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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정보의 농도와 인간의 한계

by 격암(강국진) 2019. 1. 2.

2019.12.

우리가 사는 방식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정보의 농도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문자가 없던 시절 정보의 농도는 매우 낮았다. 사람들은 그저 타고난 머리로 기억하는 만큼의 정보밖에는 가질 수 없었고 문자의 도움없이 발전한 원시적인 언어로 구술되어지는 이야기나 알았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생겨나도 옛 정보는 잊혀진다. 이런 시대에 교육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생에서 태어난 곰이나 늑대가 별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뇌가 가지는 한계를 기록이라는 신기술로 정보를 저장함으로써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보의 농도는 짙어지고 적어도 두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거대한 제국같은 큰 사회가 유지 가능해 진 것이다. 제국의 건설이란 도량형의 통일이나 중앙의 언어와 문화를 보급하는 일을 요구한다. 그것들이 소통과 신뢰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며 소통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금방 갈라져서 끝없이 계속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로 쓰여진 법률이나 서류의 기록없이 큰 사회는 유지불가능하다.

 

또 교육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권력은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물리적인 힘만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매우 작다. 왕의 권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모르는 비밀에 의존해야만 가능하다. 이때문에 왕의 비밀을 알던 내시들이 권력을 행사하던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은 정보를 다루는 것에 전문화된 관료층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출세하는데 있어서 교육이 중요해 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강력한 무력이 필요한 경우에도 장수가 무식하기만해서는 쓸모가 별로 없으며 출세도 할 수 없었다.

 

정보의 농도가 점점 짙어질 수록 인간은 더욱 더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현실을 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해온 자연환경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프로 야구선수를 생각해 보자. 프로 야구 선수는 프로 야구 리그가 없이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프로 야구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추상성의 한 극치다. 그것은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스포츠를 만든 것도 부족하여 그것을 광고하고 돈을 받는 프로 경기로 만들었고 그 안에서 유명 선수들은 돈과 명예를 얻는다. 프로리그란 한마디로 거대한 쇼비지니스가 만드는 판타지고 가상현실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찬란하고 단단해 보이는 프로선수들의 삶의 의미는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가 만들어지고 적응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인위적인 환경을 살아가게 되므로 후천적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즉 교육은 중요해 진다.

 

상거래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이득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추세는 대중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제대로 된 시민으로 여길 수가 없다는 것을 상식으로 만든다. 일찌기 닐 포스트만은 유년기의 실종이라는 책에서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생긴 이유가 이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이 읽고 쓰기를 배우는 학교교육이 보편화된 시대에는 아직 학교를 마치지 못해 제대로된 사람이 아니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이것이 바로 아이라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민권은 더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되면서도 아이에게는 제한된다는 관행이 생겼다. 포스트만에 따르면 이 시대 이전에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으며 예절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다시 한번 흘렀고 정보의 농도는 다시 한번 증가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보의 농도는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해 왔다. 즉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정보의 누적이 더 많은 정보의 증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이 보급된 초기에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 보자. 전에는 동네마다 있었던 타이어 가게가 서로 가격이 얼마나 틀린지를 사람들이 다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인터넷에 그런 정보가 누적되고 공개되어 모든 소비자가 어느 가게가 가장 싼 지 알게 되면 가게들은 하나의 승자만 남기고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가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상품을 다양화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가격비교가 어려워지도록 말이다. 이렇게 해서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일은 이제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이득을 남기는 복잡한 일이 되었다. 정보를 기록하는 일이 기록하고 분석해야 할 정보를 더 많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 다시 말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정보의 농도는 21세기의 교육을 한도 끝도 없이 긴 것으로 만들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제 단순히 쓰고 읽기를 배우는 것은 교육으로 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20년은 교육을 받는다. 오늘날 전체 한국인 학생의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그렇게 대학까지 나와도 취직이 안된다. 요즘 사람들은 글로벌하게 경쟁한다. 베트남과 중국과 인도에서 대졸생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단순한 대졸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대학뿐만 아니다. 세상에는 박사후연수자라던가 인턴, 레지던트 같은 연수과정이 새롭게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연수과정, 교육과정에 해당하는 점점 더 많은 계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통상 우리가 보통 박사라던가 의사라고 떠올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거쳐야 하는 교육 단계는 점차로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단계들에서는 대우와 수입이 제한되는 것이 보통이다.

