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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응답하라 1988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6. 1. 17.

최근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88을 봤었다. 이것은 20편짜리 드라마이므로 여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무수히 많은 것이 가능할 것이지만 그간은 나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굳이 글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끝난 어제는 문득 고향이란 것에 대해 몇마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은 참 신통치가 않다. 살다보면 호흡은 짧아지고 시선은 좁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원점에서 다음 단계로 그리고 그 다음단계로 계속 변화해 왔다는것을 잊는다. 대단해 보이는 나무도 씨앗에서 출발했듯이 우리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욕망도 실은 단순한 것에서 유래했었다는 사실을 잊거나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연과 망설임의 결과물이다. 되돌아보면 과거에 있었던 한 단계 한 단계의 변화는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매순간 고민하고 흥분했었다. 때로는 확신이 없이 때로는 너무 서둘러 우리는 뭔가를 버리고 뭔가를 선택했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는 뭔가를 잃고 또 뭔가를 얻어서 지금의 우리에 이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개인에게서도 그리고 하나의 사회라는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는 드라마에서 어렸을 때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것은 첫사랑이란 하나의 중요한 원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극적인 사랑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의 첫사랑들은 적어도 대부분 그렇지 않으며 우리들은 종종 그저 누구에게 말조차 하기 민망한 찌질한 이야기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드 카드를 보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던 초등학교 때 옆자리 앉았던 소녀의 기억정도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소녀하고 손이나 한번 잡아봤나하면 그런 것도 없는 밋밋한 첫사랑 이야기다. 


찌질하건 그렇지 않건 이렇다할 장대한 이야기가 있건 그게 아니면 그저 말할 것도 없이 단순한 만남이었건 살다보면 우리 가슴에 남고 쌓이는 이야기들이 있다. 첫사랑이 그 이야기들중의 하나다. 그래서 굳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질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 그시절 첫사랑이 이렇게 되었다면 저렇게 달랐더라면 우리는 지금 참 다르게 살고 있었을 것같다는 느낌에 빠져든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모두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들이다. 제작진은 그저 막연한 상상과 기억만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세부사항까지 자료를 찾아 과거를 재생해 냈다. 이것은 고마운 일이다. 언젠가 읽은 논설에 따르면 한국은 기록문화가 부실하기 때문에 1988년보다 더 옛날의 것은 제대로 만들 수가 없을 거라고 한다. 실은 1988년을 재생시키는 것만 해도 사람들의 기억이 세부적인 곳에서 틀리는데다가 남아있는 자료가 확실하지 않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누가 응답하라 1979나 1970을 만든다고 하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더 큰 고증의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고증이 세세할 수록 그 세세한 고증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세세히 기억해 낸다. 미묘한 것, 시시한 것. 그것이 더 소중하고 진짜다. 잘 복원해낸 1988년의 풍경은 우리가 그때 뭘 욕망했었는가를 기억하게 해주고 동시에 2016년의 시점으로 그걸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배고픈 사람은 배가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외로운 사람은 친구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은 단순히 배를 불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으며 외롭지 않은 사람은 외롭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는 노력이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월과 세상에 의해 변했다. 꿈도 욕망도 사람자체도 변했다. 


만약 우리가 무한한 능력과 시간을 지녔다면 이것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잊은 걸 천천히 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유한한 능력과 유한한 시간을 지녔다. 그래서 배고팠기 때문에 배가 부르기를 욕망했으며 그걸 이룰 수 있다는 약속에 우리는 뭔가를 팔아야 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때로 양심이고 인간성이며 우정이고 이상이며 꿈이기도 하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걸 팔아야 배를 채울 수가 있었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걸 팔아야 친구를 구할 수 있었다. 또다른 어떤 결핍이 우리를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허기지게 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버리고 팔아야만 했다.


응답하라 1988같은 드라마가 가슴 저리게 느껴지는 부분은 그런 과거가 드라마가 가지는 환상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실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있는 사람에 비하면 거의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우정과 인간을 지키는데도 사는게 힘들고 눈물난다. 현실의 사람들은 대개 이웃에게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귀한 친구에게 좀 더 친절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못한 경우가 많다. 가족들에게도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버린 경우도 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친구들은 한 골목에서 자라나서 모두 엘리트나 기득권층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현실은 대개 그 보다 훨씬 가혹하기 마련이다. 따지고 보면 눈물 흘릴 일은 한편의 드라마로 표현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많다. 우리가 나쁜 기억력을 가진 것은 그러지 않기에는 가슴아픈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과 다르게 이상화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판타지는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현실때문이다. 우리 가슴속의 상처때문이다. 젊은 세대도 이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들의 경우에도 인생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꿈을 잃고 욕망을 잃어 버린다. 이제 새로운 꿈을 더 꿔봐야 이뤄지지도 않을 것같고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저 부질없는 욕심일 뿐인 것같다. 부질없는 욕심을 가지는 것은 대개의 경우 권장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욕망이 없는 것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실은 그저 변화하는 욕망과 욕망쫒기 속에서 길을 잃어서 이제 다음번에는 뭘 욕망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말이다. 어디서 오던 길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게 되기 쉽다. 


응답하라 1988같은 드라마는 낡은 욕망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출발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같다. 우리는 대개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잊어버린다. 말하자면 사탕이 먹고 싶어서 사탕 살 돈을 벌러 나갔는데 돈을 막상 벌다보니 바빠서 사탕을 잊어버리는 식이다. 그 돈을 벌겠다고 가슴이 무거워 지는 일들도 했는데 말이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하기만 한데 원래 뭐하러 돈을 벌려고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나니 꿈도 욕망도 점점 희미해 진다. 꿈꾸던 자리에 고생고생해서 올랐는데 애초에 왜 내가 이자리를 원했던가, 정말 이런 자리가 내가 원했던 것인가 하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이다. 


우리 사회의 원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원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온 것같은데 또 뒤돌아보면 영 엉뚱한 짓만 하면서 산 것같다. 누군가가 그러니까 당신의 사탕은 어떻게 된 것인가하고 물으면 할말이 없어질 것같다. 응답하라 1988같은 드라마를 보다보면 문득 과거의 나 자신이 나를 보면서 그런 질문을 던질 것만 같다. 


 지금의 우리도 편견에 차있지만 옛날의 우리도 편견에 차있다. 그러니까 꿈과 욕망은 과거의 것이든 지금의 것이든 어느 것이든 영원하고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자신과 대화함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망상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남들 이야기에 넘어가서 버둥대고 있는데 실은 우리가 원했던 사탕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다. 누구도 역사와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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