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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이란 말의 남용은 유감스럽다.

by 격암(강국진) 2017. 6. 21.

팟캐스트나 뉴스를 보다보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남용될 때가 자주 있는데 그러면 나는 그게 듣기가 무척 괴롭다. 내로남불이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의 줄임말로 사람들의 행동이 입장이 바뀌면 뒤집어 질 때 하는 말인데 물론 세상에는 이 말이 잘 적용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즘 뉴스들에서는 조악한 개념과 내로남불이란 말이 결합해서 무식한 결론이 나오는 일이 워낙 많은 것같다. 


조악한 개념이란 세세하게 다른 것은 따지지 않고 크게 크게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교통신호 위반자나 살인자나 모두 범법자로 말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런 조악한 분류와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결합하고 그것들을 선택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게 멋대로 적용하면 말도 안되는 것들이 맞는 말처럼 된다.


요즘 내각임명을 두고 자주 표절에 대한 말들이 나왔다. 그리고는 여러 사람들을 단순하게 논문표절자라고 딱지를 붙였다. 그리고 나서 기자들이나 야당의원들은 과거에 논문표절자라고 불리던 사람들과 그들을 다 똑같이 취급하면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한다. 그러나 표절이라는 것은 어디서 부터 어디가 표절인지가 애매한 경우도 많다. 게다가 설사 표절로 분류되더라도 이것이 교통신호 위반 수준인지 아니면 살인 수준인지 그 정도가 크게 다른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전에 전여옥이 일본은 없다에 대한 표절시비로 재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고소인의 주장에 따르면 전여옥은 남의 책을 거의 베끼다시피해서는 미리 출판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디어에서 자세한 사례에 이르기까지 책의 내용을 훔쳤다고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표절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진짜로 도둑질이다. 


그런데 요즘 흘러나오는 표절사례들에서는 누군가의 표현을 그대로 썼는데 거기에 인용 표시를 안했다던가 심지어 자기 박사 논문에 쓴 내용을 학술지에 출판했다는 사례도 있다. 누군가의 책이나 논문에 나오는 내용을 쓰면서 인용표시를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게 정확히 그 논문이나 책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대단한 일일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 논문에서 그 부분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부분이라면 즉 그 논문에서 말하는 새로운 내용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 실은 이미 출판된 남의 논문을 그냥 쓴 것이었고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완전히 학술적 도둑질이 된다. 하지만 논문에는 그런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부분을 빼도 전체적인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부분도 많다.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무단횡단했다고 감옥에 가둬버리는 것처럼 과한 일이 될 수 있다. 하물며 박사 논문으로 제출한 내용을 학술지에 출판한 것을 두고 표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술적 관행으로 보아서 말도 안되는 일인 것이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대학원 경험이 없으므로 일의 경중을 잘 알지 못하거나 내 일이 아니니까 자세히 따져볼 관심이 없다. 그런 틈을 타서 누군가의 일을 표절이라고 딱지 붙인 후에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변명의 기회조차 차단해 버리는 것은 무식하고 비합리적인 일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등장하면 불법은 불법이라도 나는 교통신호 위반이고 저쪽은 살인이다라고 따지는 행위가 구질 구질한 변명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는 것이 왜 불필요한 일인가. 왜 세상이 백과 흑이 아니라 실은 대부분 회색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구차한 변명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되는 핵심적 이유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 지고 있다.


위장전입의 문제도 그렇다. 평생 위장전입을 한 번도 해볼 일이 없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위장전입을 한 사람들이 모두 다 똑같아 보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위장전입이라는 것을 살다보면 자연스레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나처럼 그리고 강경화 장관처럼 외국 생활을 오래 했던 사람들은 한국에 주소가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자기 주소를 편한 곳에 얹어두곤 하는 것이다. 편의를 위해서 법을 어겼다지만 그걸로 무슨 큰 이득을 얻었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대다수 외국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 한번 쯤은 위장전입을 한 경력이 있다고 판정될 것이다. 


그래서 위장전입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하는 의도가 진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현실이 아니라 법으로 따지면 위장전입은 불법이다. 바로 이 말을 근거로 모든 위장전입 경력이 있는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부르고 다시 내로남불이란 말로 그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구차하게 보이게 만드는 일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요즘에는 나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그 정도로 이 말이 짜증 스럽다. 사람들이 미치는 것에는 적어도 세가지나 되는 이유가 있으니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사실 고의로 미친 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에서 그리고 여러 언론에서 내로남불운운하면서 떠드는 사람들이 입장이 바뀌면 논조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떠들다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인 척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거야 말로 얼마전에 있었던 일을 고의로 기억하지 못하는 척, 미친 척하는 것이 아니면 뭔가. 


