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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철학의 목적과 한국

by 격암(강국진) 2019. 11. 12.

2019.11.12

철학자 버틀런트 러셀은 철학의 목적이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가르쳐 주는데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옳은 말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러셀같은 천재도 아니고 서양사람도 아니니 이 말에도 생각할 점들이 많이 있다. 무지에는 개인적 차원이 있고, 사회적 차원이 있다. 사회적 차원이라고 말했지만 그 사회라는 것이 한 가족 수준의 사회에서 지역 사회, 국가 나아가 거대 지역이나 인류까지 여러가지 수준의 사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사실은 무지의 의미는 아주 여러 층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무지 혹은 개인적인 차원의 철학이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개인으로서 답하려고 하는 노력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사회적인 차원이란 같은 질문들을 그 사회적인 관점에서 던지는 것이 된다.

 

구체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말해보자면 나를 철학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원인은 내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발견하는 불합리때문이었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나도 내 삶의 고비마다 혹은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면이 있지만 부모, 형제, 이웃, 친척들의 언행을 보고 있으면 과거의 나는 도무지 그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안에서 일관적이지 못한 면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또한 스스로의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도 찾기가 어려웠다. 인생이란 그저 맛있는거 많이 먹고 남에게 자랑하기 좋게 권세를 누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전부라는 식의 생각이 세상에 가득한 것같았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신적이고 관행적인 태도가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관념들로 채워진 일상속에서 코앞의 고민에만 빠져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을 사치이고 철없는 행동이라는 식으로 여기며 자신의 그런 태도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다. 사실 나는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을 본다. 다만 지금의 나는 이미 나이가 들고 내 가정을 꾸릴 정도로 세상에 나의 공간을 마련했기에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편할 뿐이다. 지금의 나는 나를 지키고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마치 눈 하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눈두개인 사람같았다. 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내가 정상인 것 같았는데 온갖 사람이 나를 바보취급하고 뒤흔드니 참으로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한때 아내에게 나는 평생 내 인생을 뒤흔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며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에게 휩쓸려 내 인생을 망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조언들을 나는 대부분 무시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이고 책에만 빠져 살았던 나를 지금의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훌룡한 모범생이었다고 할지 모르나 당시에는 과학자를 꿈꾸던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기보다는 너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잘난 척하던 사람들만 많았다. 남자는 좀 더 씩씩하고 대범하게 살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꿈이었던 물리학 공부따위 때려치우고 역시 서울대학생이 되는 게 최고라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조언도 나는 무시하고 포항공대로 진로를 선택했고, 정통물리학이라고 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물리학적 연구라는 주제에 관심을 보였을 때도 이런 건 물리학이 아니라며 무시하는 교수를 만났었다. 이런 선택은 계속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내 선택이 타인과 다르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큰 문제가 아니고 자연스럽다. 문제는 내 선택은 어떤 근거를 가졌으며 남의 선택들은 어떤가 하는 점이었는데 그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다. 부질없는 싸움과 모욕, 부질없는 에너지와 시간과 돈의 낭비는 세상에 얼마나 흔한가. 진흙탕을 뒹굴 때 자연히 목욕을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처럼 나는 세상의 혼돈속에서 철학적 고민이란 주제를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걸 잊는 흔한 방법이 있다. 예술이든 과학이든 승진이든 돈벌기이든 뭔가 하나를 정하고 그것에 매진하여 세상을 잊는 것이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방법을 썼다. 하지만 나에게는 부모형제가 있고 조국이 있다. 게다가 학계라는 세상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학문으로만 이뤄진 세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현실이 끊임없이 합리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에게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 고민이 나에게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우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확장하고 정돈하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것들이 앞뒤가 들어맞는지, 또 유한한 나는 결국 어딘가에는 선을 긋고 이것은 당연하며 이 이상은 보지 않는다라는 무지의 벽들을 세우기 마련인데 일단 그 무지의 벽들이 어디에 서있는지에 대해 자기를 들여다 보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앞에서 말한 사회적 차원에서 철학하기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회적 집단이 그 나름의 합리적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철학하기의 목적이며 그를 위해 내부를 정돈하고 자신의 한계를 탐색하는 것이 사회적 수준의 철학하기이다.

