질문은 없는데 답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우선 몸무게같이 매우 객관적으로 측정이 가능한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어떤 두 명의 사람도 정확히 똑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물론 모두 다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말해서 다르다는 것은 기준의 문제다. 원자 하나의 질량까지 내려간다면 몸무게가 정확히 똑같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겠지만 1킬로 그램 정도의 오차로 몸무게가 같은 두 사람은 많을 것이다. 만약 몸무게의 차이가 백킬로그램 정도 차이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적어도 99%의 인간들은 한 쌍으로 비교했을 때 같은 몸무게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말해 인간과 코끼리는 혹은 인간과 혹성의 몸무게는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서로 같은 몸무게를 가진다.

 

문제는 차이의 존재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고 차이의 목적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고 할 때 그 차이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어떤 기준으로 다르다는 것일까? 그 차이는 정말 중요한 것일까? 우리가 같다고 말하는 말과 우리가 다르다고 말하는 말이 정말 그렇게 다른 말일까?

 

여기 어떤 작업이 있다고 하자. 그 작업을 하는데는 체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체력이라는 것이 백미터를 20초안에 뛰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정도다. 이정도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체력이니 이 작업이 요구하는 체력의 관점에서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비슷한 체력을 가졌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설사 팔이 하나 없어도 그렇다. 반면에 소방관이나 군인 혹은 프로 축구선수같은 직업은 훨씬 더 높은 체력을 요구해서 그저 평범한 체력을 가진 사람은 이런 직업에 종사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차이란 그냥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탄생시키는 목적과 쌍으로 존재하고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임시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같은 사과가 다른 빛을 만나면 다르게 보이듯이 같은 존재가 다른 목적을 만나면 그 것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될 뿐이다.

 

현대사회가 종종 가지는 불행한 측면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어떤 거대한 시스템의 작은 부속이 된다는 것이고 특히 나이 어린 학생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당한 채 교육받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기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반세기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배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대학 졸업장도 너무 흔해졌고 입시나 취업공부에 시달리는 기간이 훨씬 더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어 훨씬 더 길게 가게 되었다.

 

그 긴 시간동안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지긋지긋하게 듣는다. 그런데 도대체 그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뭘 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이고 무슨 작업을 기준으로 더 뛰어나니 덜 뛰어나니 같은 평가를 부여받는 것일까? 교육받는 기간이 길어지고 세상이 복잡해 짐에 따라 우리는 그저 이런 저런 차이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강요당할 뿐 그 차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는 점점 더 멀리 격리당하고 있다. 수학 50점과 백점의 차이, 역사 문제를 하나 틀리고 맞추는 것의 의미, 영어 문법 문제를 몇 문제 틀린 것의 의미는 한없이 흐려지는 것같은 가운데 우리는 계속 해서 그 차이를 인식하도록 강요받는다. 마치 그 차이에 우리 삶의 의미 전체가 걸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는 차이나 다름의 인식에 대해 과학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의 과학이란 이 것과 저 것이 다르다라는 분류의 개념을 관찰과 측정으로 바꾸는 행위를 그 핵심으로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위와 아래를 정확히 측정가능한 높이라는 개념으로 바꾸고 부자와 가난뱅이를 재산의 양이라는 정확히 측정가능한 개념으로 바꾸는 행위가 현대 과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렇게 수량화하고 이 수량화된 양들의 관계를 기술하는 법칙을 찾는 것이 현대 과학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다름과 같음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어리석음을 제거해 주었다. 적어도 초기에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개념적으로 부자와 가난뱅이 혹은 상류층 중산층 빈민층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나면 모두를 하나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개의 이름들로 분류될 수 있는 존재라기 보다는 하나의 연속체를 이루는 덩어리의 일부다. 어딘가에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없다는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가 그어 놓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 구분선이 실은 허구이며 세상에는 하나의 연속체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많은 환상이 사라진다. 바로 뉴튼의 물리학이 수없이 많은 마술과 유령을 물리쳤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과학을 배우면 물리적인 세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세계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시각은 옛 허상을 물리치는 대신 새로운 허상을 대중에게 주입시켰다. 그것은 바로 모든 차이가 다시 말해 모든 측정결과가 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1분을 절약하고 천원을 더 벌며 1점을 더 높이 받는 것에는 모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우리가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다르다. 그것이 인간의 시선인데 과학은 무한한 보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지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다름이란 언제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따라서 우리는 나중에 그걸로 뭘 할지도 모르면서도 일단 돈은 좀 더 벌어야 하고 기록은 일단 조금이라도 더 좋아야 한다고 믿게 된다.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1초라도 기록이 좋으면 그 차이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1등이고 저 사람은 2등이니까 말이다. 어떤 차이든 모든 차이는 다 유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나는 누구인가를 우리는 누구인가를 말해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름의 의미는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관점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 지기 때문에이런 믿음은 우리를 특정 이데올로기의 맹신자로 만들기 쉽다. 유치원때 교통신호를 잘 지켜서 남들보다 더 칭찬받았다고 해서 그 칭찬에만 매달리면 교통신호나 규칙도 중요하지만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상식을 배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성적으로 칭찬받았던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한다면 삶이 성적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배울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산처럼 거대한 재산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재산이 나에게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면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한끼의 식사라면 천그릇이나 억그릇의 밥이 의미가 없듯이 목적을 잃은 재산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다름과 같음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두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는 실질적으로 무한의 차원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플랫랜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기하학적 도형들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 차원의 세계인 플랫랜드에서처럼 만약 우리가 그저 선분 같은 1차원적인 존재였다면 우리의 차이를 논하는 문제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저 서로의 길이를 정확히 측정해서 서로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수한 평가를 거친다. 그 평가란 바로 우리 자신을 측정하는 행위다. 그것은 자연을 관찰하고 측정함으로써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는 과학적 행위와 같은 선상에 있다. 우리는 측정을 통해서 자기자신과 타인이 누구인지를 알아 내려고 한다. 우리가 만약 선분처럼 단순한 존재였다면 이러한 시도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인간도 그렇지만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저 기하학책에 나오는 선분처럼 그 길이만을 특성으로 가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측면들을 가진다. 어떤 인간도 어떤 돌도 그저 1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2차원도 10차원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다.

