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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내 평생의 공부

by 격암(강국진) 2021. 2. 5.

2021.2.5

내게는 일생의 질문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합리적 판단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많은 글을 썼고 공부를 했다. 내가 물리학을 전공하고 인공지능과 뇌과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도 알고 보면 이런 질문을 파고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는 불합리한게 싫었다. 왜 이 세상에는 불합리해 보이는 일이 이렇게 넘쳐나는지 알고 싶었다.

 

자연히 내가 파고든 주제나 내가 자주 쓰는 단어도 이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주로 합리성이다. 나는 철학자에 대한 지식을 암기하는 일을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를 위한 사고방식이나 사고의 구조를 철학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큼 서로 다른 것이다. 나는 지식을 외우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합리적 인간, 지혜로운 인간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나는 어디쯤에 서있는 것일까? 일생의 공부속에서 나는 합리적 판단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불합리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가. 얼마되지 않는 나의 공부도 몇줄의 글로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왜 그럴 수 없는가하는 것은 이 글의 핵심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에는 문득 나는 내 공부의 대부분을 몇줄의 글로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순적인 말이 이 글을 다 읽을 때쯤에는 합리적으로 들릴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그 몇줄의 글이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관계'로 파악해야 하는 것을 시공적으로 고립된 어딘가에 존재하는 '물질'로 파악한다. 가치, 지능, 의미, 합리성같은 것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오류를 흔히 범하는 예들이다. 이때문에 우리는 불합리한 행동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잘못놓여진 구체성의 오류같은 지적과 관련이 있어보이지만 내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세상에서 그리 잘 논의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는 아주 많지만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이 점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지능은 인간이 소유한다고 믿듯이 인공지능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기계가 가지는 지능이라는 식으로만 파악되고 있다. 그건 인공지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오해를 만든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약간 무겁게 들리는 이 이야기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만은 아니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모짜르트가 살았던 집이나 사용했던 의자는 의미와 가치를 가지지만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물질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모짜르트의 숨결이나 손때가 묻었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될 것이며 애초에 모짜르트라는 인간의 몸이 가진 물질도 그가 먹고 마신 주변의 물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물질은 순환한다. 아주 작기는 하겠지만 지금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중에도 한때 모짜르트의 몸을 이루고 있던 물질이 있을 것이다. 모짜르트의 의자가 가지는 의미는 그것이 살아온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역사란 결국 한줄기 사건의 배열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 졌을 의자가 하필이면 모짜르트라는 사람이 사는 집에 들어가게 되는 그 사건이 생기고 모짜르트는 널려 알려진 사람이 된다. 이 이야기가 그 의자를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만든다. 

 

뭔가가 가진 시장적 가치는 대부분 그것이 놓여진 문맥에 의해 결정되는데 우리는 이걸 효용가치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한 병의 물은 아주 큰 가치가 있다. 하지만 같은 물이라고 해도 마실 물이 넘쳐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큰 가치가 없다. 효용가치설은 누군가가 일년내내 노동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도 때로는 가치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반면에 BTS같은 유명가수가 한번 입었다 벗은 옷의 가치가 몇억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의 경매행사에서 BTS가 다이나마이트 뮤직비디오에서 썼던 옷이 1억 8천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의미와 가치가 사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모짜르트의 의자가 가진 의미는 그 의자가 소유하는 것이다와 같은 문장을 우리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잘못 이해된다. 텅빈 우주에서 그 의자가 홀로 있을 때에도 그 의자에게 의미가 있는게 아니다. 의미나 가치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대상이 되는 시공간적 환경을 제거해 버리고 나면 거기서 우리는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어머니라는 사건없이 아들이라는 사건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치나 의미를 어떤 특정한 물건이나 사람이 고립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일찌기 뉴튼은 뉴튼역학을 만들면서 고립계를 도입했는데 그건 이런 식이다. 이 우주에 아무 것도 없어도 홀로 존재하는 하나의 입자가 있다고 하자. 이 입자는 그래도 여전히 질량이라는 것을 가진다. 그리고 그 입자는 움직이던 방향대로 그 속도대로 계속 움직인다. 이것이 뉴튼의 제1 운동법칙인 관성의 법칙이다. 이 우주에 아무것도 없어도 어떤 입자는 홀로 존재할 수 있고 질량같은 성질도 여전히 가진다. 이것이야 말로 이 입자는 이러저러한 질량을 가진다같은 말의 의미다. 

