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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성의 문제

여성혐오라는 말의 그늘

by 격암(강국진) 2016.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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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23

아래의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패턴 인식분야에서 강의를 들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그림이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그림속에서 뭔가 보이나요?'하고 질문을 받는다. 이때 우리들중의 80%는 이 그림속에서 뭔가를 쉽게 보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 저기 개가 보이지 않습니까하고 지적한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던 개가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일단 한번 개를 보면 그 개는 못 보게 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만큼 명확히 보인다. 여기에서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에서 개를 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성취해 냈다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미쳤다는 뜻일까?

 

 

 

정신분열 경력이 있는 사람이 일으켰다는 강남 묻지마 살인은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문에 한가지 말이 주목받았는데 바로 여성혐오다. 그런데 일은 좀 묘하게 흐르는 것같다. 여성혐오라는 말에 언짢게 반응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여성혐오를 일으키는 구조에 포섭된 사람으로 다시 지적하는 사람들에 의해 논쟁은 이제 강남 묻지마 살인 사건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사건의 범인이 실제로 여성혐오로 살인을 했는가 안했는가가 안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경찰은 그 살인사건의 범인은 어디까지나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이며 여성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발표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가진 어떤 면에 대해서 여성혐오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테두리가 불분명하여 종종 남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지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실제로 이 사건의 범인이 실제로 여성혐오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 보자. 설사 그렇다고 해도 여성혐오를 문제삼는 것은 그 살인범과 동일한 종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되기 쉽다. 혹시나 싶어서 말해 두는데 여성혐오를 입에 올렸다고 살인범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어떤 중요한 논리적인 한 측면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성혐오때문에 묻지마 살인을 한다는 행위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고 여성은 모두 하나의 집단이므로 그들이 모두 나의 미움과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어떤 여자가 그를 괴롭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마치 특정 전라도 사람에게 한대 맞고서 다른 전라도 사람에게 복수한다던가 특정 스포츠 선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다른 스포츠 선수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 자기를 괴롭힌 그 특정한 여자에게 분노하는게 아니라 모든 여자를 혐오하는가? 왜 잘난 척하던 우등생 하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모든 우등생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강남살인사건같은 것을 통해서 한국의 남성 모두에게 흔히 발견되는 어떤 측면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한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남성의 압도적 다수는 살인범이 아니고 살인범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남성이 정말 혐오스러운 여성혐오를 표현하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 남성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은 아주 작을 것이다. 차라리 그 남성이 교통사고로 누군가를 죽일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여성혐오는 그 살인범의 오류다. 아니 정신병이다. 모든 혐오가 정신 건강에 나쁘기는 하지만 여성같은 단어는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 모든 사람을 혐오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정신병이라고 불러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그런 살인 사건을 목격하면서 똑같은 종류의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여성혐오라는 것이 아주 제한적인 문맥을 넘어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맥속에서 사는 오늘날 모든 종류의 일반론적인 개념들은 아주 특정한 문맥에서 쓰이지 않는다면 오류가 된다. 그리고 그 오류는 실은 우리가 그렇게도 비판하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뿌리가 된다.  

 

문제의 중심에는 계산의 혹은 관점의 비대칭성이 있다. 한 잔인한 깡패가 임대주택에 살고 있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임대주택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위협은 보편적으로 느껴진다. 즉 이것은 사회문제로 생각되며 그래서 사회적 집단적 일반론적 개념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그 임대주택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살며 그들이 대개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면 그것은 대개 이상한 하나의 사건이라고 해석되기보다는 요즘은 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가라는 질문속에서 해석된다. 

 

위에서 말한 경우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준법의식은 형편없으며 그들의 억눌러진 분노는 위험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다. 우리는 쉽사리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시작이 바로 이런 입장의 비대칭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에이즈에 걸린 게이가 있다고 하면 모든 게이들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가난한 범죄자가 있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범죄자로 취급받는다. 전라도 깡패를 만난 사람은 전라도 사람이 모두 깡패라고 말한다. 무식한 흑인을 본 사람은 흑인은 모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 어떤 한국남편을 본 중국여자는 한국남자는 모두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자보다 돈을 벌지 못하는 여성들을 본 남성은 여자는 모두 돈을 버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이 회색지대에 있으며 개념은 임시적인 것이다. 임대주택에 만명의 사람이 사는데 거기에 단 한사람의 깡패가 있고 9999명의 선량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임대주택 사람이 위험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차별이 된다. 그런데 깡패가 천명쯤 되면 어떤가. 여전히 '위험한 임대주택 사람들'이란 말은 9천명의 선량한 사람을 차별하는 말이 되는가 아니면 천명이면 상당한 수이므로 그 말은 이제 의미있는 말, 일리가 있는 말이 되는가.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수 있다. 깡패가 5천명이면 위험한 임대주택 사람들이란 말은 자명한 말인가? 8천명이면 어떤가. 그정도면 그런 말을 해도 떳떳한가? 하지만 설사 깡패가 9999명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단 한명의 선량한 사람이 있다면 위험한 임대주택 사람들이란 말은 오류의 소지가 있는 개념이 아닌가? 그 사람은 매우 소수파니까 좀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의견이다. 그런데 이게 누가 하는 소리같은가? 소수자의 권리따위 늘상 무시하는 무식한 극우파인가 아니면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박식한 진보주의자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쉽게 이러저러한 것은 나쁜 개념이고 이러저러한 것은 좋고 자명한 개념이라고 구분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구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흑인을 차별하는 것은 나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국 남자는 나쁘다라는 말은 문화의 문제이며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라고 단언할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쪽 말이 옳은가 이전에 흑인이나 한국 남자 혹은 문화라는 일반적 개념들은 임시적인 것이며 테두리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흑백논리처럼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식으로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포크레인으로 케익을 자르려고 하면 케익이 엉망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마찬가지로 조악하고 고정된 개념들로 세상일을 대처하려고 하면 좋은 의도로 출발해도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기 쉽다. 

