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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무분류 임시

폭력과 이성

by 격암(강국진) 2016. 12. 29.

2016.12.29

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여러가지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도 없이 성취된 것를 이성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이성은 언제나 우리의 적극적 노력과 행동 그리고 현재의 우리의 상황에 대한 의식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때문에 이성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기 보다는 필요에 대한 응답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가 뭔가를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질문이 있고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우리의 배가 부르고 언제나 맛있는 것을 먹는다면 우리는 음식의 맛따위는 알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등장하는 것중의 하나가 이성이다.

 

고민의 해결은 반드시 이성만은 아니다. 나는 때로 이성은 폭력의 실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폭력은 우리의 문제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해결책으로서 적어도 대개의 경우 이성이 발동하기전에 사용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 거기에 이성이 등장할 기회는 별로 없다. 마치 우리의 심장이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에 달린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폭력의 성공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폭력적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폭력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왜냐면 폭력이란 나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경우 그것은 타인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행하는 폭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적인 폭력은 자기 마취적인 면을 가지게 된다. 즉 우리는 그것이 폭력이라고 인식도 하지 못한다.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돈을 갈취하는 깡패의 경우 그 폭력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변명이 필요하다. 그는 남의 돈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있을 지 모른다. 혹은 다른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혹은 그의 착취는 그리 대단한 것이 되지 못하여 당하는 사람에게 그다지 피해가 가지않고 있으며 혹은 자신은 장난을 치고 있다거나 사교를 위한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반에서 일어났었던 괴롭힘을 피해자쪽에서는 폭력으로 기억하지만 가해자 쪽에서는 우정으로 기억하는 경우나 사치스럽고 게으른 경영자가 자신을 노동자들에 대한 은인으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듣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공한 폭력의 예들일 것이다. 폭력이 성공했다는 것이란 그 깡패가 자신의 변명들을 스스로도 완벽하게 믿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 혹은 심지어 자신이 남들에게 좋은 일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의 생각을 통해 우리는 인식의 문제가 폭력의 핵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폭력을 행사하면서 살고 있더라도 우리가 전혀 그런 행위를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의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적 이성은 오직 우리가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만 작동하기 시작한다.

 

폭력이란 결코 우리가 흔히 폭력배나 깡패로 말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은 폭력을 행하고 있다. 다만 인식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혹은 둔감한 사람들이 더 많은 폭력을 행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이 모든 사람의 행위가 되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가진 존재이므로 결코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뭔가를 못본다. 우리가 뭔가를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개미들을 밟아죽이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폭력을 행하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무지와 둔감에도 수준차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둔감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는 예민한 사람은 세상의 폭력을 느끼는 반면, 둔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폭력, 세상의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우리에게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해 보이는 한가지 이유다. 둔감한 사람들로서는 그저 별다를 것이 없는 일상으로 보이는 것이 더 많은 기억력과 더 많은 이해력, 더 많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살인에서 사기, 모욕, 추행따위가 가득 채워진 세상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들이 죽은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우연한 일로서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저지른 살인으로 보이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의 문제는 당연히 1차원적이지 않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있을 때 한 사람이 더 많이 인식하고 한 사람은 덜 인식하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고 한 쪽사람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인식하는 한가지 양식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다른 종류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질적인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과 인식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둔감과 예민이라는 단어는 제한적인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시각장애인과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을 볼 때 시각장애인에 비해 분명히 정상인은 시각적 인식에 있어서 더 많은 인식능력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더 많은 편견과 무지에 빠져있는가 하는 것은 당연히 시각장애로 판정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각장애인보다 더 많이 눈멀어있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흔히 본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향해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한다.

 

한 여성이 패션에 관심이 많다면 그렇지 못한 그녀의 남자친구나 남편이 그녀가 옷이나 가방에 집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폭력적이라고 느끼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옷이나 가방에 집착하는 행위를 사치나 허영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기준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패션에 관심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미국이나 한국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훨씬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입고다니는 옷을 입고 다니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멍난 양말이나 냄새나는 옷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허영과 허영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예술적, 자기 표현적 행위가 다 사치고 허영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은 삶의 기본적 조건이 된다. 즉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폭력은 단지 감수성이 좋은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몇몇 둔감하고 현재의 권력에 무조건 순응하는 사람들이 말하듯 모두가 그저 좋은게 좋은 것이고 둥글둥글해 진다고 해서 세상의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이것은 각자 다른 입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발견하며 따라서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쉽다. 나의 마음을 모르는 세상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나에게 늘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나는 세상에 비해 작은 존재이므로 무의식중에 발동되는 나의 폭력이 이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에게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일관성을 세상에게 주문한다. 일관성이란 세상에 어떤 법칙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 친구가 인사를 잘해서 칭찬을 받았다면 나도 인사를 잘했을 때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제 100킬로그램이었던 추가 오늘도 100킬로그램이어야 하고 여기서 100킬로그램인 추는 옆동네에 가서도 100킬로그램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 세상에 일관성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행위도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축구를 하는데 공을 들고 뛰면 안되는 것은 축구라는 게임에는 골키퍼 이외에는 공을 발로만 차야 한다는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허용되는 게임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불법적 행위, 비윤리적 행위, 비신사적 행위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지고 따라서 그것은 게임이 아니다.

 

일관성의 부재, 법칙과 질서의 부재는 따라서 가능한 생존 수단은 오직 폭력이외에는 있을 수없다는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의 폭력이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좌절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성에 의존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법칙의 존재, 일관성의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다. 그런 것이 정말 없다면 우리는 흔히 말하는 대로 짐승으로 살 수밖에는 없다.

