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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성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성에 대한 불편한 진실

by 격암(강국진) 2018. 1. 17.

18.1.17

성은 종종 금기시되는 화제이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성욕구는 종으로서의 인간이 생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이며 삶에 있어서 기초적 동기를 제공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성에 대해서는 불편한 진실이 하나 있다. 그 불편한 진실이란 다름 아니라 남자도 여자도 모두 성에 대한 욕구와 환상과 육체적 반응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는 성적으로 이렇다던가 여자는 성적으로 이렇다던가 하는 말들은 틀린 말이다. 사실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남자들 내부의 차이, 여자들 내부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런 말은 다양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라는 지적은 약간 어리둥절할 수 있다. 이런 다양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말이 불편해 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윤리와 소통의 문제때문이다. 윤리는 모두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공통점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따라서 모두의 성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의 안정성을 위협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차이를 강조하는 생각에 대해서 윤리적 위협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좋은 예가 바로 동성애자다. 

 

동성애자는 물론 소수다. 그리고 동성애가 그렇게 끝없이 화제가 되는 근본적 이유는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인정하면 성윤리가 무너질 거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사람은 이렇다라는 거대한 그림이 무너지는 것이 윤리의 붕괴로 느껴지는 것이다. 남자인 내가 같은 남자인 다른 친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성추행이 아니다. 물론 내가 같은 짓을 여성인 친구에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추행이다. 그런데 여기에 모습은 남자지만 속은 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이 단순한 윤리는 몇배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거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소수자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억압하는 쪽이 더 편하다고 생각한다. 

 

윤리의 문제는 시작에 불과하다. 잘 지적되지는 않지만 소통의 문제는 어떤 의미로 더 심각하다. 섹스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성적인 교감을 우리는 이 소통의 관점에서 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고 입술이 두텁게 부풀어 오른 여성이 당신과 시선을 맞추는 시간을 길게 하려고 노력할 때 거기에는 어떤 메세지가 있다. 여성을 바라보면서 멋진 웃음을 던지는 남성의 얼굴도 어떤 메세지다. 어떤 이성이 당신이 먹던 음식을 상관하지 않고 먹는다던가 춤을 같이 춘 이성이 스킨쉽에 대해서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어떤 메세지다. 사실 이 메세지들은 잘못 해석되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크지만 말이다. 

 

우리는 보통 소통을 언어로 한다. 인간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아주 많은 단어들을 만들어 냈고 그 단어들을 계속 해서 썼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언어의 개발은 단순히 유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관계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결국 붕괴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집에서 말을 배우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는 학교에 가고 오랜간 독서를 하고 멀티미디어까지 보면서 소통을 배운다. 우선 가족들 사이에서 많은 말을 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 우리들의 언어는 여전히 사람마다 약간씩 뜻이 다르지만, 그래서 그것때문에 싸움도 나고 고통도 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붐비고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그럭저럭 살아간다. 

 

소통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인간의 성적 교감은 원시인의 언어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만약 우리가 일상어를 배우고 연습하는 것처럼 성적 교감의 훈련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상상도 하기 힘들정도로 난잡한 세상에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매춘종사자보다 더 많은 성적 경험을 쌓는 사회다. 거의 무차별적으로 상대도 가리지 말고 말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이제까지 한 모든 대화가 성적인 교감이고 행동이었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바람직하냐 안하냐를 넘어서 인간의 몸은 그런 소통에 적합하지 않은 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성적인 소통은 아주 드물다. 따라서 그것은 현대인의 언어수준과는 달리 여전히 원시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물론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그것에 따라서 좋아지는 면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원시인이 조금 말을 잘하는 원시인이 된 것에 불과하다. 나는 때로 짐승들이 그런 것처럼 모든 인간들이 오직 정해진 짧은 번식기에만 성적인 욕구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간단해 질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언어를 발달시켜왔다. 그렇다면 그 일상어로 성적인 소통을 보조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 배우자들끼리 서로간의 성적인 판타지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라던가 하는 것이 그런 예중의 하나지만 보다 일상적인 소통도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인간의 언어는 애초에 대부분 그런 용도로 쓰라고 개발된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성적인 소통이 주는 문제를 인간은 그냥 윤리적 금기라는 억압으로 해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소통의 기술로 보았을 때는 여전히 유사이전의 원시인같은 상황에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현대를 살아야 한다. 수많은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눌러서 존재하지 않는 수준까지 내리거나 자신의 위선적인 생각과 행동때문에 괴로워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말이다. 시각적인 메세지로는 나는 당신에게 반했다라고 말하면서 행동과 말로는 허튼 짓하지 말라는 것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단순한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녹초가 된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종종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라는 처방들이 내려지지만 사실 그런 보편성에 기반한 처방은 암을 치료해준다는 미신적인 민간요법보다도 더 미심쩍고 도움이 안된다. 오히려 남자는 이렇다는데 나는 왜 다를까라던가 여자는 이렇다던데 나는 왜 다를까라는 생각에 더 괴로워하게 만드는 일도 많다. 

 

포르노 배우인 여자가 아내라던가 산부인과 의사가 남편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름의 논리와 이해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배우자가 다른 이성과 성적이거나 성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접촉을 하는 것을 극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극복은 정말 논리만의 문제일까? 이걸 극복하는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의 생각이 아주 보편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의 보편성을 가진 생각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가 나지않고 분노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것은 혹시 특정한 성적 취향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논리로 자기를 억압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줄 수 밖에 없다. 보편적 남성상, 보편적 여성상은 폭력이다. 

