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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성의 문제

위선적 성윤리의 상처

by 격암(강국진) 2018. 3. 16.

한국은 역사적인 이유로 가치관이나 사상의 혼란이 심하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이 상황마다 자기 편한대로 일관성없이 행동하는 일도 자주 있는 것같다. 결국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자기가 누군지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분야 중의 하나가 바로 성윤리다. 한국 사회의 성윤리는 전근대적 질서와 국민평등의 사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지뢰밭같은 것이 되었다. 어느 사회나 성적 일탈로 문제가 생기지만 한국은 그게 너무 심하다. 여기에는 분명히 우리가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내가 말하는 전근대적 질서란 주로 혈족을 기반으로 한 가문의 질서를 말한다. 한국은 여전히 주로 혈연에 근거해서 재산을 세습하고 권력을 세습한다. 많은 가문들이 유명무실해 졌지만 여전히 많은 가문들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지만 정도가 다르다. 한국처럼 혈연관계를 강하게 따지는 나라가 없다. 서양사람들은 촌수가 약간만 떨어져도 이웃사촌보다 더 무관하게 느낀다. 족보같은 것도 없고 그래서 증조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일도 많다. 한국의 족보책 이야기를 하면 외국 사람들은 대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한다. 수백년 이상의 기록을 집집마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처럼 삼성이나 현대같은 거대 주식회사가 특정 가문에 의해 지배되고 세습되지 않는다. 나는 거대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세습한다는 일이 과연 한국말고 다른 어느 나라에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가문의 개념은 당연히 남성중심적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으로 이뤄진 핵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먼 혈족관계까지 따지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질서속에서 여성의 성은 더 많이 억압당한다. 조선의 양반에게 있어서 아이를 많이 낳아서 가문의 일원을 늘리는 행위는 굳이 나쁜 것이 아니었으므로 남자의 혼외정사는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고 어떤 때는 바람직한 일이기 조차 했다. 하지만 여성이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는다면 가문의 질서는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삼성이나 현대같은 가문의 후계자들이 사실은 엄마의 혼외정사로 만들어 진 아이였다고 상상 해보라. 박근혜가 사실은 박정희의 친아이가 아니었다고 생각 해보라. 이런 일들이 얼마나 한국 사회에서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인가. 왕자나 공주는 왕의 친자이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피는 전근대적 질서속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며 핵심이다. 사람이 심장은 이식수술해서 고쳐도 되지만 뇌는 이식수술할 수 없는 것처럼 전근대적 질서속에서 아버지의 피는 바꿀 수 없는 인간의 핵심으로 파악된다. 제 아무리 세종대왕이 오랬동안 키우고 교육시켰다고 해도 그 아이보다는 태어나자 마자 헤어져 아버지 얼굴도 본적없는 아이가 진짜 세종대왕의 아들이고 딸이다. 이건 그렇게 당연한게 아니다. 

 

이런 질서속에서 성적인 접촉은 당연히 엄청난 의미가 있다. 그건 그냥 어떤 남녀가 만나서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는 개인적 취향 수준의 것이 아니다. 권력과 재산 그리고 사회적 질서의 문제다. 하지만 모든 성적인 접촉이 억압되지는 않는데 전통적으로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양반이 종년을 강간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당연한 권리에 가까운 것이다. 오히려 종년이 반항하는 것이 몹쓸 짓이었을 것이다. 종년이나 종놈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강간하는 양반에게 무력할 수 밖에 없다. 서양에서도 노예의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양반 가문의 여자는 그런 권리가 없다. 양반가문의 부인이 종놈과 대놓고 정사를 벌인다면 그것은 엄청난 중죄다. 종년이 낳은 양반의 자식은 살아남았으며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서얼이니 서자니 하는 이름도 있었지만 종놈이 양반부인을 임신시켜 자식을 낳는 경우에는 그런 자식에게 이름이 없다. 종놈도 죽겠지만 그 부인도 아기도 십중팔구 살해당했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21세기 현대의 한국에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성추행을 하거나 강간을 했다. 이것은 양반이 종년을 건드린 것일까 아니면 어느 양반가문의 여자를 다른 양반이나 혹은 종놈이 건드린 것일까? 이 질문은 언뜻 들으면 터무니없게 들린다. 왜냐면 물론 현대의 한국 사회는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성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지뢰밭이 되고만 이유는 신분제의 역사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렇다. 서양에 흑인노예가 없는 것처럼 현대 한국 사회에 종년이나 종놈은 없다. 대한민국에는 이제 종년이 없다. 하지만 이 문장을 독자는 스스로 세번쯤 말해 보기 바란다.

