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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EBS 인문학특강 과학으로 말하는 인간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6. 3. 3.

얼마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강의하는 장대익 교수의 EBS인문학 특강을 시청했습니다 (이하 그냥 장대익이라고 호칭하겠습니다.). 과학으로 말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2회에 걸쳐 이뤄진 강의에서 장대익은 인간을 초사회적이고 초모방적인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초라는 글자를 붙인 이유는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원숭이도 사회적이지만 인간은 훨씬 더 사회적이라는 의미에서 초자를 붙인 것입니다.





장대익은 그 자리가 인문학특강이라는 이유에서 인지 처음부터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에 반기를 듭니다. 과학이 다른 인문학들을 흡수 합병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과학이 줄 수 없는 답을 철학이나 종교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과학이 모르는 것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지 과학이 그 답을 모르는 것을 기타 다른 분야가 답할 수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대익은 과학은 사실명제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고 따라서 가치 명제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에도 반기를 듭니다. 과학은 인간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제시함으로해서 분명히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대익은 과학에 대해 차갑고 가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특히 한국에서 더 심해서 아이들이 문제풀이는 하지만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장대익의 강의는 매우 명쾌하며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그저 백과사전식으로 지식을 나열하여 강의를 길게만 늘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논지를 세우고 그에 필요한 이야기만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주 훌룡한 강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떤 분야를 전공한 전문가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유혹은 아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아는 것을 절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전문가교육이란 정확히 그 반대로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교육이란 어떤 세부사항을 무한히 자세하게 파고들라고 가르칩니다. 그럴때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따라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고 교수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하에서 어떤 세부사항들이 무한한 중요성을 가진다는 생각은 주입되기 마련입니다. 전문가들은 종종 뭐 하나 말하려고 하면 그리스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다 이야기합니다. 그런 문맥에서만 자신의 논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한국의 풍토가 그런데 장대익의 강의는 그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나름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남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장대익이 그가 말한 것들에 접근하는 방법은 과학이 인간과 우주에 대한 것들을 알려 줄 때 우리가 인간을 보는 시선이나 문맥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라던가 인간은 어떤 진화적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을 알고 인간을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인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과학이 사상과 가치를 제시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뉴튼과 아인쉬타인, 괴델등의 인물들을 거론하면서 과학이 사상을 제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사실 이런 이야기가 자연주의적 오류 즉 사실명제가 가치명제를 낳지 못한다는 지적을 돌파하지 못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장대익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세계의 왕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온갖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도 자신을 천한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기 쉽겠죠. 마찬가지로 인간의 진화나 지구의 우주적 위치따위를 고려할 때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 것인가가 영향받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대익이 두번의 강의를 통해서 집중한 논지는 인간은 뭐가 동물과 달라서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로 보면 침팬지는 99.6%가 인간과 유사한데 왜 침팬지는 20만년전 이래로 변화가 없는데 인간은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 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으로 제시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뇌가 발달했고 그결과 침팬지와는 다른 규모의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동물들이 무리를 이룰때 그 통상의 크기가 뇌의 전두엽의 발달정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침팬지의 경우는 그 규모가 50정도인데 뇌의 용량이 3배쯤 큰 인간은 150명 정도의 사회적 규모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또 원숭이는 설사 사회적 협동을 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하며 다른 존재의 생각이나 느낌을 느끼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불필요하다고 보일 정도로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어서 눈앞의 이득을 위해 절차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논의들은 말하자면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인간이라는 것이며 과학은 뭐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실험에 의해서 많은 것을 밝혀내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특징을 더 자세히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문명을 이루고 번성할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게 해줌으로서 인간이 그러한 자신의 특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장대익이 말하는 인문학으로서의 과학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즐겁게 시청했으며 추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두가지의 것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남았다는 것을 말하고 이 글을 마치고 싶습니다. 하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그 차이에 대해 지나치게 크게 인식하게 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여기 두대의 자동차가 있다고 해봅시다. 두 대의 자동차는 똑같지만 하나는 열쇠가 없고 하나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럴 때 두 자동차의 성능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대는 주행이 가능하고 한대는 불가능하니까요. 이것은 열쇠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만 우리가 열쇠만 너무 쳐다보고 있으면 자동차를 이해하는데에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자동차가 엄청난 속력으로 주행할 수 있는 것은 열쇠 이외의 것의 힘인데 말이죠. 


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식의 기계적 조립을 가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식은 부품으로 나뉘어 질수 있다는 환원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침팬지와 인간을 비교하고 어느 쪽에 어떤 부품을 더 썼는지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라는 식의 사고가 나옵니다. 그런데 전일론적인 사고 방식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분을 비교해서 두 개체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어떤 일반화나 선입견없이 현재의 인간에 대해 보려는 노력도 중요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은 장대익의 논지를 약화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이해하는데있어서 동물과의 비교를 하는 것은 흥미롭고 좋은 관점입니다만 그것말고도 많은 비교와 관점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문명과 지금의 문명을 비교하고 뭐가 틀렸는지를 보는 것이죠. 현재 시대에도 이런 인간들이 있고 저런 인간들이 있다는 비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통상 인문학으로 말하는 분야의 주제입니다. 물론 장대익은 과학만이 가치를 말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들은 앞으로도 과학 밖의 접근이 될것인지 과학의 시각이 이런 접근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비교우위가 있게 되는지등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과학이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은 점점 작은 의미만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두번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일반화의 문제입니다. 사실 과학이 가지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죠. 과학은 이 세상 모든 사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을 암시하고 약속합니다만 그 기본 논리를 보면 일반화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은 약속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애초에 강의의 시작이 인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장대익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박근혜나 노무현에 대한 것도 아니었죠. 과학은 주로 증거를 통해 자신의 발견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과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개념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 수록 논리전개가 간단하고 쉽습니다. 인간의 과학은 아시아인의 과학보다 쉽습니다. 한국인의 과학은 아시아인의 과학보다 어렵고 한국인 중의 한명인 장대익의 과학은 완전히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장대인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일반론의 법칙에 끼워넣기 때문이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A이면 B라는 것을 B이면 A인 것으로 대체하는 논리적 오류입니다.


장대익은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법칙이 장대익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 앞에서 말한 특별한 존재를 일반론의 법칙에 끼워넣는다는 것의 예입니다. 그런데 장대익은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자기 혼자만의 특이한 면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단 하나 단 한번만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과학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은 재현성이 없으므로 법칙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대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대익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보편적인 면에 집중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장대익이 유일한 하나의 사건이라는 측면을 은폐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문학으로서의 과학이 가지는 약점입니다. 제 아무리 오래 과학을 공부한 사람도 그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소년이 어느 대학에 진학해야 하며 사랑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내일 아침은 뭘 먹어야 하는지를 결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은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문학적 정보나 조언이란 이렇게 나라는 한 개인의 코 앞에 있는 문제에 대한 것들입니다. 스스로를 우주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발밑을 보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죠. 실은 현대에 과학이 일반대중으로 부터 멀어지는 이유의 핵심에는 이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너무 방대하고 추상화되어 개인을 소외시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은 어떤 일반적 개념의 한 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대익이 자신이 제기한 문제를 진짜로 해결하고 싶다면 인문학으로서의 과학이 가지는 이런 문제를 적절히 다뤄야 할 것입니다. 


이 것들은 물론 비판입니다만 따뜻함과 존경의 비판입니다. 재미있는 강의를 잘 듣게 되었으므로 고마운 일이지요. 또한 과학이 말해주는 것들도 물론 중요한 것들이라는 점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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