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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EBS 특별기획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를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6. 3. 7.

블로그에 오신 균형님의 추천이 기회가 되어서 최근에 장하석 교수의 2014 EBS강의를 봤습니다 (이하 장하석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과학철학에 대한 개론을 위한 강의로 기획된 연속강의는 12번의 강의와 1번의 질의 응답으로 되어져 있으며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 있더군요. (https://www.youtube.com/watch?v=vHBxu6Yk76c&list=PLWT7UjqyW3_XYzLvOV6Amuel5_7v8toSR). 저는 딱히 과학의 역사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장하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고민들에 깊은 공감을 느꼈기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강의였습니다. 재미있는 예들도 많았고 많은 지식들이 요약되었다고 느꼈으며 함축된 의미도 아주 깊은 강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읽은 소감을 쓰고 싶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12번의 강의의 제목들은 이렇습니다. 1. 과학이란 무엇인가 – 2. 지식의 한계 – 3. 자연의 수량화 – 4. 과학혁명 – 5. 과학적 진리 – 6. 과학의 진보 – 7. 산소와 플로지스톤 – 8. 물은 H2O인가 – 9. 물은 100도에서 끓는가 – 10. 집에서 하는 전기화학 – 11. 과학지식의 창조 : 탐구와 교육 – 12. 다원주의적 과학 - 13. 질의응답. 





전체적으로 보면 포퍼의 과학의 반증과 쿤의 정상과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장하석은 애초에 이런 저런 개념들이 생겼을까라고 하는 질문을 가지고 시초로 가보면 우리가 지금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불확실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것도 어느 진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실한 계기와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또한 우리가 뭔가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고 관측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가정이나 이론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지식이나 관측결과 자체가 우리의 지식과 믿음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모두 적용되는 좋은 예가 온도계가 발전하여 온도라는 것을 수치로 측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장하석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서양사람들은 먼저 인간의 체온이라던가 얼음과 소금을 섞은 것의 온도등 약간 애매한 기준에서 우리의 온도개념을 시작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념들은 측정의 기준이되고 기준을 가지고 만든 측정들이 다시 기준을 수정하는 순환을 거쳐서 점점 섬세하고 정확한 온도의 수량화과정이 진행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점진적 발전이 정말로 확실한 진리에 수렴하는 것인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수량화는 근대과학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수량화에 있어서의 애매함이란 그대로 근대과학발전의 기초를 건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시간이나 온도나 무게등을 있다라는 것은 현대과학의 기초입니다. 게다가 애매함이 약간의 오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전혀 다른 시스템들의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면 더욱 문제입니다. 그것이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붕괴입니다. 


쿤의 패러다임 이야기는 강연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이므로 혹시 모를 수도 있는 분들을 위해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영자라는 친구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관찰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좋다는 정도를 0점에서 100점까지 매긴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처음 만남에서 영자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표정을 짓고 좋게 말을 합니다. 그랬더니 영자도 나에게 좋게 대해줍니다. 