 

우리의 사고는 이런 물리학적인 존재론에 깊게 영향받고 있어서 환경없이도 뭔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당연시 한다. 우리는 고립계적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미녀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소유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탁월한 지능을 가졌다. 이런 문장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이 아니면 많은 것을 시공간적으로 여기, 지금 존재하는 어떤 것이 소유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에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건 실수다. 예를 들어 미인의 아름다움은 그걸 보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고릴라나 개미는 미녀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미녀가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중요한 예중에는 바로 생명이 있다. 생명을 여기 지금 있는 이 물질이 가진 성질로 파악하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자기 몸뚱아리와 동일시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다. 생명이란 바다위의 파도와 같은 사건이고 엄밀히 말하면 안과 바깥의 경계가 없다. 관계를 무시하고 생명을 파악하면 살아있는 사람과 시체를 동일시 하게 된다. 이 오해는 깊게 생각하면 윤리적이고 가치적인 의미가 아주 크지만 그걸 길게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일단 가치와 의미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납득하고 나면 이제 우리는 지능이나 합리성과같은 단어로 이 점들을 쉽게 확대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가 지능적이라던가 합리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누군가가 가치 있고 의미있는 행동이나 선택을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능도 고립적으로 파악한다. 마치 내가 내 가방을 가진 것처럼 나는 내 지능을 소유하고 아인쉬타인은 아인쉬타인의 지능을 소유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들은 틀리지 않다. 다만 절대적으로 옳지 않을 뿐이다. 이 말들도 적절한 문맥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자동차 엔진의 기능은 엔진이 소유한 것일까 아닐까? 어느 쪽으로 말하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세상에 자동차 부품이 하나도 없는데 엔진의 기능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아무 소용도 의미도 가치도 없는 기능도 기능인가? 자동차 안에서 엔진의 자리에 존재하기 때문에 엔진은 엔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인쉬타인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부족에서 태어났다고 할 때 그는 천재로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까? 아인쉬타인의 뇌를 꺼내 기계속에서 살게 한다고 해도 아인쉬타인의 뇌는 천재적으로 활동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마치 축구나 격투기 선수로 우수한 사람이 과학자로도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지능이란 사회적인 것이다. 인간의 DNA 자체가 홀로 가진 지능이란 엄격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빈 우주공간에서 DNA는 그저 고분자일 뿐이다. 그 분자조각이 자궁과 같은 적절한 조건을 만나면 인간으로 변한다. 사실 이 인간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인간과는 다르다. 천연의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천연의 인간은 탄생한 후에 문화적 지식을 흡수해서 우리가 말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된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후천적으로 언어를 습득하여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이런 의미에서 사이보그다. 즉 적절한 DNA가 적절한 환경들을 만나고 만난 끝에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는 과학자인 아인쉬타인이 된 것이다. 엔진이 자동차의 적절한 자리에 있을 때 의미를 가지고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공지능 역시 사회적인 것이다. 그 기계도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순간에 놓여질 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점을 잊으면 마치 한글을 발명해 놓고 그 한글에게 '니가 그렇게 똑똑하다며? 너 혼자 나를 울리는 소설 한편 써봐!'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의 진짜 잠재력은 문자가 그러했듯이 그것이 인간과 융합됨으로서 발휘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미래 사회가 와도 여전히 인간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면서 언제 그 대단하다는 슈퍼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발명되는거냐며 불만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문명속의 인간을 생각해 보라. 인간의 이성이란 문자로 누적시킨 지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 지식들로 만들어진 지성을 가지고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살면서 우리는 지능을 인간이 홀로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능의 대부분은 문자와 사회시스템이 가지는 것이다. 미래에도 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다. 세상이 불합리한 것은 관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위치에 잘못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쓸 수 있는데 왜 나는 내 평생의 공부를 몇줄로 쓸 수 없다고 할까. 왜냐면 비록 여기서 몇줄에 몇줄을 더해서 내가 쓴 몇줄의 요약에 의미를 더해주기는 했지만 그것이 진짜 의미를 가지게 되기 위해서는 역시 그것은 제대로 된 문맥속에서 읽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철학을 하지 않는 닭이라던가, 철학을 하는 기계 혹은 불확실성의 산책같은 소설이나 연작 에세이들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이것보다 물론 훨씬 길고 얼핏보면 이 글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문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이나 요약이 아니고 그 문맥이 결국 핵심이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는 것을 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요약해서 두 남녀가 좋아하다가 죽은 이야기라고 한다고 하자.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제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은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말한 고립계의 관점에 빠진 사람들은 많은 메세지와 이야기들은 여전히 그렇게 파악한다. '고립계의 관점이 아니라 관계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구? 아하 뭔지 알겠어.' 하는 식으로 결론과 요약을 알면 자신이 그걸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 정도의 힌트만 가지고도 나보다 더 대단한 생각을 해낼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내 말에서 새로운 공부의 방향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 공부가 아무리 초라하다고 해도 몇줄의 글이 내 공부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내 평생의 공부는 몇줄의 글로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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