 

대한민국에는 이제 종년과 종놈이 없다. 

 

아마 여러번 말하고 있으면 점점 더 자신이 없어질 것이다. 온갖 갑질에 당한 사람들 이야기라던가 재벌집 자식이 누굴 두들겨 팼다던가 어떤 사람들은 법위에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왠지 화가 날지도 모른다. 

 

21세기 한국에서의 성추행은 잠재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에 불을 붙일 가능성이 있다.

 

너는 종년이니 내가 너를 강간하는 것은 나의 권리다. 너는 종놈이니 내가 너의 아내와 딸을 성추행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 -> 아니다. 우리는 너희들의 종이 아니다. 

 

성추행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다. 그러면서 순간 순간 상대를 종년이나 종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부하직원이나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종으로 착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상대를 성추행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종년을 희롱하는 대감마님이 된 기분에 젖어서 기분도 좋아진다. 그런데 내가 누구더라? 여기가 어디더라?

 

21세기에 흑인을 노예취급하는 것이 심각한 일이듯 누군가를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이제 어떤 성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못했다 수준의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인식의 역전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인식된다. 

 

사람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성범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 모든 한국 시민들은 스스로를 양반집 아들딸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사실 누구도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공의 장소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점점 더 종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식의 역전을 겪는다. 공공의 장소에서 논의 되는 성범죄는 어느 잡놈이 양반집 딸을 강간했다는 사건으로 인식되기 쉽다. 이건 조선시대라면 당연히 사형이다. 

 

따라서 공공의 장소에서 자신의 성범죄나 성적 욕망을 인정하거나 다른 사람의 범죄나 욕망을 지적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언뜻 들으면 성범죄자를 옹호해주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문맥에서는 성범죄자들도 어느 정도는 시대의 피해자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저런 잘못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 잘못을 인정하거나 남이 지적해 주어서 그 잘못을 고친다. 물론 그래도 잘못은 또 한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추행의 문제는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가 없다. 내가 길을 가다가 어떤 아가씨의 발을 밟았다거나 뭔가의 일로 화가 나서 어떤 아가씨에게 돌을 던졌다고 하자. 성적인 의미가 없는 폭행은 상대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기가 쉽다. 성추행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칼로 찔렀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질 정도다. 왜냐면 공공의 장소에서 재판받을 때 성추행을 인정하는 것은 사법적 기준으로가 아니라 윤리적 감성으로 말하면 사형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의 가슴을 만져서 성추행을 했다고 하자. 가해자가 사과를 해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진짜로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전통적 윤리가 그것을 막는다. 잠깐 화가 미칠 듯이 나서 의자를 여자에게 집어던진 남자가 미안하다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미쳤었다. 다시는 안하겠다라고 사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 상황도 용서는 쉽지 않지만 이 다음에 말할 상황보다는 용서가 쉬울 것이다. 성추행범이 미안하다. 네 가슴이 갑자기 너무 매력적으로 보여서 내가 미쳤었다라고 말할 때 이해한다, 사과가 진심이라면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여자들은 한국에 거의 없다. 당연하다. 그럴 수가 없다. 종놈이 자기 가슴을 만졌는데 양반집 딸이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이다. 추행도 비윤리적이지만 전통윤리는 그걸 용서하는 것도 금지한다. 상황은 극단적이 된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한국은 매우 성적으로 위선적인 사회가 되었다. 속으로는 썩어가면서 바깥으로는 지나치게 성에 냉담한 척한다. 한국에는 모텔이 많고, 매춘업소가 많다. 어느 나라나 룸싸롱따위의 장소가 있는게 아니다. 티비속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이 춤추는 모습은 어떤 서구의 여성 이상으로 성적으로 개방적이다. 우리나라는 혼전 순결이 지켜지는 나라도 더이상 아니다. 뒷 이야기로는 온갖 불륜이며 즉흥적인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산악회나 초등학교 동창회는 불륜의 온상이라던가 박카스 아줌마가 공원에서 노인들에게 성을 판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공공장소로 가면 사람들은 성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을 비난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지적당하면 그것을 자연스런 인간의 본능으로 인정하되 다만 자제하려고 한다는 자세로 말하기 보다는 내가 그런 생각을 정말로 가졌다면  나는 사표를 쓰겠다, 심지어 죽음으로 내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식이다. 실제로 성추행범으로 억울하게 몰린 교사가 자살한 경우도 있다. 