나는 영자와 계속 만남을 가졌습니다. 어떤 만남에서 영자는 30점짜리로 굴었지만 어떤 만남에서는 100점짜리 인간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게해서 많은 만남을 가진 결과 나는 영자가 80점짜리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영자를 계속 만났더니 나의 관측결과들은 영자가 정말 80점이라는 점을 계속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자는 80짜리 인간이라는 믿음에 대한 관측적 일관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제 영자는 아주 확실히 80점짜리 인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에서 사실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우연의 결과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상이 나빴거나 중간에 악운이 반복되었더라면 나와 영자와의 관계가 나빠져서 나는 영자가 30점짜리 인간이라는 결론에 수렴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은 인간이 계속해서 만났는데도 서로에 대해 반드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에 대한 포퍼의 입장은 우리가 영자를 계속 보면 영자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하는 쪽입니다. 쿤의 입장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느 정도 자기 일관성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믿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켜지고 있는 믿음이 정상과학이며 그것은 위기를 만나면 붕괴하고 다른 믿음으로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쿤의 이론을 싫어했습니다.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이 힘있는 자가 나쁜 믿음을 퍼뜨리면 그것이 유지될 있다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쿤은 이런 지적에 대해 과학은 자유주의를 보호하는 정치적 역할을 없으며 실은 과학은 비판적 논의를 포기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출발점을 정하고 그것에 대한 질문을 포기해야 가정위에 탐구를 쌓아올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거나 출발점으로 세운 논리는 금방 붕괴할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장하석은 과거의 패러다임이라고 해도 그것이 말도 안되는 미신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플로지스톤 패러다임같은 과거의 패러다임들이 아깝다고 말합니다. 플로지스톤은 사실 음의 산소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산소이론으로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이 플로지스톤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산소가 결합되는 것을 플로지스톤이 나온다고 말하면 같은 설명이 되니까요. 다만 문제는 산소는 무게를 가졌는데 그런 식이면 플로지스톤은 음의 무게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음의 무게를 가진 쪽이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양의 무게를 가진 산소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개 후자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플로지스톤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주 말도 안되는 생각을 것은 아닌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전기선 속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전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기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13번에 걸친 강의의 내용을 그냥 여기에서 순서대로 요약하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는 비판적 요약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디서 강의가 실패하고 있는가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강의의 의미를 요약하는 방식입니다. 


아주 좋은 강의라고 말해 놓고 실패에서 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멋진 자동차도 열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상자처럼 보일 있지요. 실제로 강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금술이나 점성술을 되살리자 같은 주장으로 말입니다.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장하석은 강의속에서 혁명가처럼 말할 있었고 말해야 하는데 길들여진 학자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 강의는 전체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약간 상실하고 설득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장하석의 결론적 메세지는 과학연구에 있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절대주의, 일원주의는 백해무익하며 따라서 성숙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원주의적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 과학은 자연의 관찰에서 도출된 것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자연의 진실된 모습에 접근해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없으며 과학에는 여러가지 다른 패러다임이 있는데 패러다임중의 어느 하나만을 따라하지 말고 여러가지를 공존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모든 가능한 사고의 틀을 허용하자는 극단적 상대주의는 아닙니다. 여기서 장하석의 논지는 약간 흐립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과학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건너 뛰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패러다임들의 경쟁력은 도구적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이 강의속에 등장하는 논지입니다.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이 과거의 패러다임보다 진리에 가까운 것은 아니더라도 도구적인 쓸모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기적인 시각으로 1등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여러 패러다임을 같이 유지시키고 서로 소통하고 융합하기도 하는 쪽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연의 관찰을 통해 진리에 다가간다고 하는 실체론적인 입장과 도구적인 유용성을 생각하는 비실체론적인 입장의 차이에 대해 잠깐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실체론적인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과학의 출발과 발달에 대한 질문이 필요없거나 약합니다. 과학의 대상인 세계는 이미 존재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관찰하고 그것을 알아갈 뿐입니다. 마치 먼지가 망원경으로 세상을 오래 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식입니다. 


