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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최선의 세계

by 격암(강국진) 2017. 1. 24.

작년에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저자 이바르 에클랑은 신이나 왕을 믿었던 과거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가능한 세계중 가장 최선의 세계라는 것을 믿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당신이 신이나 왕의 지혜를 믿는다면 신이나 왕은 우리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베풀어주고 있다고도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가능한 세계중 가장 최선의 세계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특히 진화론은 적어도 얼핏 보아 우리가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이미 가능한한 최선의 세계에 있다면 왜 진화가 있을까. 변화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초원의 침팬지보다 인간이 더 뛰어나다고 믿는다. 많은 발전이 과거이래로 있어왔다고 믿는다. 현대인들은 그 발전이라는 믿음에 중독되어 있다. 우리는 계속 발전을 위해 뛰어 왔지 않은가? 우리가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살고 있다면 과거에도 미래에도 발전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현대인의 정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살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애매한 곳이 있으며 따라서 그 답은 자명하지 않고 말하기 나름이다. 파도에 흔들리며 바다에 떠있는 배는 어떻게 보면 제자리에 서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없이 요동치고 있다. 그러니까 배가 정지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는 바다의 요동을 그저 비본질적인 잡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핵심적 운동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 또 지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태양주변을 돌고 있다. 같은 운동을 반복하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라는 가능한한 최선의 시스템에 도달한 후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변화하는 것일까? 


진화를 발전과 동일시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그냥 요동에 불과할 수 있다. 아니면 인류란 우주적 시간에서는 그저 봄에 해당하는 시간을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겨울이 오면 모든 논리는 뒤집어지고 우리가 발전이라고 생각한 것은 퇴보로 보이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말을 종종 떠올리곤한다. 그것은 작년에 읽었던 책때문도 아니고 우주적 지구적 진화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과연 더 발전하고,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인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도달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하고 반론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더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이미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도달했다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은 욕을 먹을 것이다. 나도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인들의 사고가 현재와 같다면 더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설사 뭔가 외적인 힘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같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나는 노인은 아니지만 이제 더이상 청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내가 청년이었던 시절 나는 말하자면 좀 더 간결한 사회적 정의라는 것을 믿었던 것같다. 이것은 어떤 악의 무리를 상정하고 우리 세계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은 저 악의 무리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식의 사고다. 


나는 이제 그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사람들. 거기에 이명박정권 5년을 겪고나서도 다시 박근혜를 뽑는 사람들이 다수 있는 사회는 어떤 소수의 악의 무리가 정의를 이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는 아니지 않을까?


일전에 한 무리의 노인분들과 만날 일이 있었다. 그분들은 과거에 모두 박근혜를 찍었는데 한 분을 제외하고는 (그 한분은 아직도 박근혜를 지지하고 계셨다) 다들 탄핵시국을 겪고보니 자신이 과거에 박근혜에게 속은 것같다며 매우 분해하셨다. 하지만 나로서는 박근혜가 속였다고 말하는 그 부분이 잘 공감이 되질 않았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명박도 박근혜도 그야말로 온 몸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속였다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자신에게 속은거 아닐까?


또 박근혜가 문제라고 말하는 한 할머니는 말한다. '하지만 그럼 누굴찍어 문재인?' '문재인?' 이라고 말하는 그 말속에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박근혜가 문재인보다는 훌룡하다고 믿는다는 정서가 들어난다. 나는 굳이 왜 문재인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 십중팔구 빨갱이소리가 나올 것이 뻔하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더 답답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누군가가 꼭 문재인을 찍었어야 했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누군가가 문재인에게 반대했던 이유가 워낙 황당할 것같아서 묻기가 두려웠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가 당선가능한 세계라면 그것은 그저 다양성으로 설명될 수준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에는 산불이 난다. 비록 어떤 특정한 산불은 어떤 사람의 담뱃재나 혹은 그저 자연적인 상황이 만들어 낸 특정한 불씨가 만들어 냈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 특정한 원인이 없었다면 산불이 안날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 건조한 숲에서는 결국 산불이 나고 만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산불의 본질적 원인은 그 특정한 계기 하나가 아니라 숲의 건조함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식적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 속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 역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순신과 원균을 구분 못하는 왕만 있는 나라가 외세에 고초를 겪게되는 것은 필연이지 않을까? 따라서 고통받는 그 세계가 그 나름대로 가능한한 최선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는 박근혜와 최순실때문에 혹은 이명박이라는 불티때문에 고통받지만 이런 고통은 결국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었을까?


