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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지속가능한 욜로를 위하여

by 격암(강국진) 2017. 6. 14.

2017.6.14

오늘은 길을 걷다가 보니 욜로 독서실이라는 간판이 보여서 피식 웃고 말았다. 저런 간판이 나올 정도로 요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이 유행인가 보다. 어떻게 보면 오늘을 살자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같은 메세지가 다시 반복되고 있을 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유행이 다시 돌아올 정도로 욜로라는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요즘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욜로라는 말의 유행은 두가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현실은 그와 반대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우리는 오직 한번 살 뿐이라는 말을 상식으로 가지고 있는 세상에 산다면 그런 말은 유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바보취급당할 뿐이다. 두번째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어는 다를지라도 비슷한 유행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욜로의 유행이 돌아왔다는 것은 단순히 욜로의 정신으로 살자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며 전에도 욜로족이 되려고 했던 사람들이 실패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쩌면 욜로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욜로란 생각따위는 하지 않고 눈앞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라이온 킹의 하쿠나 마타타식으로 말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걱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욜로를 입에 담으면서 동시에 패배의식을 느낀다. '그게 될 리가 있어?' 하는 식이다. 생각과 걱정만 많으면 행동이 없다. 하지만 생각이 없으면 대개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생각이 있는 욜로, 지속가능한 욜로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욜로족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억압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내부적으로 외부적으로 이런 저런 두려움과 이유와 의무가 부담스러운 무게로 우리를 누르면서 우리에게 말한다. 나중을 위해 살라고, 타인이나 국가를 위해 살라고. 우리의 생각은 항상 그런 압력에 의해서 왜곡되며 우리는 가볍게 살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한번 살뿐이다라는 말인 욜로는 이런 억압에 대한 우리의 반항인 셈이다. 억압에 또 지고 말 것인가? 그래봐야 우리는 오직 한번 살 뿐인데?

 

하지만 모든 억압과 제약에 대해 무조건적인 저항을 선언하는 것은 그냥 철없는 사춘기 반항이 되고 만다. 무의미한 반항은 그나마 있는 감정적, 물질적 에너지를 한번에 소모시키고 오히려 우리를 더더욱 억압에 순응하게 만들기 쉽다. 그러므로 조금 크게 보면 그건 욜로가 아니라 그 반대다. 그것은 지금의 직장에 불만이 가득한데 그 직장을 바꾸거나 다른 직장을 찾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가끔씩 술을 크게 퍼마시고 소리 좀 지르고 다시 같은 자리, 같은 삶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확실히 그것은 욜로의 반대가 아닌가. 그래봐야 우리는 오직 한번 살 뿐인데 말이다. 

 

지속가능한 욜로를 위해서 우리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한한 수명과 능력을 지닌 작은 인간일 뿐이다.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태도보다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집착이다. 적어도 그런 집착의 대부분은 자기 반성속에서 재검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떻게 살 건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억압을 통해서다.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삶을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고정해 버리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완벽히 제거하려는 노력이 치열할 수록 우리의 삶은 더 부자유스러워진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해서 안되는 일을 무수히 만들어 내게 된다. 이것은 대개의 경우 욜로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된다. 

 

게다가 이것이 지나치면 성공의 길에도 방해가 된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평지에 그은 줄 위를 태연히 걸을 수 있는 사람도 고층빌딩의 난간위를 걷기는 힘들다. 줄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공포때문에 오히려 몸이 굳어서 곧장 걸을 수 없게 된다. 결국 꼭 성공해야 겠다는 집착이 성공을 막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의 성공개념은 한계가 있으며 게다가 상당히 사회적으로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의 나라는 한정된 존재가 가지는 시각으로 성공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나는 산처럼 커다란 초컬릿이 가지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해서 평생 초컬릿 산을 만드는 것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 꼭 현명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 시각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그러니 꿈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어떤 꿈이건 그 꿈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꿈꿨던 성공은 과거의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과거의 내가 만들어 낸 감옥이다. 