반면에 도구적인 측면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풀어야 문제 혹은 질문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못을 박을 필요가 없다면 못을 박는 도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2천년전의 과학기술로도 우리가 가진 모든 질문을 해결할 있으며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상의 과학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이상의 , 예를 들어 관측할 수도 없는 것들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가한 사람의 공상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쿤이 말한 정상과학의 붕괴와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정상과학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쌓이니까 궁리끝에 새로운 생각이 나오고 그것이 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정상과학이 아주 생산적인 시기라면 우리는 지금의 정상과학을 뛰어넘는 패러다임을 생각해 필요가 없고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황금이 마구 나오고 있는 땅을 포기하고 이럴지 저럴지 없는 땅으로 정처없는 모험을 떠나자는 설득은 먹히지 않을 테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과학뿐만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논의 메타과학에도 적용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자연에 대한 관찰로부터 유일하게 결정되지 않는데 과학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과학이란게 뭔지를 역사를 봄으로써 유일하게 결정할 있을까요? 다시말해 과학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이나 다원주의적 관점도 상위의 메타적 수준에서 모두 서로 경쟁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원주의적 관점과는 달리 다원주의적 관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문제의 출발점에 대해 깊은 강조를 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원론적인 관점의 과학이 지금 깊은 한계를 보이면서 모순을 엄청나게 누적시켰고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기 직전이니 우리는 다원주의적인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논지에서 다원주의적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못할 과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일원론적인 과학처럼 보입니다. 그저 과거를 살폈더니 과학이란게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이렇게 발전하더라 과학에 대한 우리의 관찰이 과학의 실체로 우리를 이끌더라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장하석은 귀납의 한계를 말하고도 그의 강의를 재미있고 유익하지만 많은 역사적 사실로 채웁니다. 다원주의를 말하면서도 강의의 대부분을 일원주의적 입장으로 진행합니다. 사실 역사를 보면 과학은 개의 패러다임만이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도 앞으로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결론만 중요한게 아니니까 전반적으로는 보편적인 과학철학사를 보여준 후에 결론에서만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꺼냈다는 이야기는 물론 어떤 문맥에서는 정당화되는 이야기지만 그것은 다원주의적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원주의적 입장 혹은 비실체적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문제의 제기부터 확고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이야기는 마치 양자적 효과를 측정할 방법도 없는 시대에 양자역학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같은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실제로 질의 응답시간에 질문이 계속 나왔던 것은 그런 다원주의적 과학이 되겠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설득력이 약했던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만 언제나 질문이 답보다 중요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신경써야할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죠. 문제가 있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답은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이고 지금 답을 몰라도 그건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문제 자체가 없다면 그냥 이런 생각도 한번 해봤다는 식이 되고마니까요. 그걸로 세상이 바뀔 리가 없지요. 따라서 다원주의 과학을 말하고 싶으면 일단 일원적 과학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몇시간을 사람들을 설득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지금 세계경제가 흔들리고 환경문제로 미래가 위태로워지는 그렇겠습니까? 거대한 토목공사가 어이없는 정치논리에 휘둘릴 있는 것은 그렇겠습니까? 하고 강연이 시작되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강연을 했다면 사람들의 흥미도 더욱 높았을 것입니다. 


장하석이 혁명가처럼 말해야 했고 말할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강의는 어느 정도까지 설득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재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장하석은 일원적 과학내지 하나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과학의 문제에 대해 강의 여기저기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간 중간에 가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도 합니다. 따라서 강연이 이렇게 흘렀던 것은 그의 본의가 아니라 현실적인 타협일 수도 있습니다. 


장하석은 옛날 패러다임들을 옹호하면서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우리는 옛날 패러다임보다 지금의 패러다임이 좋다고만 생각하지만 실은 현대적인 패러다임으로 사고의 틀을 바꾸면서 손실되는 지식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들을 살피다보면 우리는 그것은 주로 과거의 패러다임이 우리의 직접적 관찰에 의존하는 개념들로 이뤄져 있는 반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강력하지만 추상적인 개념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많은 것을 설명할 힘을 가지기에 패러다임의 경쟁에서 이겼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집니다. 


장하석은 물이 100도에서 정말 끓는가라던가 물이 정말 H2O인가 같은 예들을 통해서도 이런 점을 보입니다. 실은 물은 조건에 따라 다양한 온도에서 끓습니다. 때로는 110도가 넘어도 끓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옛날 과학이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요즘 과학이 가르쳐 주는 답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우리가 무지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세상을 너무 간단하고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의 관찰이 우리가 아는 과학이론과 다르면 우리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물만 이런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많이 배울 수록 오히려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일원론적인 과학이 우리를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자신과 가까운 것들을 다룰 때는 오히려 옛날의 패러다임이 쓸모가 있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구가 둥글고 태양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아도 실은 지구가 평평하며 고정되어있다고 생각하면서 일상생활을 하듯이 말입니다. 같은 점은 양자역학과 뉴튼역학의 비교에서도 나옵니다. 로켓을 발사할 우리는 양자역학을 써서 하지 않습니다. 장하석의 강의에서 나오는 예는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예는 야구와 뉴튼 물리학입니다. 우리는 야구를 뉴튼 물리학 방정식을 풀어서 하는게 아닙니다. 


