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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드라마 미생을 보고 2 : 차별에 대하여

by 격암(강국진) 2014. 12. 1.

요즘 드라마 미생이 아주 인기군요. 미디어에서 연일 미생에 대한 뉴스를 쏟아내고 있으며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드라마 미생을 4편보고 난 이래 10편을 더 보면서 저는 이 이야기들의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간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저에게 굳이 다시 미생에 대한 글을 써서 정리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차별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다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명제에 대해 그다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은 직장이라는 것에 있어서 돈이란 그 자체가 그렇게 까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돈은 수단이라는 것이죠. 그 자체로는 그저 숫자이고 종이일 뿐입니다. 돈은 뭘 하는 수단인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소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남들만큼' 소비하기 위한 수단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돈이나 소비하는 것의 절대치라기 보다는 누구보다 얼마나 더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돈을 더 벌면 자랑 스럽고 돈을 못벌어서 남들이 하는 소비를 나는 못하면 챙피하고 불행합니다. 그래서 종종 드라마에는 돈을 못벌어서 자식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거나 유학을 못보내는 부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아무도 학원에 가지 못하거나 아무도 유학을 못간다고 생각하면 불행하지 않을텐데 남들은 해줄 수가 있는데 나는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그렇게 부끄럽고 가슴아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차이를 극복하고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직장에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미생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차별이나 차이가 등장합니다. 직급의 차이가 있고, 남녀간의 차별이 있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있습니다. 드라마 미생은 사실 아예 처음부터 이 차별과 차이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장그래는 외톨이입니다. 동기중에서 유일한 계약직 사원인 그는 동기들이 왕따를 시키지 않아도 외롭습니다. 그는 괴로운 일상속에서도 상사에게 '우리애'라는 말 한마디듣는 것이 그렇게 고맙습니다. 우리 회사라고 하는 곳에 계속 다니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에게 소중한 일입니다. 정규직인 직장동료와 계속 함께하고 싶은데 자신만 뒤에 남겨두고 그들이 떠나 버리는 것이 그에게 가장 악몽같은 미래입니다. 드라마 미생은 무서운 세상속에서 홀로 서는 외로움을 감당하지 않고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이고 싶고 동료이고 싶은 사람의 앞에는 메뉴얼이 있고 차별이 있습니다. 그저 직장동료이고 싶은 여자직원의 앞에는 남녀차별이 있고, 인간적으로 상사와 소통하고 싶어하는 부하직원의 앞에는 직급이 주는 문화적 역할이 만들어 내는 차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비정규직으로 회사라는 공간에서 가장 위태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앞에는 그 보다 더한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으며 드라마의 주인공 장그래는 아예 고졸 검정고시 출신으로 학벌로 인한 차별도 있습니다. 


이런 차별에 대한 생각을 조금 해보고 나서 원래의 명제로 돌아가봅시다.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한 곳이다라는 이 명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말단직원이든 중간 관리직원이나 이사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 착취당하고 차별당하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부들부들 떨고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곳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악에 대해 가장 기분 나쁜 부분은 우리가 그 사회적 악의 완전한 희생자 일 때가 아닙니다. 그건 드문 일입니다. 그런 경우 즐거울리는 전혀 없고 화도 나겠지만 적어도 떳떳한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기분 나쁜 것은 차별받고 착취당할 때 기분나빴는데 자기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똑같은 짓을 해왔고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입니다. 폭행당했을 때 세상이 너무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자신도 폭행범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세상은 더 거지같아 보입니다. 똑바로 살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것때문에 드라마 속에서 오차장은 계속 고뇌에 빠집니다. 오차장은 죄없이 내쳐졌던 비정규직 직원이 자살한 그 사건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벗어던지질 못합니다. 그 비정규직 직원과 똑같은 질문을 장그래는 오차장에게 던집니다. '이렇게만 하면 회사 계속 다닐수 있는거겠죠?'  오차장은 희망없다, 욕심내지 말라같은 잔인한 말을 던집니다. 오차장은 과거의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회사는 계속 다녀야 합니다. 장그래때문에 또 가슴아플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화가 납니다. 비정규직으로 고민하는 장그래도 상처입지만 장그래 입장에서는 하늘같은 오차장도 시스템 속에서 꼼짝 못하고 매일 같이 술로 고민을 달래는 일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속의 이 풍경을 말하다보면 흑인 노예해방의 이야기나 간디의 인도독립운동 생각이 납니다. 그 두가지 해방운동의 본질은 백인에 대해서 흑인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영국인에 대해서 인도인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감정이 있고 자제력이 있으며 꿈과 가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가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죠. 제가 이해하기로 비폭력운동의 핵심은 우리가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발로 차면 화를 내는 것은 개도 할수가 있죠. 그러나 비폭력을 지키면서도 저항의 연대를 풀지 않는 것은 인간적 가치를 믿는 인간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그래는 비정규직도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꿈이 있고 감정이 있고 가족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오차장은 그것을 느낄 감수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괴로워 합니다. 


