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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살아있기 위하여

by 격암(강국진) 2017. 1. 1.

2017.1.1

연말이라 부모님을 뵙기 위해 수원으로 차를 달리면서 나는 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차에서 들었다. 이 방송에서 한 유명 음식평론가가 김치에 대해서 했던 말들은 한마디로 우리 민족주의같은 거 멀리 합시다라는 말이었는데 나는 이런 말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우리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거나 김치가 기무치를 이겼다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지 말자고 내내 역설했다. 그는 낡은 민족주의적 생각은 해방이후 독립된 나라를 가진 순간 잊었어야만 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 평론가는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어떤 악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자기 나름의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그런 방송이 못내 아쉽다. 그건 중립을 가장한 편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부당한 권력앞에서 노동쟁의를 하고 있는 힘없는 사람들 앞에 가서 교통신호 위반이나 소음공해 운운하면서 우리 그런거 이제 하지 맙시다같은 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런거 이제 시대에 뒤진 일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느낌이다. 내 귀에는 이게 같은 일로 들린다는 것이지 그 평론가가 이런다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나의 불편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거대한 단어를 이야기하다보면 위압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좀 더 작은 단위인 가족을 생각해 보자. 어떤사람이 자기 가족에 대해 과도한 우월주의에 빠져서 어딜가나 우리 가족의 밥이 최고고 우리 집의 나무가 최고고 우리 아내나 우리 자식이 최고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 가족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된다. 나는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위의 평론가처럼 조언하는 것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식의 꼴불견이 싫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내 아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보인다거나 나는 우리 집 정원의 정자에 앉아있을 때가 세상 어느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좋다라고 말하는 건강한 애착과 주관적 관점 또한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이는 다른 집 아내나 다른 집 정자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는 보편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신처럼 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은 결국 자기가 아는 자기 주변의 것만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국지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편협한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편협하지 맙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덜 편협한 것이다. 왜냐면 후자의 사람은 자기가 편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보편도 결국 누군가의 의지와 역사가 만들어 낸 것이다. 야구밖에 모르는 사람은 야구잘하는 사람이 훌룡해 보이겠지만 더 큰 눈으로 보면 결국 야구란 여러 게임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뿐 보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보편인 것과 보편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편과 보편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가족이며 자기 직장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삶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대부분 아주 특정한 종류의 사람만을 만난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이 박사학위가진 사람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고 재벌급의 부자들 눈에는 누구나 외제차 몇대쯤은 굴리고 사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노숙자는 일단 쓰고서 빚을 갚는 것이지 통장에 미리 현금 몇백씩 넣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보편성의 추구이며 이역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내 눈에는 내 아내가 내 자동차와 내 집이 더 사랑스럽고 좋아보인다는 나의 편협성을 너무 억눌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당신의 삶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이런 말들은 미묘하고 하기 어렵다. 차라리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민족주의 만세를 부르거나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보편의 세계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쉽다. 아니면 개인주의적으로 자기만 강조하고 민족이고 보편이고 다 잊어버리라고 하던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중도적인 말은 비판하고 공격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바둥거리면서 균형을 이루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일은 본래 미묘하고 어렵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한 줄로 정리가 안된다. 사는 일은 보편과 국지성사이에서 혹은 나와 나 아닌 것사이에서 벌어지는 동적인 균형을 지키고 변형시켜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 우리의 관점을 사랑하고 우리가 그것에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보편성의 추구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극대화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꼭두각시가 된다. 다른 무엇보다 20세기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전쟁에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많이 봤다. 지금도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남의 이론에 매몰되고 자기 한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 그것은 책한권 읽고 세상 다 아는 것처럼 확신에 차는 위험이다.

 

물론 자기의 관점을 소중히 하는 것에는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나를 보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을 덜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무신경이 폭력이 되기는 쉽다. 특히 내가 매우 힘이 세서 마구 폭력을 휘두를 수 있을 때는 우리는 그 힘에 비례해서 더 많이 남을 봐야 한다. 즉 더 많은 보편성의 추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힘이 없을 때는 어차피 나의 폭력이란 현실적으로 별로 관철되지도 않는다. 이럴 때 더 위험한 일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남의 규칙, 남의 영향만 생각하다가 자기 삶이 없어지는 것이다.