지식의 빈틈 혹은 지식의 공백은 다원론적인 과학론을 추구해야할 중요한 이유중 하나입니다. 일원론적인 지식의 시스템이 거대한 영역을 다뤄가고 직접적인 관찰이 불가능한 양들을 다룰 수록 그것은 우리 개인의 체험에서부터 추상화되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보지도 않고 세상에 대해, 자기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세상을 지나치게 깨끗한 그림으로 보면서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장하석은 이 점을 물위에 비친 집의 그림자로 표현합니다. 실은 흐릿한 물위의 그림자가 실체고 깨끗하게 보이는 집이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패러다임의 성장에 따른 지식의 공백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에 대해서는 여러의견이 있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심각하며 빠르게 심각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니 환경문제니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의 소외니 하는 현상들이 모두 일원적 사고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장하석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렇게 크게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장하석은 대학에서 강의하고 학계에서 논문을 쓰는 교수답게 자신의 논의를 과학철학을 넘어서 전개하는데에 있어서 지극히 소극적입니다만 그가 말하는 여러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과학이 있는 세계란 어떤 의미에서 낡은 기술이 유지되는 사회라고 생각됩니다. 트렉터가 나와도 호미를 쓰는 기술이 바람직한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볼펜이 있어도 붓이나 만년필로 글을 쓰는 문화에는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원주의적 과학의 장점을 네가지로 말합니다. 그것은 예측불허에 대한 보험이고 지적 분업이며 한가지 목적을 여러가지로 달성하는 것이고 여러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사실 두개의 다른 문화가 만났을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었는가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생각할 요즘 시대에는 우리가 그것을 있는 여력이 있다고 본다라는 말만으로는 당연히 설득력이 약하죠. 


다원주의적 과학의 세계란 어떻게 보면 그렇게 실현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수의 언어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가끔 보면 5개국어씩 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도 나라마다 다른 언어를 쓰고 있지요. 우리는 그렇게 다수의 과학을 동시에 배우고 다수의 과학패러다임이 다른 문화집단에서 독자적으로 사용되어지는 미래를 상상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문화나 언어와 다른 점은 것이 배우기 쉬우며 이득도 엄청나서 이미 어느 정도 전세계가 하나의 과학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하나의 합리성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점성술이며 무속신앙이며 전통신앙들이 유지되기도 하지만 관용의 폭에 대한 현실적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과학에 대한 종교재판을 말할 때는 당연히 그것들을 미친 짓들로 말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현대과학과는 다른 과학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 일입니다. 그런 당연히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이 실은 세계를 하나의 과학으로 통일시키는 것은 당연하지라는 말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원주의적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고 고민하자면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없습니다. 과학이 인간을 최면시킬 때 그 힘의 강력함과 그 한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장하석은 질의응답시간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겸손해야 한다같은 말을 강조 했고 과학은 인본주의적이라고까지 말했지만 그의 과학에 대한 논의에서 인간의 한계에 대한 논의나 분석은 그렇게 많지 않거나 충분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혹은 현대는 이러저러한 곳이기 때문에 다원주의적 과학을 도입하지 않으면 이러저러한 문제를 겪게 된다는 식의 논의는 별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인간과 시대의 현실도 논의의 핵심적인 문제인데 말입니다. 


강연은 매우 훌룡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밑에 깔린 많은 노력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하석은 말합니다. 과학교육 지나고 나면 사실들을 잊혀지고 그걸 배우던 형식만 남는다고. 우리 권위주의적으로 과학을 가르치지 말자고. 마찬가지의 생각이 약간 강연에 대해서 듭니다. 재미있고 유익했지만 많은 사실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잠깐 머물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특히 강연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배경이 없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렇겠지요. 그러고 나면 강연의 논리적 구조만 남게 될텐데 그게 주관성을 말하는 객관적 이론이나 다원주의를 말하는 일원적 논의같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현실적인 한계때문에 그랬겠지만 그것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강의들이 좋게 느껴지는 만큼 아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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