 

철학하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은 내가 서있는 자리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세상은 아주 크고 나는 아주 유한하다. 그래서 도서관같은 곳의 어딘가에 정답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읽어봐야 그 안에서 길이나 잃기 쉽상이다. 예를 들어 철학사를 공부하거나 칸트의 철학이나 불경을 읽어보는 것이 언제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 무의미할 때가 많다. 그건 마치 지금 당장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요리학원에 등록하는 것과 같다. 수없이 많고 난해한 말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그것들이 우리 삶의 결정에 별 도움은 안주고 혼돈만 준다. 그러니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감만 들게 된다.

 

철학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이면서도 전문화가 되고 나면 죽은 것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물리학을 보자. 누군가가 물리학의 모든 분야를 깊게 공부해 보겠다고 한다면 그가 설혹 천재라고 해도 정말 바쁠 것이며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 있는지도 나는 모른다. 나는 그런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을 잘라서 어느 하나만 배우고 거기에 매몰되면 문제가 많다. 제 아무리 거창한 이름을 붙여도 결국 철학이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니 하나의 철학에 매몰되어 예를 들어 평생 칸트나 니체를 연구한다고 할 때 우리는 결국 칸트나 니체의 체험과 삶에 갇히는 것이 된다. 외국이나 몇백년전의 삶에 말이다. 그렇다고 두루 본다고 한다면 수박겉핧기가 된다. 철학은 이래서 어렵다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아주 고마운 세가지는 바로 과학 그 자체이고 독서였으며 그리고 글쓰기였다. 과학이란 내 삶이었다. 나는 석박사 과정을 물리학으로 했고 연구원 생활을 오래했다. 그런 삶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논리같은 책을 다르게 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내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을 골라서 다시 한번 내 삶의 경험에 근거해서 그 책들을 읽은 셈이다. 만약 나에게 있어서 과학자라는 특수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체험과 독서라는 보편에 대한 간접체험이 없었다면 나의 시야는 훨씬 더 좁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가 있었더라도 내가 꾸준히 글을 쓰면서 그것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얻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다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 졌는가? 적어도 전보다는 훨씬 편해졌고 나 스스로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에 대해, 내가 내렸던 판단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운이 좋고 괜찮은 삶을 살았으며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철학에 대해 고민해서 얻은 보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지는 않지만 작다면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세상에 혼자 살지 않는다. 세상이 불행하면, 예를 들어 내 아내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의 무지뿐만이 아니다. 내 가족의 무지가 있고 내 사회의 무지가 있다. 이것의 크기와 문제점은 아무리 길게 이야기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이니 한가지를 지적해 보자. 다시 특수성의 문제다.

 