 

한국도 이제 꽤 부자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도 그에 비례해서 비참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추구하는 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의 위치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다는 것도 현실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나치나 일제의 민족주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솔직히 문화적 경제적 파워에서 한국인이란 미국인이나 일본인 혹은 유럽인과 동등한 존재가 아직 못된다. 그리고 중국에게도 서서히 억압되고 있는 중이다.

 

조선은 타의에 의해 분단된 두개의 국가가 되었고 이 땅에는 지금도 외국의 군대가 주둔하여 있으며 사드배치나 미군범죄에 대한 불평등한 대접같은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국력의 허약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심지어 위안부문제만 해도 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이나 다른 나라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전시 작전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과 그 지지자들이 외국에게 제발 우리에게 전시작전권같은 거 돌려주지 말라고 애원도 하는 나라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간접자본과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물려받은 유럽과 달리 여러 차별과 갑질이 사회에 넘쳐나고 아직 공화국과 왕국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나라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없이 규칙만으로 우리가 정말 좋은 나라 만들 수 있을까? 한국은 여전히 허약하고 중심이 약한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보편만 외치는 지식인은 딱 조선말엽에 일본이 좋네 러시아가 좋네하고 외치던 사람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주요 문제는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자기가 없는 것이다.

 

보편이 나라를 지켜주는게 아니다. 한국에 대한 건강한 애정이 나라를 지켜준다. 그런데 보편론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런 애정을 광신으로 취급하기가 너무 쉽다. 나는 노무현의 지지자를 노빠라고 부르던 몇몇 사람들의 비아냥도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결백증은 대개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들은 타인의 부족함은 보면서 자신들이 이데올로기적 노예상태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싸움에 진 사람이 말싸움에 이긴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절대보편적 법칙이라고 보일 것이다. 논리가 아닌 것은 미신일 것이다. 데이터나 지식이 아닌 감정은 불필요해 보일 것이다. 이게 보편이라고 믿는 것도 편협이라는 것을 그들은 종종 모른다.

 

한국의 지식, 한국의 정신은 뿌리가 없거나 약하다. 유불도같은 과거의 정신체계를 인정하면서도 현대 과학까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어도 그들은 그다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거나 그다지 성공적인 조합에 이르지 못했다. 함석헌이나 김용옥같은 학자의 흐름은 약하며 그들도 한국의 뿌리를 굳건히 했다고 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이 한국의 지식과 정신에는 뿌리가 없거나 약하다는 말의 의미이며 이 말은 한국의 주류 지식인이란 결국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수긍하고 발전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과거 역사에만 매달려 보편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시대에 뒤진 일이다. 하지만 서구의 눈으로 우리를 보는 것은 마치 이웃집 남자나 여자의 눈으로 우리 가족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 가족이 좋은게 있겠는가 다 남보다 못하지.

 

허세는 꼴불견이다. 하지만 죽자고 보편외치며 민족주의 때려잡는일만으로 좋은 세상이 오는게 아니다. 한국인은 지금 상태에서 좀 찌질할 수 밖에 없다. 눈을 들고 나라 꼴을 한번 보라. 그나마 아직도 한국을 사랑하는 대중이 있기에 한국은 버티고 있다. 우리가 아직 제대로 자기를 세우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부끄럽고 불편하게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찌질해야 하는 것은 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다.

 

삶이란 어디에 비교하냐에 따라 결국 모두 찌질해지기 마련이다. 가난한 집의 사람이 우리 남편 라면 끓이는 솜씨가 최고라고 한다고 해서 그런 초라한 음식가지고 자랑하냐라던가 이런 라면정도가지고 최고라고 자랑하냐고 핀잔주는 사람은 삶의 찌질함을 외면하고 괜히 멋진 척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가 법도 모르고 도덕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이게 내 삶이다라고 자신있게 외치지 못하는 창백하고 결백증걸린 태도여서는 안된다. 그런 태도로는 좋은 나라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삶의 본질은 찌질함이다. 나와 나 아닌 것사이에서 계속 갈등하고 머뭇거리는 태도가 생명의 본질이며 그런 머뭇거림이 곧 찌질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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