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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에세이들/철학이 있는 집

철학이 있는 집 1 : 우리의 상식

by 격암(강국진) 2016. 7. 7.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일본의 미타니 코기가 감독한 모두의 집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집을 짓는 일에 여러 사람들이 끼어들면 전체의 계획이 얼마나 크게 왔다갔다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집을 지어 본 사람들의 후일담에는 언제나 자신의 상상과는 다르게 마구 흘러가 버리는 공사판에 대한 한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어떤 구조 변경이나 어떤 자재변경은 처음에는 별거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점점 커져서 집 전체를 지배하는 꼴이 되고 나중에는 어떻게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화장실의 위치나 크기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꾸 자꾸 디자인을 바꾸다가 보면 화장실때문에 집이 다 바뀌어 버리는 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자기가 꿈꾸는 집을 짓고자 했던 건축주는 어느 새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시공하는 사람과 너무 많이 싸워서 공사가 중단된다던가 건축비가 한정없이 더 들어가게 된다던가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건축주는 어쩌면 집짓기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집에 대해 이게 좋다던가 저런게 당연하다던가하는 생각은 실은 아주 많은 기본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의견들을 내서 합칠 때에는 처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그 기본 가정들이 충돌하기 된다. 이런 일들은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 한 사람이 집에 대한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가진 기본 가정들은 종종 상호 모순되어 충돌하고 만다. 그 기본가정들은 사람들에게는 상식이므로 이런 상식의 충돌은 수정하기가 너무 어렵다. 아니 집을 한채 짓는 정도의 기간에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모든 집들은 사실 짓다가 적당히 중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잘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서로 아귀가 맞질 않는데 해결이 안되니까 적당히 봉합한 것이다. 

 

전주에 있는 우리 집 가까이에는 단독주택으로 이뤄진 농소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나는 종종 이 마을을 산책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면 나는 집은 왜 저렇게 생겨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빠져든다. 예를 들어 내가 산책하는 농소마을에 있는 이 집을 보자.

 

 

 

이 집은 멋진 집이지만 여전히 네모난 상자에 구멍을 뚫어서 창을 낸 형태라는 점에서 커다란 아파트와 별반 다를 게 없이 생겼다. 그런데 집은 왜 이렇게 생겨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자기 집이 왜 이렇게 생겨야 하는지 정말 알고 지은 것일까? 그냥 남들이 이렇게 지으니까 이렇게 지은 것아닐까? 

 

농소마을의 집들은 하나같이 양옥집들이다. 그리고 그 집들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벤치나 테이블을 내다놓은 집이 많다. 사진을 찍어 놓으면 아주 멋지지만 사실 깊은 그늘이 없을 때 야외 공간은 한국에서 거의 실용성이 없다. 겨울에는 추워서 안나가고 여름에는 파라솔 그늘정도로는 더위를 막기 힘들다. 날씨가 보다 온화한 유럽과는 다르다. 이때문에 한국에는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마당에는 테이블을 내놓았지만 실은 그 테이블을 전혀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또 비싼 난방비때문에 커다랗게 지은 2층 양옥 주택은 비워두고 마당의 한쪽 구석에 만든 한칸 황토구들방에 날마다 모여서 산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이번에는 소쇄원의 한옥을 한번 보자. 한옥과 위에서 보여준 양옥을 비교하면 가장 두드러진 차이중의 하나는 긴 처마와 마루다.  양옥의 경우는 한옥과 비교하면 감옥같이 답답하다. 한옥의 경우 폐쇄된 공간쪽을 집이라고 한다면 집 자체가 무척 작다. 아주 작은 집이 커다란 지붕을 뒤집어 쓰고 있는 형태다. 어찌보면 우산같다. 반면에 위에 보여준 양옥은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크게 감싸는 형태다. 지붕밑이 바로 집이라 집이 박스에 가깝다. 

 

이런 집을 보고 단순히 나는 바깥으로 공기가 통하는 쪽이 좋다던가 그 반대가 좋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 이 집은 커서 좋고 저 집은 작아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모든 문제들에는 해결책들이 있고 모든 장점들에는 댓가가 있다.  예를 들어 대청마루를 가지는 것에는 댓가가 필요하고 그 댓가에 해당하는 것과 대청마루를 가지는 것 사이의 가치판단은 또 다시 여러가지 가정에 근거한다. 

 

우리는 큰 집을 원하지만 건축비는 절약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사실 집을 크게 짓는 것은 애초에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마당에 값싼 비용으로 지을 수 있는 창고를 만들고 철마다 물건을 옮길 각오만 한다면 비싼 자재로 벽을 세우고 기초를 한 귀한 집안의 공간을 잡동사니로 채울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또 우리가 커다란 가구를 쓰지 않는다면 집은 생각보다 클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집을 짓는 비용은 생각 하나를 바꾸는 것에 따라서 휙휙 엄청나게 바뀐다.

 

집이란 비싸고 골치 아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집에 대해 좋은 답이 없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판단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왜 이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을 사기 위해 융자를 내서 빚을 갚아가는 생활이 싫은 사람들이 내놓은 답중의 하나는 타이니 하우스다. 바로 꼭 필요한 것만 가진 작은 집을 짓고 집에서 해방되자는 것이다. 

 

 

 

다른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은 쉐어하우스다. 이것은 몇명의 사람들이 집을 공유하면서 주거비를 낮추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사실 타이니 하우스는 한국이나 일본같이 인구밀도가 높고 땅값 자체가 비싼 나라에서는 비현실적이다. 쉐어하우스도 집의 구조가 어떤가에 따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간의 부딪힘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도 있다. 1인 가구가 아니라면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어떤 집은 통상의 다가구 주택과 쉐어하우스의 중간을 택한다. 공동의 공간을 많이 설정한 건물에 각자의 독립된 공간을 가지는 다가구 주택을 짓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집들에 대한 몇가지 예들에 불과하다. 집은 우리에게 던져진 풀기어려운 질문이다. 복잡한 문제이며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인데 우리는 대개 그것을 간단히 문제를 외면함으로서 대처하고 있다. 형편이 되면 되도록 유행을 따라하고 비싼 집에 산다. 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싸면 뭐가 좋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이다. 

 

집과 인생은 닮아 있다. 집은 삶의 공간이라 우리의 삶을 구체적 형태로 보여준다. 게다가 집짓기는 삶과 아주 비슷하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이라는 집의 건축주인 셈이다. 우리의 인생은 모두의 집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슬프고도 웃긴 일화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이게 당연하다 저게 당연하다라고 말하는 것에 휘둘리다보면 인생은 수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이 되는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상식, 우리의 기본 가정을 점검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일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자가 집을 짓는다고 해서 더 좋은 집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집짓기는 그와 관련된 경험과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과 기술이 철학적 반성과 만나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그 결과물은 초라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기술과 철학이 끝없이 되먹임을 주면서 서로를 바꿔가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그런 과정은 단순히 집짓기가 아니라 철학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삶에 대해서 뭔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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