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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주 생활

왜 왕은 왕처럼 살아야 할까?

by 격암(강국진) 2016. 9. 12.

16.9.12

몇일전에 전주대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의 졸업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작은 무대였지만 거기에 올려진 연산 문제적 인간이라는 공연은 결코 작지 않은 웅장한 공연이었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여러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공연을 보다 보니 저는 한가지 질문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왜 왕은 왕처럼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우리네 정서에는 이런 식의 사고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왕인데 왕 답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쫒겨난 왕이지만 연극속에서 아주 불쌍한 왕으로 그려집니다. 신하들에게 둘러 쌓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깐죽거리며 대답하는 신하들이 참 얄밉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왕답지 못하게 살고 있는 왕에 대한 동정의 수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발상을 바꾸면 이야기가 참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관료제라는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왕이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1인독재의 왕정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왕이 왕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왕이 아닌데도 분노가 터뜨려지지만 사실 나라가 법도와 철학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왕이란 존재는 미미한 역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요즘 입헌군주제를 하고 있는 영국이나 일본에서 왕들이 왜 내각의 대신들이 내앞에서 벌벌 떨지 않고 내가 맘대로 군대를 움직이거나 법을 바꿀 수 없냐고 분통을 터뜨린다고 해보십시요. 그럼 사람들은 그런 왕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친거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학의 법도를 따지는 사람들을 과거의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오늘날의 나라들에도 법률가들이 비슷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법을 들먹이고 법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그 법규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명분을 만들어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유학자들이나 요즘 법률가나 공무원들이나 하는 소리며 하는 일이며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왕과 신하들간의 혹은 신하들과 신하들간의 권력싸움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자연히 왕이 옳은가 틀린가라던가 혹은 어느 신하가 정의의 편인가를 질문하지만 진짜 질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마치 길러주고 돌봐줘야할 가축이나 아이들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왕이 이기건 신하가 이기건 주인은 왕이나 신하지 백성은 아니라는 겁니다. 왕은 백성과 대화할 방법도 의지도 없습니다. 백성이란 가축처럼 배부르면 행복한 단순한 존재로 왕쯤 되면 그들과의 대화는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자기들은 큰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종들을 부리고 사니까 그럴 수 없는 일반 국민들은 뭐가 필요할까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왕이 국민들과 소통하고 그 속에서 내가 뭘해야 할까를 찾지 않습니다. 명분은 온나라 백성들이 잘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권력다툼에 뛰어든 소수의 사람들끼리 자리 다툼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희노애락을 겪는데 그 희노애락이란 얄팍한 근거에 기반해서 나는 본래 이러저러한 사람이니 이런 저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진데서 나온 것이죠.

 

어느 나라나 권력 다툼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이건 권력다툼이다라고 직시하고 여기서 내가 뭘 얻으려고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텐데 그게 아니라 계속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인데 세상이 원래 이래서는 안되는데 같은 소리로 일관합니다. 왕뿐만 아니라 내시며 신하도 다 그렇죠. 그러다보니 극 전체를 보면 마치 허무주의에 깊게 빠진 사람의 세상 묘사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다 허망하다는 것이죠. 그냥 한판 놀았으면 그것으로 전부라는 것입니다. 백성들 대부분은 사실 당하기만 할 뿐 놀은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연산이란 특정 인물은 나름의 곡절이 있는 사람이겠지만 다른 신하들과 마찬가지로 다 무의미한 조약돌 같은 사람들일 뿐입니다. 세계를 바꾼 것은 과학자고 기술자고 상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자기연민어린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황당한 무속신앙적 믿음이나 뒤적거릴 뿐입니다. 

 

우리들은 지금도 비슷한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질없는 명분과 헛된 관념때문에 이상한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대중의 소통이고 필요라는 것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대중에 대한 건 다 알고 있으니 내가 해결하겠다는 식의 사람이 큰 목소리를 얻지 못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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