설혹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두루 읽고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양의 철학책을 읽다보면 고대 그리스 이야기와 기독교 이야기 그리고 17세기 과학혁명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가 그랬기 때문이다. 즉 철학책이란 제 아무리 보편을 천명해도 시공을 초월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고민과 혼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세의 스콜라철학같은 것이 수학적 발전을 만나 근대의 정신으로 전환되면서 심신이원론같은 문제를 만들어 냈고 어떻게 근대의 정신은 낭만주의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다시 근대의 정신은 어떻게 20세기에 해체되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사고가 되었는가하는 식의 이야기는 다 따지고 보면 보편이 아니라 서구의 특수한 역사에 대한 것이다. 역사가 중세에서 근대로 다시 현대로 흐른다는 식의 역사 발전론도 유럽사람들이 자신의 역사가 그러했으며 자신은 가장 발전한 문명이라는 관점을 강요하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역사발전단계가 뒤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철학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좋은 말들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문득 이것이 과연 한반도나 한국 사회의 불합리성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남의 암투병기를 읽으면서 내 폐렴을 고치려고 하는 식은 아닌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려시대나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 정신의 역사를 쓰려고 한다. 그것들은 당연히 의미있는 작업이지만 사실 그다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나름의 문제도 있다. 나는 차라리 경제발전이 우리 철학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가 한국 사회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 그때는 우리 자신에 대해 나름의 역사를 쓰고 분석하는 것이 귀에 들어올 것이지만 그 전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80년대같은 옛날에는 그저 잘나가는 유럽이 좋아만 보여서 남의 것을 배우고 우리 것에 대해서는 자학하는 태도만을 가지기 쉬웠다. 요즘은 한국이 풍요롭다. 전보다 그럴뿐 아니라 외국과 비교해도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한국인은 성격이 다혈질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한국인은 정의감이 높다고 말하고 예전에는 한국인은 조급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한국인이 진취적이라고 말한다. 좋고 나쁜 것은 어찌될지 모른다. 자신감이 없을 때는 남에게 휘둘리기만 한다.

 

이미 세계가 동서양이 하나되어 복잡하게 역사가 섞여버렸는데 여기서 다시 한국인의 정신역사를 쓰려고 하는 식의 노력은 어렵고 결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무슨 원효의 정신이 흘러 흘러 이렇게 되었고, 조선시대의 주자학정신이 한국의 정신상태를 잘 보여준다는 식의 생각은 무의미하지 않지만 한계도 크다. 왜냐면 세상에는 이미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던질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먼저 요즘같은 세상에는 그 답이 무엇이건 그 한계도 크고 위험하다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단순화가 문제를 해결하는 이상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오늘날에는 개인의 철학하기에서 시작해서 광장에서 만나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고등학교 교과서처럼 어떤 정론을 모든 국민이 읽고 아 삶이란, 철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가르칠 방법은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어떤 철학을 소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자유주의 철학에 답이 있다는 둥하는 식의 사고 자체가 시대에 뒤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고 하는 자는 결국 금방 독재의 위험에 빠져든다. 즉 답을 아는 리더나 철학자가 온 사회에게 이래라 저래라 왜 너는 뭘 못하냐고 설교하는 독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이 철학하는 길 위에 선 친구로서의 대화가 아니라 강요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몇명으로 이뤄진 작은 집단속에서 긴밀한 개인적 접촉을 가지고 거기서 리더쉽을 발휘한다면 몰라도 거대한 사회를 오늘날 그런 식으로 사상 독재하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세상은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선 모든 개인이 더 가치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고민하는 것이다. 서로 서로 고민하기를 격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답에 대해 너무 빨리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서 자신의 무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은 실천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철학하기에 있어서 격조높은 고전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이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도움되는 것은 아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우선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 그 치열함이 우리를 뭔가의 전문가가 되게 해준다. 적어도 세상의 한 귀퉁이라도 대충대충보는게 아니라 세세하게 보게 만들어 준다. 시작은 언제나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리고 나면 독서고 대화다. 그런 간접체험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수준에서 보편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고 직접 경험한 세계와 남의 이야기속에 있는 보편을 비교하면서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글쓰기나 사색이다. 나의 삶이라는 특수성과 간접경험 속의 보편성이 연결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여러번 되새김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백권읽은게 한권의 책을 백번 읽은 것보다 반드시 좋은게 아니다. 같은 책도 여러번 읽어야 하고 스스로 작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어 자기 철학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남의 이야기도 좀 더 이해가 잘 된다.

 

그런 개인적 철학하기의 끝에 있는 광장에서 우리 개인들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폭이 넓은 만큼 서로가 달라도 우리는 기분좋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 바로 내가 그토록 보기를 원하는 합리성을 가진 사회라고 지금의 나는 믿는다. 나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첫번째 독자다. 하지만 세상에 쓰는 편지이기도 하다. 세상이 불행하면 나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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