 

'딸같아서' 여교사를 성추행하는 교장에게 그 여자는 딸도 아닐 뿐더러 딸에게도 그런 짓은 안한다는 사실을 공공장소에서 지적하면 인생전체가 무너진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제지를 하기도 힘들다. 어떤 여성에게 접근하는 상사에게 성적인 의도로 접촉을 시도하면 좋지 않다라는 암시를 하는 것은 내가 너를 공개사형에 처하겠다라고 협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방은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서 '대량학살을 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는 조언을 하는 것처럼 반응하기 쉽다. 나를 뭘로 보는 건가 하는 식이다. 

 

내가 지적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런 흑백논리, 이런 절대적 엄숙주의가 오히려 성범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싫은 여자가 싫다고 말할 수 없고, 이건 아니다 싶은 사람이 편한 마음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자제하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들 '반복되면 말할꺼야'라던가 '다음에는 말해야지', '너무 심해지면 끼어들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참다가 멈출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어떤 때는 말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오해도 생기고 강간이냐 화간이냐 하는 논쟁도 쉽게 벌어진다.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종종 이것이 추행이고 강간이라면 애초에 왜 참았냐고 말하지만 피해자들이 이것이 성추행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관계를 절대영도로 냉각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오히려 주변에서 너는 무슨 그런 일로 말도 안되는 실례를 범하냐고 할 판이다. 

 

한국사회에서 성추행 이야기가 웃으면서 마구 던질 이야기가 못되며 특히 공공장소에는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얼마전에 하나 있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박에스더 KBS기자가 방송을 하는 중에 성추행을 한 적 없다는 진행자에게 웃으면서 "그럴까요. 그런 부분을 KBS미투에서 취재해 봐야겠네. 과연 그런 부분이 없었는지"라고 말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아주 많은 시청자가 화를 냈고 박에스더를 비난했는데 성추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웃으며 공공방송에서 하는 것은 마치 주유소에서 불장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한국사회에서 그런 대화는 협박의 효과를 발휘하고도 남는다. 그만큼 공공의 장소에서 성범죄는 극악한 일로 여겨진다. 

 

나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것에는 결국 두가지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전근대적 질서를 완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식에게 부당한 권력을 세습하는 교회나 재벌을 처벌해야 한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노예나 종취급하는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 그들이 악의 근원이다. 그들이 누군가를 종처럼 취급하면 결국 단계 단계로 많은 사람들이 종취급을 받는다. 

 

부의 세습은 합법이다. 하지만 그들이 부를 세습하기 위해 하는 짓은 결코 합법의 테두리에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신분제 사회라는 착각을 만들어 내고 유지시킨다. 막장드라마도 현실의 재벌이나 부자가문들도 아버지의 피를 받은 자는 그게 아무리 막장 인간이라도 법이 정하는 것 이상의 권한을 가진다는 전근대적 윤리를 시민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다.

 

또하나는 성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해 지고 무뎌지는 것이다. 나는 길가는 예쁜 여성을 보면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는 말이 반드시 나는 그 여성을 성추행하거나 강간할 것이고 불륜을 저지르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사람이라는 뜻일 뿐이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느끼고 사람이니까 순간 순간의 기분대로 짐승처럼 살지 않는다. 그게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나친 성적 농담은 나쁜 일이다. 누군가를 음탕한 눈으로 보거나 도촬을 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불륜도 나쁜 일이다. 하지만 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인 반응을 하면 그저 호색한에 불과한 사람을 강간범으로 만든다. 소매치기도 사형인 나라는 소매치기를 연쇄살인범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면 어차피 사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불륜을 저지른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전쟁을 명령하여 여러사람을 죽게한 부시 대통령보다 더 훌룡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정말 이게 옳은가? 나는 지금 불륜과 성적방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죄악은 다 사형으로 처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처분이 사형인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면 다 그 죄악을 옹호하는 일이 될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성윤리가 극단적인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신분제에 그 뿌리가 있다. 성범죄는 본래 그 핵심이 권력의 과시이지만 신분제가 있었던 역사와 결합하면 성추행은 상대방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우리의 성윤리적 감성을 다듬는 일없이 성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섹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바람직한 성교육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대참사가 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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