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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빈자리

by 격암(강국진) 2016. 1. 20.

2016.1.20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빈자리는 여전히 채워지지 못하는 상처처럼 남아있다. 아버지는 말씀이 거의 없는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밥은 먹었냐 수준 이상의 것을 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던가 대학은 어디로 가기로 했냐는 질문조차 한 적이 없다. 언젠가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가 성적이 된다면 내 아들도 법대를 가거나 의대를 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다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내게 하신 적이 없고 무정한 아들도 별로 그런 소망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다. 물리학과에 가려던 내가 법대나 의대를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들이며 아내의 작은 일들에 신경을 잘 써주시는 분도 아니었다. 노는 날에는 아들들과 놀아주고 같이 외식을 나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 태어난 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바다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을 정도다. 아이들이 옷을 뭘 입는지, 신발은 뭘 신는지, 학교는 잘 다니는지, 친구는 있는지 같은 모든 일에 대해 뭔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의 몫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빵을 한박스나 가져오셔서 삼형제가 많이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내게 있어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기억이란 이렇게 대개 그저 퇴근 길에 사오신 약간의 먹거리와 관련이 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돌아가신 후에 그리고 내가 자식을 키워보면서 느끼는 것은 뭔가가 있는게 대단한 게 아니라 뭔가가 지속적으로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 대한 관심을 아예 접은 적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미없는 아버지임은 분명했지만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한 얼굴을 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집안을 드나들면 반드시 얼굴을 비추시고 그 재미없는 밥은 먹었냐라는 질문을 던지던 사람이었다. 묵묵히 절제하고 근면하게 사시는 뒷모습을 보여주셨을 뿐 아버지는 공부나 인생살이에 대해 무엇하나 말로 지도해 주신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더 잘하라는 채근을 들어 본 적도 없다. 아버지가 나에게 화가 난 얼굴을 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뭘 알겠냐 네가 잘하겠지같은 태도였던 것같다. 관심이 느껴지는 침묵이랄까. 자식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줄 정도로는 자상하지만 자식에게 나는 너에게 실망했다라는 표정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부모가 되기는 쉽지 않다. 설사 자식이 잘난 자식이라도 그렇다. 욕심이란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철저히 눌러야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게 안되어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되는 얼굴을 몇번이나 보여준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못난 아버지다.

 

아버지는 국졸이시다. 한글을 못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읽고 잘쓰는 수준도 아니어서 평생 어머니가 서류처리를 하는 일에는 따라다니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지만 돌아보면 우리 집 식구 모두는 물론 이거니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6남매가 모두 이 장남에게 매달려서 살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되지 않아 부산으로 가서 돈을 벌기 시작하셨다. 시골의 집이며 땅을 사는 일에서 어린 동생들 교육비며 시집 장가 보내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는 아닐지라도 상당부분 아버지의 어깨위에 부담으로 떨어졌다. 동생들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집 자식만 해도 삼형제가 모두 대학까지 나왔으니 택시 운전사의 삶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어머니는 요즘도 감정이 격해 지시면 옛날에 그 어려웠던 때 고비 고비마다 위기가 다가왔던 일들을 이야기 하신다.

 

아버지가 돈 벌이를 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이었다. 직장암에 걸리셔서 수술을 하시고는 일을 접으셨다. 그리고나서는 또 10년을 사셨는데 폐암이 발병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요즘 어머니를 보면 그 10년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드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 세대에게 부부란 훨씬 더 하나의 생명처럼 얽혀 있는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팔이나 간장이나 콩팥 같은 몸의 일부는 몸에 붙어 있을 때에는 머리나 심장에 비해 그리 압도적으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지만 그것이 없어지면 오래 살기 어렵거나 바로 죽는 일이 있는 것처럼 배우자가 죽고 나면 남은 사람은 기능적으로 정서적으로 적응이 너무 어려운 장애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몇달 전에 돌아가셨다. 오랜간 아프신 것은 할머니 쪽이셨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70대의 할아버지가 할머니 병수발을 들고 식사를 챙긴 것도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또 금방 돌아가셨다. 이것도 그분들이 50년이상 같이 산 부부였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세대는 개인주의적이라 대개 부부라고 하더라도 예전 세대만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시대에 적응한 것도 있고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말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발전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살해서 죽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이런 게 정말 서로 완전히 관련이 없을까?