 

이제까지의 말이 자명하게 들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실은 너무나 자명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잠시 멈춰서라고 나는 권하고 싶다. 이제까지 내가 쓴 것을 읽고 전혀 충격받지 않는 사람은 내가 쓴 말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오해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것은 그저 말이란 한계가 있다는 흔한 말도 아니고 우리의 말은 지금은 한계가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서 말을 더 조심스럽게 정확히 하자는 말도 아니다. 때로 우리의 말은 노력할 수록 엉망이 된다. 누군가를 상처주고 더 극명하게 틀린 것이 된다. 당신이 뭔가를 알게 되어서 기뻤다는 기억은 사실은 당신이 한걸음 더 미치게 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개념들과 말들과 이론들을 만들고 그것을 쓴다. 마치 한개의 사과도 똑같지 않은데 그 사과들을 전부 사과라는 개념에 집어넣고 사과 5개를 사고 파는 것처럼 말이다. 안그러면 장사가 불가능하니까. 이러한 행위는 위험하지만 종종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다. 특히 이것이 이런 필요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주 위험한 악이다. 왜냐면 그들은 그 개념이 임시적이라는 것을 잊고 그 개념 자체를 실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실체로 보고 그것을 혐오하는 행위처럼 이것은 일종의 정신병인데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플라톤이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이데아론의 주창자이기 때문이다. 무지를 강조하는 철학자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때문에 플라톤 철학을 비판한 바 있다. 바로 플라톤 철학이 전체주의의 기원이고 열린 사회의 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대부분의 우리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의견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론을 만들고 개념을 만들고 말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동시에 그것이 일정부분 미쳐가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박식한 우리는 어떤 입장에서는 미친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한쪽이 하나의 단어를 던지는 순간 그 사람은 어느 정도 미친 것이다. 세상에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념따위는 없는데 어떤 개념을 만들고 그것이 마치 단단한 실체인 것처럼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저 점들이 있었는데 다음 순간 그 점들은 개라는 또렷한 실체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개념은 세상의 어느 측면을 강렬하게 비추는 것과 동시에 그 그늘속에 세상의 무한히 많은 진실을 가린다. 

 

두 사람이 자신들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사람이 아닌 것과는 다른 존재이며 반면에 자신들은 사람들이므로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쪽이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은 여성이라는 집단의 일원이므로 지금 나를 만나고 있는 남성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곧 개념 과잉의 상태에서 서로를 만나게 되기 쉽다. 서로를 직시하지 않고 남의 눈으로 서로를 보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미친 사람을 만난다. 내 눈에 분명히 보이는 개가 그 사람에게는 보이질 않으니 미쳤다고 밖에 표현이 안된다. 그런데 누군가가 미쳤다던가 누군가가 어떤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던가 누군가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관점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바로 전체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관점이다. 즉 이 세상에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진리의 관점이 있으니 그 진리를 미친 사람들에게 전파만 하면 그 미친 사람들이 올바른 세상을 보게 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나도 그 사람에게 미친 사람으로 보일 거라는 것이고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지식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내가 누구나 뻔히 잘 보는 개도 보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난국이나 대립을 타개하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해서 상대방을 눈먼자, 무식한자, 미친자로 부르는 것은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니다는 것이다. 비록 때때로 우리는 인간적인 감정에 빠져서 그런 행동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여성차별을 없애는 궁극의 단계는 사람들에게 여성을 우대하거나 여성을 봐주자고 하는 것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여성이란 단어의 의미를 무한히 작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다르다. 차별할 여성이란게 없다. 여성혐오에 대처하는 중요한 한가지 원칙도 이 세상에 여성혐오따위는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화성인이 침공한다고 외쳐도 사실 화성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아니라 우리 대부분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가 여성혐오를 또렷한 실체로 인식할 때 여성혐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나 이론은 우리의 도구이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우리가 뭘 모르기 때문에도 일어나고 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도 일어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같다. 우리는 열심히 이론을 만들고 배우고 말하고는 그걸 잊어버려야 한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추천할 수는 있지만 누구의 이러저러한 이론을 모르니 대화가 안된다는 식의 말은 가능한한 피해야 한다. 그런 건 대화가 아니다. 

 

대화에는 사랑과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종종 그런 쪽으로 최대한 노력해도 대화는 실패한다. 대화는 시도할 때 마다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겸손이 없을 때는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사랑과 겸손이라는 말은 너무 흔하다. 그러나 이 말을 계속 기억하고 이 말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많은 개를 보거나 혹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여성혐오가 없다는 말일까? 분명 여성혐오는 있다. 말은 옳다. 그럼 여성혐오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인가? 여성혐오가 없다는 말도 분명 옳다. 위에서 소개한 포퍼가 말중에 단어의 의미가지고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도 있다. 단어가지고 싸우지 말고 사랑하고 겸손을 발휘하는 쪽으로 노력하자. 그게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인데 요즘 세상에 아주 부족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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