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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선악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23. 3. 2.

23.3.2

선악의 구별은 애매하다. 누구도 어떤 행동도 완전히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없다. 그걸 나누는 기준이 주관적인 것은 둘째치고 설사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나 시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제한된 영역을 보면서 그걸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를 들어 금전적으로 이득이냐 손해냐라는 기준으로 판단을 한다고 해도 그 판단은 기계적으로 나올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이 한참 시간이 지나도 좋은 행동이 되는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 볼 때도 좋은 행동인지 우리는 신경쓰지 않거나 알 수가 없다. 

 

이는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침팬지가 그러한 것처럼 사람도 유한하며 사람은 기껏해야 몇십명 몇백명 정도를 보고 신경쓰며 살 수 있는 동물로 태어난다. 태어난 이후 교육이 우리를 바꾸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수천만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속에서의 선악이나 정의를 이야기하며 살고 있다. 선악같은 개념은 보편적인데 현실의 유한한 인간이 가지는 시야는 이렇게 한정적이라는 것은 문제를 만든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아는 아이가 모르는 수학문제가 있어서 그걸 가르쳐 줬다고 하자. 당신은 심지어 댓가도 받지 않았고 이건 그저 그 아이에 대한 좋은 뜻에서 나온 도움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형평성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선한 행동이라고만은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그 아이처럼 운이 좋지 않아서 당신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군가는 아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힘들게 공부하는데 누군가는 그저 아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이 된다. 사방에서 호의가 쏟아진다. 그래서 재벌집이나 권력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혹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기 쉽다. 결혼식을 했는데 축하금이 몇십억이 들어오고 그걸 아는 사람에게 맡겨두기만 했는데 한두해 만에 그게 저절로 몇백억으로 불어나는 일이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 살다보면 때때로 있는 일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굶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처럼 약간만 노력해도 그런 결과는 없을텐데 말이다. 

 

선악이나 정의란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 보편성이다. 하지만 완벽히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것이 없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 우리는 오히려 그런 보편성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타고나지 못한 굉장히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관념들을 배우고 각인 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니 선악이니 하는 개념들이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 내 직장, 내 친구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쉽게 뭐가 문제인지도 느끼지 못하고 악을 저지르게 되며 사회적으로 선과 정의는 망가지고 만다. 

 

사실 그 사회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충분히 보편적인 관념을 습득하고 고민하지 못할 때 오히려 그 사회의 거대함은 악이 만들어지기 쉬운 조건이 된다.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자전거대신 비행기를 조종하게 된다면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죽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대한 시스템, 거대한 사회속에서는 나의 한마디의 말이나 내가 찍어준 한 개의 도장이 누구의 피눈물을 의미하는지 더욱 알기 어렵다.

 

나는 중학교 때 내 옆에 앉아서 공부했던 아이를 기억한다. 그 아이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서 손이 다 터져서 좋지 못한 모습이었고 옷도 남루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언행도 기가 죽은 모습이었던 것같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 별로 친하게 지내질 못했다. 내가 딱히 그 친구를 괴롭히거나 따돌린 것은 없었지만 별로 관심없는 친구였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악행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면 조금은 더 사려깊을 수도 있었을 것같은데 당시에는 그냥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였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를 나는 처음부터 포기했다. 이건 불공평한 일이고 생각보다 나쁜 일인데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평생에 한번이라도 선입견때문에 따돌림받아 본 적이 있다면 그걸 알 것이다.

 