이것이 드라마 미생에서 보여주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입니다. 이제 이런 풍경에대해 뭘 생각해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한두마디 더 하고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만 제가 뭘 쓰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좀 더 행복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의지 일 것입니다. 너무 간단히 이건 원래 이래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우리가 종종 느끼는 것은 그것은 어쩔수가 없다는 감정입니다. 마치 먹는 것이 삶의 일부인 것이 당연하듯이 이러한 현실은 산다는 것의 핵심적 일부이며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게 그런거다라는 말로 이런 감정은 정리됩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첫번째 문제는 아마 이런 사는게 그런거다라는 생각일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럼 대학교 안나온 사람과 대학교 나온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고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을 똑같이 대우하고 하라는 말인가. 세상은 어차피 경쟁이니 경쟁에 이긴 사람은 기쁘고 경쟁에 진 사람은 슬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런 말이 지극히 당연하게만 들린다면 그건 슬픈일입니다. 이 말들은 옳지만 또 전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은 문맥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세상이 온전히 경쟁논리로만 돌아갔다면 인간은 아직도 개나 늑대처럼 황야를 헤매며 살고 있을 것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멸종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부모는 자식과 무한경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식보다 더 힘이 세다고 자식 먹을 것을 다 뺏어먹을 것같으면 자식은 굶어죽었겠죠. 우리는 멸종했을 것입니다. 


이런 최소의 공동체를 지적하면 사람들은 그거야 우리 유전자에 그런 성향이 있으니까라고 말하고는 다시 그것만 예외고 인간은 본래 무한경쟁하면서 살아온 것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역사는 경쟁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공동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서로 경쟁하는게 아니라 서로 돕고 살아왔기 때문에 크고 작은 공동체와 집단이 생겨서 문명을 만들고 이제까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살아온 것이죠. 세종대왕이 자기가 똑똑한 것을 보여서 경쟁에 이길려고 한글을 만들었겠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한 경쟁이 당연하다라는 것 자체가 세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승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이 세상은 무한 경쟁의 결과 승자가 살아남는 곳이며 나는 살아남았으니 더 뛰어난 승자라고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은 나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기 위한 잘못된 이데올로기 입니다. 실은 우리는 잘 보이지않는 무수한 사람의 호의와 양보때문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인간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본래 경쟁만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살만한 곳인 것입니다. 


모든 차이와 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문제는 같은 일을 하는데도할수 있는데도 합격불합격의 차이 하나가 지나치게 큰 차이를 만들어 죽고 사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차별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고 말하는것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임금 격차가 크고 임금 격차이전에 사회적 차별이 너무 커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할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데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선은 점점 더 로또같아집니다. 대학입시에 한 문제의 정답이 두개라는 것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눈한번 질끈 감으면 삶이 달라질 것같습니다. 이런 삶은 좀 멀리서 보면 사는게 장난같아집니다. 상식이 무너지니까요.   


또하나는 가치평가의 측면인데 세상의 가치관이 단순화되니까 어떤 성공기준에 미달하면 인간으로써 완전히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그렇게 대접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 반대면 인간으로 대단하다고 평가받고 자부심을 느끼죠. 뭘하던 10억번다고 하면 대단하신 분이군요라고 하고 수입이 없다고 하면 별볼일 없는 사람이군 하는 식으로 판단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차별은 돈이나 자리의 문제 이전에 인간적 자부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직장 일의 성공 실패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정도가 너무 심한 것도 문제고 서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느 새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같은 큰 질문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거나 아예 비웃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질문의 최종적인 답은 찾아지지 않을 것이며 사람마다 다른상황에서 다른 답이 찾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최종적인 것이 찾아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서 무시해 버리면 우리는 사는 것에 있어서 큰 그림을 자꾸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꾸 작아지고 우리의 삶을 보다 작은 문맥속에서만 의미를 평가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위기의 인간입니다. 세상의 위기는 이거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사람은 흔히 정말 수십년 죽자사자 괴로움을 이기며 살았는데, 성공하자고 못할 짓도 많이 했는데 돌아보니 남은 건 하나도 없더라라고 말하는 상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추억도, 가진 재물도, 심지어 가족도 없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돌멩이나 쇠조각을 집을 짓거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본다면 그렇게 사용될 수 없는 돌멩이나 쇠조각은 가치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절대적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실리콘같은 재료는 반도체가 널리 쓰이기 전에는 무의미한 소재였겠죠. 무엇보다 돌멩이건 쇠조각이건 뭔가의 재료로 사용되는 것이 그 존재의 핵심적 이유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 가지는 궁극적 존재이유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한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 인간은 어떤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존재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의 존재이유는 각자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세상을 두루 둘러보고 느끼기위해 다시 말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정규직이 되어서 마땅한 존재도 아니지만 정규직이 아니면 혹은 어떤 직위를 가지지 않으면 가치없는 존재는 아닙니다. 


지금도 세상은 그리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에서 좀 빠져나오고, 인간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일도 틈틈히 하면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좀 덜 무섭고 조금은 덜 외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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