 

암수술을 받으면 암이 치료되도 많은 노인들은 기력이 떨어진다. 그러면 배우자가 힘들어 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열심히 걸어다니시더니 돌아가시기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안정적으로 사셨다.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수술받고 고통스러워 하시는 쪽은 오히려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폐암투병기간에는 물론 여러모로 약해지셨지만 암환자치고는 투병기간도 그리 길지 않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것도 아버지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다. 암환자의 병수발은 가족을 파괴할 정도로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스스로 알지 못하셨지만 묘한 균형을 이루고 살고 계셨다. 보수와 진보의 균형이랄까. 일을 수행하고 저지르는 것은 언제나 어머니여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뒤쪽에서 어렴풋이 느껴질 따름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집안의 가장은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절제와 보수적 성격으로 집안의 무게중심을 지켰다. 그런 아버지와 살면서 어머니는 이런 저런 일들을 못하게 하는 아버지에 대해 투덜거리시고는 했었다. 그럴 여유도 별로 없기는 했지만 하려면 할 수도 있었을 것같은 부동산 투기가 우리집에 없었던 것은 아버지의 성향때문이다. 우리가 더 부자가 되지 못한 것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로 아버지 때문이었겠지만 우리집안이 지금 정도라도 안정적인 것도 주로 아버지 때문이다. 세상에는 부동산 투자에 성공해서 돈이 생겼지만 자식들이 그 돈만 바라보다가 별로 좋지 않게 된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형제중 내가 제일 게으르다. 그 성실성도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는 그냥 하던대로 바꾸지 말고 살자는 의견을 내시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고 꼭 필요하지 않으면 복잡하게 되도록 일을 저지르지 말고라는 식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개 어머니에게 지셨다. 어머니가 계속 이사를 가고 싶다면 가는 것이다. 다만 아버지가 일단은 안된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미리 조심하셨고 또 결정이 금방 내려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그러고도 아버지 몰래 해야 했다. 정이 많으신 어머니는 남들에게 안된다는 말을 잘 못하신다. 그럴 때는 아버지가 좋은 핑게가 되었다. 아버지 허락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머니는 안절부절하신다. 곁에 붙어서 안된다고 할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일을 추진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이 안되는 것이다. 누가 와서 어머니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까봐 내심 두려워 하신다.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거절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 살다보면 많은 일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저절로 해결되곤 한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안한다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는 공포심이나 욕심때문에 자꾸 기발한 생각을 따라가려고 한다. 큰 길을 버리고 작은 길이나 지름길로 가려고 한다. 그러다가 일이 꼬이면 애초에 아무 것도 안한 것보다 훨씬 더 고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머니는 요즘 자주 겪으신다. 그리고 어머니가 괴로워 하시면 물론 자식들도 모두 괴로움을 겪게 된다. 계속 집안에 크고 작은 분란이 생기는 것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큰 원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아직은 어머니가 살아계시지만 나는 고아가 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어머니가 느끼는 빈자리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들 중에는 사실 여러모로 자식을 힘들게 하는 분들도 많다. 재정적으로 그렇게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도 그런 분들도 많다. 그건 꼭 부모들의 잘못도 아니다. 부모란 살아있고 한계와 욕망을 가진 인간이지 돌이나 부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

 

40-50이 된 사람도 때로는 떼를 쓸 사람이 그리워 진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를 그리워 한다. 그러나 떼를 받아준다는 게 직접 해보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부모의 사랑을 바라는데 그 사랑의 기대라는게 어떤 때는 부모에게 족쇄가 된다. 요즘 30-40대 중에는 부모에게 아이를 맡아달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같은 사람들이 많다. 언제나 김치며 반찬을 부모에게 당연한 듯이 받아오지만 나중에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다. 부모의 집을 언제나 부담없이 놀어갈 수 있는 별장이나 리조트처럼 쓰면서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같은 사람들이 많다.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부모의 재산을 이미 자신의 것이 된 것마냥 부모 맘대로 누구에게 주거나 써버릴 수 없다고 뻔뻔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모에게는 이제 직장을 관두셨으니 집에서 편히 쉬라고 하면서 제발 부모님이 그저 밥이나 먹고 가끔 산책이나 하면서 계속 조용히 계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들은 꽤 된다. 그러나 본인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작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저 밥드시고 날마다 가시는 산책운동하시고 티브이 보시면서 사셨다. 아무 것도 안하신다면 안하시면서 그저 거기 계셨다. 그저 거기 계시면서 어머니 옆을 지키시고 자식들이 찾아가면 언제나 환영하시며 거기 계셨다. 왜 자주 안오냐는 말을 하시는 법도 없으셨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 뿐이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어떤 심리적인 짐도 지우지 않으시면서 사셨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꽤 적적하고 힘드셨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는 참 좋은 부모님이지만 정이 많고 가만히 있질 못해서 항상 자식들이 걱정하도록 만드는 부모도 많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작은 사치를 고맙게 받는 분이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빈자리가 크다. 무던하게 뚜벅뚜벅 사셨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버지가 하신 것 이상으로 아버지가 안 하신 것들에 나는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사실 수 있는 분도 얼마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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