이런 사소해 보이고 살면서 자주 일어나는 일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악의 대부분은 결국 아는 사람 몇몇이서 서로 친하다며 뒤를 봐주다가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는 친한데 누구는 안 친하다는 이유로 언행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사법부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 판결이 나오면 사람들이 판검사가 피해자가 자식이거나 배우자라면 저렇게 판결내리겠냐면서 욕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자식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내 자식이 아니라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한국 막장드라마의 대표적 내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작가들도 아는 것이다. 그런 행동들이 어떻게 우리를 조금씩 거대한 악으로 변하게 하고 모두를 지옥에 빠뜨리는지를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선악의 기준이 뭔지를 고민하는 것자체가 나에게는 굉장한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게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것같은데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다시 말해 세상에 악이 많아 보였다. 게다가 살다보면 나는 굉장히 불공평한 일을 당하는 것같은 기분이 드는데 세상이 옳다면 그건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왜 잘못되었을까. 나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나는 이런 질문들속에서 방황했다. 그것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유년시절의 방황도 결국 내가 선악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여러가지 사회관계속에서 일어나는 불평등들이 나를 혼동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듯이 지금와 돌아보면 나는 불공평한 일을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분명 나도 그런 일을 많이 저질렀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런 건 어쩔 수 없다며 말하고 살고 있다. 앞에서 막장드라마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이래서 사는게 피곤하고 때로는 심지어 절망스럽기도 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때 추진하고 박근혜 정권에서 임명한 국방부장관이 밀어부친 사드 배치 문제가 있었다. 이것때문에 중국과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사드 배치가 정당한가 아닌가는 이 글의 문맥에서는 둘째문제다. 당시에 사드가 설치된 지역인 상주군에서는 항의가 격렬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당시 보수당이었던 한나라당을 비판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여전히 민주당을 비판한다. 그 항의 단체의 장은 한나라당에 입당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만약 사드가 전라도에 설치되면 상주사람들은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 취급했을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 집앞이면 안되고, 안되도 욕하는 상대는 엉뚱하며 남의 일이면 태도가 반대가 된다. 이러면 사회적 정의를 논하는 일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런 문제에 대한 1차적인 답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관용을 가지고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좁은 시야때문에 개인적인 정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흑백으로 선악을 나눠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정의따위는 없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들이라 계속 따지면 다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악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론자의 선악 논의는 결국 선악 구분을 아예 없어지게 만든다. 결국 살인도 죄가 아닌 세상을 만들 뿐이다. 작은 죄나 중범죄나 모두 그저 죄라면 유한한 모두가 죄인 일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죄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큰 죄와 작은 죄를 구분하고 작은 죄는 경고 하고 소통 해야 하지만 또 용서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악을 찾고 벌하는 것에 너무 매달리면 세상은 앞으로 가는게 아니라 뒤로 간다. 예를 들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여보자는 주장이 거꾸로 여성이 힘들게 사는 세상을 계속 유지하는데 기여 할 수도 있다. 모든 여성이 약자이고 모든 여성이 무죄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천원에 해고된 사람은 있는데 50억을 받아도 무죄인 세상, 여자를 쳐다보거나 살짝 건드려서 추행범이 된 사람이 강간범보다 처벌을 많이 받는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 진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내일의 선은 더 밝게 빛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완벽하지 않으니 이건 선이 아니라고만 하면 세상은 오히려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하지만 관용만으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다. 우리는 선악의 문제의 핵심이 결국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을 사람들의 머리에 심는 교육과 인간의 유한성에 있다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서양에서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이라고 말해지고 동양에서는 도의 추구라는 형식으로 논의되어진다. 선악은 사상과 문화의 문제다. 교육이 실패한 세상에서 악이 탄생하는 것은 말하자면 교통법을 사람들이 모르는데 운전을 하는 상황과 같다. 교통체증과 사고가 사방에서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운전에는 교통법의 이해가 필요하지만 삶과 선악을 위해서는 우리는 교통법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가치와 법이 필요하다.  무엇이 중요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사회속에서 산다는 것을 게임이라고 할 때 그 게임의 법칙을 구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모두는 평등하다는 규칙이 그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고 인간답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그런 것이다. 내 자식만 인간이고 남의 자식은 인간이 아닌게 아니다. 

 

그래서 고금의 성인들과 현인들은 이런 저런 종교를 창시하고 책도 쓰시고 세상에 도를 설파하시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들은 세상에서 지옥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을 없앨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그 방법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문맹이고 소식은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퍼지는 시대에 세상을 이롭게 할 방법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전부가 아니라면 대부분 성인들의 말씀은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는 형식을 취한다. 우리는 세상에 짐승으로 태어난다. 그 짐승에게 어떤 관념이 주입되어야 사회적으로 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진정한 인간이라고 부르면 우리는 그걸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인류역사상 80억이 지구에 살았던 적도 없었고 그들이 이렇게 강하게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신경쓰며 살았던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 엄청나게 다양하게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같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 필요하다. 게다가 그것이 교육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종교나 지금의 어떤 윤리 체계로 충분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기독교의 이상이나 서양의 윤리면 충분하다고 믿을 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득도한 상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80억의 사람들이 모두 득도하는 세상이 올까? 그것이 지금이대로 가능할까? 득도라는 말을 써서 불교적인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내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이다. 권장도서 100권을 읽는다고 선악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100권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세상이 오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딱딱한 주제에 대해 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도 요즘 세상에는 귀하고 대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몇줄짜리 글 읽는 것도 힘들어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그걸 고민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은 그 부분을 소홀히 한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사회적인 토론이 벌어지는 모습이 굉장히 유치하고 수준이 낮다. 세상은 발전하는 것같지만 사람들은 더 단순해지고 다시 짐승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세상에 활개를 친다. 고민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아니라 어떤 획기적인 방법으로 로또당첨 같은게 되기를 기대하는 모습뿐이다. 이래서는 아무 일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이 거대한 사회를 지탱할 수 없어지면 이 사회는 원숭이만 태운 점보기처럼 되어 모두를 죽일 마지막 추락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두가지 방향에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선도적 문화 집단이다. 전자레인지를 만드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만약 선악의 문제의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선도적 문화집단이 있어서 그들이 지구상에서 크게 인기를 끈다면 인류는 좀 더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분야에서 한국사회가 아무쪼록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하나는 인공지능이다. 한계를 가진 인간은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과 긴밀하게 협력해서 살아야 이 복잡한 세상에서 질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같은 기술이 핵무기처럼 오히려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은 옳지만 나는 그것을 교통법같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맞다. 인공지능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가 믿을 수 있는 인공지능기술에 의존하게 될 때 그것은 가짜뉴스를 걸러내는 데에도 사용될 것이다. 즉 핵심적이고 중앙적인 인공지능이 엄청나게 복잡할 미래사회를 지탱할 기본적인 인프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무시하게만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기술없이는 인간사회가 크게 망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실패해도 미래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 만약 그렇다면 인류와 선악의 미래는 아주 어두워 진다고 느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로마제국의 붕괴과정같은 문명 붕괴의 미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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