사실 이런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계몽주의가 이런 생각과 비슷하다. 이에 따르면 세상의 고통은 무지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진실을 알려야 하고 그 진실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때 세상은 발전할 수 있다. 즉 진리의 발견 이상으로 그 진리를 퍼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진실을 퍼뜨려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 진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세상은 좋아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진실이 퍼지지않고 소수의 사람만이 진실을 아는 상황에서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진실을 알린다는 지점에서 이 단순하게 서술된 계몽주의에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이 단순한 계몽주의는 사실들을 알리면 그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패러다임, 같은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단순해서 전달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어떤 진실만 제공되면 그것을 인식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다. 어떤 의미로 어린 아이에게 산처럼 책을 주기만 하면 이제 그 아이는 석학이 될 것이 틀림없다는 식이다. 아이의 관심과 능력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교를 만들고 방송국이나 언론사를 만들어 대중에게 알리면 세상은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투명하기만 하면 세상은 좋아진다. 마치 과학처럼 진리란 객관적인 것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쪽의 주관성과 인식능력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다. 공장처럼 거대한 학교를 세우고 큰 방송국을 세우면 훌룡한 시민들이 대량생산되어 나올 수 있을 것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다치고 과연 미국이 불투명해서 부시나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가?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해 준다는 인터넷이 오히려 가짜 뉴스를 만들어 트럼프 당선을 도왔다 같은 말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정보의 양만이 중요한가. 정보의 분석, 정보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문맥의 발견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 문맥도 같이 제공만 하면 척척 수용이 되나? 인간의 성장과 변화가 언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너무 작은거 아닌가?


단순히 정보의 양이 정의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이 계몽주의를 단순한 계몽주의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우리가 수도승이나 조선의 선비를 생각해 보면 이 단순한 계몽주의의 특성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도승이나 선비는 자기 수양을 강조했는데 이 수양이란 세계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므로 이야기가 좀 다르다. 진리란 책을 펴면 객관적으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어렵게 깨달아서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이며 종종 언어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진리란 결코 간단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꼭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 가에 따라 그것은 지옥이 될 수도 있고 극락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더 많은 정보 이전에 그 정보를 읽고 해석하는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참선같이 제자리에 앉아만 있는 행위는 정보의 전달이 곧 정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장 바보같은 일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외워야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을 것이다. 


수도승이나 선비의 태도를 우리는 자기수양적 접근이라고 부르기로 해보자. 나는 단순한 계몽주의에서 장점을 보지만 또 그 한계를 본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수양적 접근에 장점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 수양적 접근만으로는 우리는 자기 안에 갇히게 된다. 특히 현대사회처럼 복잡한 환경속에서 자기만 쳐다보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명백하다.  이런 한계앞에서 우리는 자기를 잘 정리하고 또 많은 지식을 배우기도 한다는 이상을 세우기는 쉽지만 이것도 답이 되기 어렵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대개 너무 바쁘고 세상은 날로 복잡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자기를 포기하면 뭐가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현대인의 상황이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책 교육의 목적에서 교육은 3단계의 순서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로맨스, 세밀화 그리고 일반화의 단계다. 사람들은 흔히 교육이란 정보를 축적하는 세밀화의 단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새로운 영역에 눈뜨는 로맨스의 단계와 축적된 정보를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정리하는 일반화의 단계가 있어야 하며 이 3단계가 반복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육에 구조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는 사회안에서도 인간의 변화와 적응을 이끌어 낼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단순한 계몽주의와 자기수양적 접근, 양쪽의 한계를 모두 극복하는 것은 아마도 망의 건설일 것이다. 즉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망이 필요하다. 그 망은 단순한 계몽주의에서 상상하는 것처럼 중앙에서 뻣어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연결되는 단순망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많은 지역적 중심을 가지면서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망이다. 이 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망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가진 존재가 주변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망이다. 따라서 그 극한에 있어서 이것은 자기수양적 접근이 된다. 


즉 우리는 중앙에서 깔때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객관적 진실을 퍼붓는 망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자신의 관점과 의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는 망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보의 망인 동시에 물자와 소통의 망으로서 작게는 가정을 꾸미고 친구들의 모임을 만들고 같이 공부하는 독서토론회를 만들거나 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는 것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믿을 것인가,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답은 없다. 모두가 각자 자기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이 망의 건설도 이미 세상에서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SNS처럼 블로그처럼 개인 방송에 해당하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런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의 형편에 맞게 세상에 연결되는 것이다. 


기술의 도움도 중요하다. SNS는 인터넷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머지 않은 장래에 인공지능이 이 망의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알파고나 왓슨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 답을 찾는 보편적 인공지능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는 보다 개인화된 인공지능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관점과 취향 그리고 이익과 관련된 정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설명하는 인공지능이다. 미래에 우리는 그런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고 그 인공지능과 더불어 일을 처리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미래의 일만도 아니고 이런 개인화된 인공지능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친구나 가족같은 우리의 지인은 우리의 지능의 일부로 우리의 연결망속에서 인공지능과 비슷한 일을 한다. 나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내 친구나 가족의 추천이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알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소중하다는 이유가 크다.  


망의 건설이란 반드시 우리가 수만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몇명의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다고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거기에는 어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성공의 기준이 없다. 있다면 두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우리 하나하나가 행복할 것이고 또하나는 우리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에서 성공하고 있다면 깊은 숲속에서 혼자 살건 수천만의 팔로워를 가지고 세상과 떠들썩하게 어울리건 모두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이런 망을 건설하고 계속 고쳐가야 한다. 단순한 계몽주의에 저항하고 자기를 찾아야 한다. 나만 그러는게 아니라 완전히 잊혀지고 소외된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 지역공동체의 소멸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한 면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과거의 망은 거의 소멸되었는데 과거의 공동체들은 힘을 잃었는데 새로운 관계는 아직 완전히 세상을 주도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런 망의 건설에 실패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좋은 세계는 있을 수 없지 않을까. 고작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세계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가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지식이나 돈은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양적인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 총을 들려주는 것처럼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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