 

특히 우리는 사회적으로 오랜동안 이러저러한 것이 성공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그런 개념들을 주입받고 있다. 독립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면서 꿈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남의 생각에 세뇌되어 조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밍크코트 광고에 넘어가서 밍크코트를 가지는 것을 꿈으로 삼고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밍크코트를 사겠다는 꿈에 집착해봐야 밍크코트 장사에게 조종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낭만도 아름다움도 없다. 

 

지속가능한 욜로를 위해서는 뭔가를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 댓가를 치루면서 후회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이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기의 선택을 후회하고 거기에 얽매여 부자연스럽게 산다면 욜로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살건 우리는 상상 가능한 모든 인생을 다 살아 볼 수 없고,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넓은 놀이 공원을 둘러보는 것을 상상해 보라. 당신이 만약 그 공원의 모든 곳을 둘러보겠다는 생각에만 빠져있다면 당신은 정작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놀이기구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멈추는 대신 다른 곳에 갔었더라면 더 멋진 다른 놀이기구가 있었을 거라는 후회때문이다. 인생이란 말그대로 무한대의 넓이를 가진 놀이공원에 대한 것이므로 내가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태도가 꼭 필요하다. 안 가본 놀이기구가 있는 것은 어느정도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로또당첨을 부러워하면서 내 인생을 후회해서는 안된다. 선택에는 항상 댓가가 있고 그에 따라 사라지는 기회가 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뭘 포기하게 되는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근사한 식사를 할 때는 기뻣는데 그 다음 오랜동안 그 식대때문에 후회하게 된다면 그런 교육적 체험의 결과 그 사람은 다시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후회를 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즉각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세상의 관습에 따라서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살기를 포기하고 정해진 틀로만 돌아가려고 하게 된다. 우리는 후회할 것이 두려워서 순간 순간 안전한 쪽으로만 도망치느라 인생을 자꾸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보낸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와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으니까 망해도 같이 망한다고 생각이 되서 후회를 덜하게 된다. 서로 서로 우리들의 선택이 옳으며 저기 욜로 어쩌고 하면서 혼자 튀는 사람은 저러다가 망해서 비참하게 살거야라는 말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러면 역시 튀지 않고 사는 나의 삶이 역시 답인 것같다. 그러다보면 단 한번 살뿐이라는 당신의 인생은 어느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욜로의 핵심은 자유다.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욜로족이 되기로 했다는 것은 사회적 소수파가 되기로 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어느정도의 비난과 몰이해는 감수한다는 뜻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떤 선택도 반드시 행복한 결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든 후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는 그런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후회와 두려움이 없을 때 우리의 사고는 자유로워질 것이며 우리의 욕망은 왜곡되는 일 없이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반영될 것이다. 

 

세상에는 자유로운 사람과 부자유스러운 사람 혹은 욜로족과 비욜로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이다. 욜로는 우리가 지금보다 그저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저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항상도 아니고 가끔씩 한 걸음의 용기를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 용기있는 한걸음은 단순한 반항과는 다르다. 단순한 반항은 나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망과 공포에서 나오는 반응이고 용기있는 한 걸음은 나는 그래도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하나의 의식적이고 책임감있으며 후회없는 행동이며 그런 선택은 자신의 삶을 조금씩 바꿔가거나 결정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 주기 마련이다. 

 

자유란 추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산에 오르는 것처럼 조금씩 자유로워져서 최종적 자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사실이다. 객관적으로는 같은 상황인데도 당신의 생각이 바뀌면 자유는 부자유가 되고 반대로 부자유가 자유가 되기도 한다. 당신이 어떤 이성을 만나서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욜로의 정신으로 자유로운 행동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당신이 어떤 이성에게 속아서 조종되고 있으며 따라서 당신의 자유는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의 경우처럼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속적인 욜로란 자유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깊어질 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지속가능한 욜로는 자유에 대해 지속적으로 사색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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