 

이렇게 주장되고 믿어지는 일관성들중 가장 중요한 예는 아마도 대칭성의 법칙일 것이다. 그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가 대칭적이라는 것 즉 인간은 모두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이 평등이나 대칭에도 많은 예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왜 우리가 인간평등에서 멈춰야 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생명들과는 평등하지 않은가하는 것도 당연한 답을 가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완전 평등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정도의 대칭을 기대하는데 만약 모든 것이 비대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거기에는 법칙이랄 것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 우리가 이성을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이성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말하는 것이고 좀 약하게 표현하고자 한다고 해도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성이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과 공존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다. 세상안에서의 일관성의 탐구란 이런 방법을 찾으려는 연약한 우리의 노력이다. 그러므로 이성이란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유한함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절대적 진리나 이성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생각은 오히려 폭력의 시작을 의미할 수있다. 절대적 이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믿거나 그게 아니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절대가 아니므로 무의미하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해 낸 삶의 방식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그것을 비판해야 하겠지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란 유한한 우리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거기에 도달하려는 노력만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삶을 위해 문제를 풀기보다는 문제를 풀기 위해 삶을 희생해 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될 수 있다. 행여나 우리가 운이 좋아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도 문제를 겪지 않았다고 해도 절대적 이성으로 뭔가를 이미 찾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즉 그는 사실은 이 세상에 굉장히 많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자신이 행한 폭력은 대개 나중에라도 그 댓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유한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이성이란 결국은 우리와 우리의 환경과의 화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쩌다가 특정한 상황에 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이성을 찾아야 한다. 모짜르트가 음악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회에 태어났다면 그것은 매우 아까운 일이지만 모짜르트로서는 그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의 폭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하고 수긍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신의 세상, 자신의 집을 만듬으로써 세상의 폭력에 대한 최소한의 대피처로 사용할 수는 있다. 세상이 알아주건 말건, 자신이 만족해하는 자신의 세계속에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어야 하는 일이며 나아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고 적어도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이 필요하다. 우리는 타인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 이상으로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우리는 이 세계의 폭력을 느끼지만 또한 이 세계가 필요하다. 그런 사회적 접촉에서는 내가 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고려해야만 공존이 가능해진다. 비록 나의 입장에서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나의 마음과 느낌을 이해해주지 않는 상대방이지만 내가 나와 타인의 차이를 고민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상대방은 그것 자체를 폭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이란 실로 타인을 칼로 찌르면서도 상대방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접촉에서 우리는 이성에 대해 두가지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 측면은 이성이란 의식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우리의 기원은 세상의 폭력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세상의 폭력에 대해 우리의 폭력으로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의식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는 무지속에서 무의식속에서 그저 폭력을 행하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기의 상태와 같다. 그러나 아기는 영원히 아기로 남아있을 수없다. 심지어 부모도 아기의 마음을 다 몰라주기 때문에 아기는 세상의 폭력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의식을 깨우게 된다. 일단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대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원한다고 해도 아기로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성인이 된 사람들중 다시 아기의 상태로 돌아가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객관적으로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찾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며 그 탐색과 선택은 세계의 폭력이라는 환경속에서 행해진다. 배고픔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먹을 것을 위해서라면 뭘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폭력이란 우리의 존재의미이며 가치이기도 하다. 요리사는 기본적으로 타인이 요리를 할 능력이나 환경에 있어서 나보다 못하기 때문에 요리사로 일하고 대접을 받는다. 그것은 이발사에서 대학교수나 운동선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만약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왜 학생들은 나보다 모르는 것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면 그는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자신의 일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듯이 세상의 폭력이라는 자극이 있어야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무의식중에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의 두번째 측면은 그것이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것 이전에 애정과 관심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생각할 대상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가 애정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이성은 작동되지 않는다. 적어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완벽히 해결되지 않으며 그런 때가 온다면 앞에서 말한 이유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꺼버리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세상에게 우리를 이해시킬 수 없고 세상은 영원히 우리에게 미지의 장소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도 어떤 제한을 가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세상은 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과 나는 공존을 위한 규칙에 합의 한다. 이것은 만들어진 일관성으로 당연히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그러나 이 합의 혹은 이 규칙이 나와 세상의 어떤 행동이 폭력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당연히 이 합의는 부자연스럽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의 틀속에서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을 주문당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게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며 폭력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적어도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이 합의의 전제가 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중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나 공동체 정신이라고 부른다면 이 사랑이나 공동체 정신이 전제되지 않은 사회적 합의는 무의미하다고 해야겠다. 흔히 사랑은 비이성적 행위로 여겨지지만 사랑이 없이는 이성도 없다. 결국 자기 혼자만의 세상에서 세상의 폭력을, 자기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것은 이해하기 쉽지만 심지어 인간이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극복하고 착취할 대상으로만 볼 때 인간은 제대로된 이성을 발휘할 수 없다. 그저 자연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뿐이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이 내가 존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만이 우리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폭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폭력과 연약함의 자식들이다. 세상의 부족함과 무정함이 나의 존재이유이고 나의 존재 가치다. 우리는 수압을 견뎌내는 댐과 같은 존재라기 보다는 강력한 물의 흐름이 물 속에 만들어 내는 소용돌이 같은 존재다. 우리는 끝없이 폭력을 해소시키고 나를 세상에 이해시키려고 하고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하는 첫번째 폭력은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폭력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연약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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