 

교육이 점점 더 중요해져서 교육기간이 늘어나면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그걸 개인에게만 감당하라고 하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 사람들은 사회적 역할이 없는 영구적 실업자가 되기 쉽고 그래서는 사회적인 짐만 될 뿐이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교육은 권리이자 의무다.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는 무료로 교육을 시켜준다. 배우는 것은 의무다. 배우지 못하면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뿐만 아니다. 사람들은 그 긴 기간동안 먹고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전반적인 복지의 확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최소의 수입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계속 창업을 준비하고 계속 글을 쓰고 계속 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선진국은 대개 이미 이렇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장래가 없어지고 단순실업자나 범죄자나 병자로 통계에 잡힐 것이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로보트가 일을 하고 사람들은 직업없이도 돈을 벌게 될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곳이 천국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수준은 증가했지만 사람들이 끝도 없는 교육에 시달리는 시대를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이것이 훨씬 더 심해진다면 그것이 천국일까 지옥일까? 30살 50살 70살까지 대학입시며 취업준비같은 시험지옥에 빠져서 허덕이는 세상이 천국같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겨우 박사를 받는 정도를 가지고 끝없는 마라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보의 농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제까지의 변화는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수함수적 폭발을 기억하는가? 정보의 농도는 지금 이순간에도 이전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증가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걸 인공지능의 발달이니 4차산업혁명이니 빅데이터니 하고 부른다. 그것은 센서를 통해서 모아진 정보들이 저절로 분류되고 학습되어 처리되고 다시 그것이 더 많은 정보의 수집을 촉구하는 과정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시대다. 이제 우리는 20년 뒤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가상현실적이고 추상적일지 상상이 안된다. 그런 시대에 교육은 당연히 더 더 많이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적응해야만 한다.

 

잠깐, 그런데 우리가 정말 영원히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지수함수적으로 폭발하는 정보의 농도와는 달리 인간의 학습능력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몇십만년전에 만들어 진 그대로다. 21세기의 인간이 몇천년전의 공자나 부처, 플라톤을 우습게 하는 지적능력을 가졌을까? 여러가지 학습방법을 개발한다고 해도 인간의 적응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은 여전히 20대가 넘어가면 노화가 시작되고 50대 60대가 되면 학습능력이 떨어진다. 언제까지 공부만 할 수 없는 것이고 모두가 프로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두가 뛰어난 학습능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우리는 평생직장의 시대가 끝났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인간이 40대 60대에 새로운 일을 배우고 적응하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설사 할 수 있다고 한들 그게 정말 즐거운 삶일까? 4년을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10년이 되지 않아 그 지식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세상을 따라가는가.

 

이 문제는 적어도 19세기에 이미 심각해 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지식인은 전문화가 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식인이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두 공부하고 모든 분야의 책을 다 읽는 사람인 시대, 철학이니 과학이니 공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어떤 하나의 분야에만 전문화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전인교육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방대해 지자 이런 분별이 생겨나고 대학은 전문화의 길을 걷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설사 대학교수라고 해도 자기 전공분야의 좁은 지식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며 인생의 의미같은 전체적이고 폭넓은 배경을 요구하는 질문에는 아무 답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간다는 발상은 이제 거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런 대처도 21세기에 이르자 한계에 도달하는 것같다. 애초에 지수함수적으로 폭발하는 지식을그런 전문화로 대처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대학을 책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백과사전 한권에 모든 지식을 담으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책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두꺼워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체 백과사전을 다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구조가 매우 난잡해 진다.

 

오늘날의 사회적 변화는 너무나도 빨라서 대학에서 학과가 만들어 지는 속력이 사회적 변화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초등학생의 희망직업중 하나가 유튜버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유튜버를 키우는 학과가 있고 그 분야의 교수가 있는가? 따라서 대학교육은 점점 더 사회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대학은 이제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직업에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에도 비효율적이 되어가고 있다. 교수는 점차로 유튜브나 구글 검색과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천재적인 인공지능과 겨뤄야 할 것이다.

 

설사 경쟁할 수 있다고 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교육의 유효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극도로 전문화된 대학교수는 자기 전공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비싼 교육비와 사회적 비용에 걸맞는 가치를 대학이 가지는가에 대한 회의가 일게 된다. 우리는 대학을 정점으로 하고 초중고로 이어지는 교육 과정 전반을 다 다시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것이 해결될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학이 가지는 위기의 본질이다. 단순히 인구구조때문에 신입생이 없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표준화된 부속품같은 인간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 부속품이 어디에 쓰일지 알 수가 없다. 표준따위는 이제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 가는 인간이다. 우리는 본질주의적 인간이 아니라 유명론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물리학자니 엔지니어니 공무원이니 하는 이름이 규정하는 본질을 학습하고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 하고자 하는 목적을 되도록 구체적으로 세우고 그 목적이 요구하는 지식들을 학습하고 스스로 체계를 세워가야 한다. 그것은 자기 전공분야를 파고드는 전통적인 학자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상품을 만들고 세상을 개혁하려는 기업가나 사회운동가의 모습에 더 가깝다.