 

우리가 어떤 몇 개의 차원에서 인간을 계속 측정하면 그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라는 생각은 큰 문제다. 적어도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복잡해져 가는 오늘날 인간은 그렇게 간단히 평가될 수 없다. 평가될 수 없는 데 평가하겠다는 시도는 인간을 단순화시키려는 압력으로 변한다.

 

그것은 마치 예술조각품을 무게와 색깔로만 측정하겠다는 시도와 같다. 물론 하나의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무게가 적게 나갈 수 있고 색깔이 더 어두울 수 있다. 그렇게 많이 강조하지 않아도 하나의 작품이 특정한 무게를 가지고 특정한 색깔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눈먼 사람이 이 무게와 색깔이라는 기준만 강요하면서 작품들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예술작품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비합리적인 평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무게와 색깔만 강조한다면 진정한 예술가는 억압되어지고 그저 더 거대하고 더 하얀 덩어리만 만들어 내는 사람들만 사회적인 승자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평가가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가하는 측면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점점 더 나빠지는 문제가 존재할 위험이 있다. 더 많은 평가는 더 많은 관찰과 측정에 해당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측정의 행위는 측정당하는 존재에게 압력을 가한다. 한 번이라도 시험공부를 해 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러니까 더 많이 측정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겠다는 발상은 마치 어떤 예술작품이 뭔지 알아보겠다고 자꾸 두들겨서 그걸 부셔버리는 일처럼 되기 쉽다.

 

그나마 조각품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인데도 이렇다. 인간은 살아있고 인간은 변한다. 그런 인간에게 이런 저런 딱지를 붙이고야 말겠다는 우리의 집착은 위험한 것아닐까? 시대에 뒤진 교육이 인간을 성장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단순하게 만들고 나아가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누구나 한번 쯤은 느껴 본 일이 아닌가?

 

과학의 성공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버릇을 가지게 만들었다. 개미가 양자역학을 이해하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유한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이란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가 백여개 남짓이 아니라 1억개쯤이었으며 모든 물질들이 이런 여러개의 원자들로 이뤄진 고분자였다면 우리는 원자론을 발견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과학적 성공은 그 눈부심과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저차원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에 국한된 것이다.

 

그런데 다차원성이야말로 망의 시대가 시작되는 오늘날의 세상이 가지는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특성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지 말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초중고의 교육은 백년전과 다름이 없는데 대학교수들은 솔직히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기준에 따라 잘했니 못했니를 따지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이 특히 교육의 단계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다가올 미래에는 점점 더 그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 수능만점을 받은 학생은 어떤 의미에서 천재다. 그런데 그 천재가 과연 천재적인 결과를 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서울대 법대를 합격하고 대학재학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우병우는 어떤 의미에서 천재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생산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는가? 문화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감성부족의 공무원이 문화진흥을 위해 열심히 뛰면 정말 문화가 발전하는가?

 

과학의 발전은 우리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이 뭔지 알고 산이 뭔지 알고 강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저것을 척척 분류하고 어떤 다름의 의미를 절대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더 그럴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는 직업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본다. 네트웍이 발달하면서 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것들이 직업으로 등장한다. 예전의 기준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사람이 다르게 살고 형편없어 보이던 사람이 아주 잘 살 수도 있다. 이런 시대에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로 여겨질 것이다. 다만 당신이 그 차이의 의미를 뭐라고 생각하는가가 문제다. 당신은 정말 나와 당신이 뭐가 다른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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