 

내가 이런 예를 꺼내는 것은 다시 한번 사람들간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바래서이다. 차이가 존재하는데 그 차이를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 된다. 인간사회에 사람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것은 그게 가능할만큼 서로의 차이를 표현할 언어를 만들어내고 썼기 때문인데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비극들과 폭력들이 넘쳐난다. 

 

동성애자에게 이성애자로 살라는 폭력이 대표적이지만 이성애자들도 그저 남자나 여자로 테두리를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폭력의 대상이 된다.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춤추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다른 남자에게도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상황따라 사람따라 지역따라 다 다르다. 이럴 때 보편적 사회윤리를 운운하면서 이정도는 이해해 줘야 하지 않는가라는 식으로 밀어부치고 나아가 의처증환자 취급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수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규칙들은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매우 폭력적이다. 그들도 대개 보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 가거나 혹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볼 필요가 있다. 그런 곳에서 혼자 가만히 있어보면 그간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압력이 나를 억압했는가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의 시선과 보편적 윤리에 신경을 쓰느라 자신을 녹초로 만들고 있다. 

 

이런 종류의 글은 문제만 제기하고 끝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대증요법에 대해서 정리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자.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흔한 이야기라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첫째로, 사람들은 성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내 말은 우리 성적으로 문란해지자는 뜻이 아니다. 성적인 소통이 꼭 섹스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오히려 이성교제를 어느정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대학에 들어가거나 30이 되거나 결혼 생각을 할 때까지 이성교제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성장하는 것은 인간을 어떤 면에서 아주 무력하게 만들고 따라서 행복한 삶이 그만큼 어렵게 만든다. 

 

그 반대 여파로 생기는 것이 오히려 변태적인 남녀관계다. 나는 언젠가 대학생들이 미팅에서 게임삼아 한다는  놀이에 대해 듣고서 매우 민망하게 느낀 적이 있다. 그 놀이는 육체적인 접촉을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거의 성추행수준의 행위들이었는데 그런 것을 사귀지도 않는 사람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그 놀이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연애단계는 다 뛰어넘고 갑자기 낯선 이성과 육체적 접촉을 하고 나아가 섹스도 하는 폭주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같다. 개인적 접촉의 경험이 없으니까 느닷없이 연애 판타지에 기반한 드라마나 섹스 판타지에 기반한 포르노를 현실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만나면 성적인 자극을 받도록 태어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식사가 필요한 것처럼 그 자극이 때로 필요하다. 그 자극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즐길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도록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형식으로 이성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부나 하지 연애는 안돼라는 생각도 불가피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관계는 다양하다. 반드시 연애나 섹스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아닌 경우도 많이 있을 수 있을텐데 한국에서는 그것이 너무나 많이 거세되어 있다. 학생들에게 이것은 금기시되고 어른들에게는 남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문화가 없어서 매우 어색해 하거나 퇴폐나 극단으로 치닫는 일이 많은 것같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산악회가 불륜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일도 생긴다. 포르노 영화나 잡지가 불법이 나라에서 접대부가 있다는 퇴폐업소는 또 왜 이렇게 많은가. 이것은 사회가 겉은 멀쩡하지만 안으로는 정신적인 불구인 사람들을, 이성과의 접촉에 있어서 매우 서투른 양산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이야기할 것은 앞에서 말한 것의 반대다. 우리는 인간을 멀리해야 한다. 특히 이성을 멀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불필요하게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믈론 우리가 살아가려면 우리는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어울림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의 한계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이성을 만나건 우리는 성적인 자극을 받는다.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인 건 말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걸 부인하고 나는 변태가 아니다. 나는 이성과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아무리 만나도 아무 생각이 안든다같은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야기가 아나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기가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내가 유부남인 동료 남성을 전혀 남성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 남성과 자꾸 둘이서 야근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고 질투를 하는 동료의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나는 괜찮아도 그 동료남성은 안 괜찮을 수도 있다. 그 동료남성이 말만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도 괜찮아도 그 동료남성의 아내는 안 괜찮을 수도 있다. 괜찮은 것은 능력이 있는 것이고 안 괜찮은 사람은 사람이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다 다르다. 사실 상황이 달라지면 같은 사람들도 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불행히도 현실은 이 조언들과는 정확히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성과 만나면 변변한 잡담도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많다. 그들은 자연스런 감정의 연애도 거의 못해봤다. 그런데도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성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고 있다. 포르노가 불법이고 성인 여성이라고 해도 여고생 옷을 입고 찍은 누드 사진을 보면 아청법에 위배된다는 한국에서 성추행 뉴스는 끊이질 않고 매춘 업소는 어딜가나 있는 것같다. 불륜이나 탈선 이야기도 끝없이 나온다. 한국에서 클럽이 정말 춤추는 것만 좋아해서 가는 곳이 맞나? 만약 30대 이상의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춤추는 클럽을 만든다면 그곳이 게이클럽이 아니고서야 장사가 될 것인가? 한국에 있는 저 수없이 많은 모텔들은 다 누가 소비하는 것인가. 겉으로는 욕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 뒤에서는 구질 구질 썩는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이다. 우리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걸 배운 후에 라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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