 

하지만 심지어 이것조차도 한계는 명백하다. 단지 몇십년정도만 다시 한번 지수함수적으로 정보의 농도가 증가하면 이 세상이 어떤 곳이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완전히 다 바뀔가능성이 아주 크다. 반세기전에 구글같은 회사가 이토록 돈을 벌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0년뒤는 어떨까? 겨우 20년뒤인데도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없다.

 

가능한 변화는 구글의 출현따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혁명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인공지능투자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 프로그램이 지구상의 어떤 인간보다도 더 뛰어나게 투자하여 엄청난 돈을 자동으로 벌어들인다고 해보자. 이것은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배한 것과 비견될만한 일이 아니다. 멋진 일인지도 알 수없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주식시장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으며 돈이 휴지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류와 투자게임을 벌여서 인류의 돈 모두를 다 딴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런 경제게임의 결과를 인정하고 인공지능이 지구상의 모든 돈을 다 가졌음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안하면 경제가 뭐가 되는가.

 

어느 경우건 점증하는 교육과 재교육의 필요성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 버릴 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미 자동화때문에 직장을 잃고 재취업을 위한 적응에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된다면 그리고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대개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노령층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된다면 정보 농도의 증가와 그에 따른 재교육의 문제는 정말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 된다. 모든 단순작업이 다 기계화된 시대에 60살 이상의 사람들이 40년을 더 산다고 해도 그 40년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새로운 직업이 나타난다고? 그걸 그 사람들이 배워서 할 수 있을까?

 

경제만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소한 것이다. 더 큰 것은 정치다. 앞으로 지독히 빠르게 추상적으로 변할 세상은 사람들을 정보와 교육에 앞선 보통 침팬지와 따라가기를 포기한 멍청한 침팬지들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보통 침팬지는 핵무기의 버튼을 눌러서 모두를 죽이려는 멍청한 침팬지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사실은 보통 침팬지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침팬지는 현명한 침팬지고 자신이 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침팬지는 더 문제다. 이들은 종종 극단주의 정치가나 파퓰리즘 정치가 혹은 운동가로 불리는데 이들이 힘을 얻어서 세상의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기 쉽다. 많은 정보에 근거하여 답을 내는 보통 침팬지의 답을 -그리고 물론 이 답도 틀리기는 매한가지다- 멍청한 침팬지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사회적 환경때문에 여전히 낮은 정보의 밀도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이 도통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자신이 이해가능한 답을 주장하며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주의 침팬지를 지지하는 것이다.

 

멍청한 침팬지들이 확신을 가지는 한가지 중대한 이유는 똑똑한 척 하는 계몽주의 침팬지들도 영 결과가 신통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논리를 많이 본다. 바로 네가 틀렸다는 것은 내가 맞았다는 증거라는 논리다. 네가 경제를 살릴 수 없다면 내가 살릴 수 있다. 네가 지금 사회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면 내가 말할 수 있다.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주목을 받는다. 따라서 화끈한 극단주의 침팬지, 파퓰리즘 침팬지가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게 된다. 물론 문제는 멍청한 침팬지는 전혀 겁이 없어서 극단적인 일을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국가를 순식간에 몰락시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국민들의 집단적 지적수준에 따라 여러 나라들이 자살하는 광경을 우리는 조만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런 일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지금 미래를 예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벌써 벌어진 일을 묘사하는 것일까? 전세계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얻는 것을 보고 있으면 후자같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은 일본 미국 중국 유럽 할 것없이 다 국가부채가 어마어마하다. 이것만 봐도 이쯤이면 불타오를 기름도 준비되었고 불장난을 할 사람도 준비되었는데 조만간 몽땅 불타오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세계가 베네수엘라처럼 되는 것이다.

 

아는게 힘이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익숙하다. 우리는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돈이고 권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보의 농도가 증가하는 속력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 부딪히는 시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얼마지나지 않아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무시한 변화를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건 그 세상에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이니 종의 자살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 그런 발전은 하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과감히 우리는 새로운 생명체로 우리를 바꿔야 할까? 우리의 학습능력을 증진시킬 사이보그화를 추구하던가하는 식으로 말이다. 답이 어느 쪽이 되건 그 세계는 이제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상상할수도 없을 만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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