둘째로 우리들은 말장난을 잘하고 개념적 혼돈을 일부러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의 재능을 지식인의 재능이라고 칭찬하기 조차 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디서 이종격투기하듯 말싸움을 하는 것을 토론이라고 부르면서 그런 말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을 논객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그런 말싸움을 잘하는 것도 물론 한가지 재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성을 측정하는 아마도 가장 좋지 못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 토론은 여러가지 이유로 망가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한쪽 사람이 고의로 개념적 혼돈을 만들어 내거나 실제로 내부적으로 개념이 엉망진창으로 얽혀있어서 대화가 안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런 토론은 마치 원숭이와 사람이 서로 고함을 지르다가 지쳐버린 인간이 입을 닫으면 원숭이가 자신이 토론에 이겼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원숭이를 인간보다 더 우수한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고함을 지르는 것에서는 원숭이가 사람보다 훌룡할 수 있는 것처럼 대개 무식하고 둔감한 쪽이 뻔뻔하고 참을성이 좋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한국 사회가 가진 내적인 혼돈이다. 즉 한국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리고 그 무지는 단순히 누군가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외우는 정도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어로 데모크라쉬를 민주주의로 이코노미를 경제로 말한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은 다 서양것들이다. 그것을 주로 일본인들이 번역한 말들로 우리는 개념들을 잡아왔고 이후에 여러 번역자들이 조잡하게 번역한 책들로 그 개념을 다듬었다. 한국의 학문적 수준도 그렇지만 번역작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무 낮아서 한국에서 대충 번역한 책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로 뭔가를 안다고 할 정도가 되려면 그것은 우리의 체험에 기반하고 우리의 고민과 철학적 정리에 근거한 개념들로 대화를 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에서 일제식민지시대로 그리고 해방으로 이어진 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체험도 빈약했지만 우리의 상식을 충분히 잘 정리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조상의 글을 읽지 못한다. 그것은 대개 한문으로 써져 있고 우리가 유학에 대한 반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의 지혜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조선최고의 유학자라는 이이나 이황에게서 배운 것보다는 데카르트나 플라톤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 요즘 지식인들이다. 게다가 외국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 사회의 경험의 축적도 부족하고 그것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는 사람은 남의 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난맥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국의 학술용어다. 한국의 학술용어 전문용어는 잘 쓰지도 않는 한문들천지다. 영어를 그대로 쓰자니 곤란하고 한문들로 어설프게 만드니 도무지 알수가 없어서 영어보다도 더 어렵다. 이것이 학술용어들이라고 해서 일반인들과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학술용어도 결국 널리 쓰이게 되면 그것이 일반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섬세하고 더 정확한 의미를 가진 새로운 개념들을 가르키는 단어들이 더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는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이 대중에게 퍼져나가게 되는 것은 말이 발달하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과정이 작동 못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이 조악한 개념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 사회는 고의로 합리적인 행동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애초에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지가 않다. 그 틈을 파고들어서 사이비종교같은 것이 번성하고 있다. 종교만 그런게 아니라 정치도 사이비종교같은 모습인 경우가 많다. 언론도 정치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가 이런 것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한글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한국의 대중들은 어떤 다른 외국의 대중들보다도 더 지성적이다.  스스로 질서를 지키며 평화롭게 촛불시위를 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국회의원들이나 교수, 언론의 수준은 아주 형편없어서 이 나라에 없는 문제를 그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도 그들의 도덕적 타락이외에 앞에서 말한 개념적 혼돈이 그 근원적 이유가 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가진 진정한 지식인이 드물다. 그들은 또한 소통을 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누가 사과 하나를 파는데 사는 사람은 2천원이라고 하는데 파는 사람은 1억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기자가 끼어들어서는 중도를 주장하면서 적당히 5천만원에 사라고 하면 기가 막힐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이런 기계적 중립과 앞에서 말한 내로남불같은 논리들로 뒤범벅이 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러면 합리성이라던가 정의따위는 순식간에 알 수 없는 것이 되버리고 만다. 티비 방송만 보고 있으면 이 나라의 배운 사람들, 교수, 기자, 판검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 나라에서 합리성은 촛불시위같은 거리의 대중에 의해서만 겨우 겨우 지켜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방송에서 내로남불이란 말이 나오면 괴롭다. 진짜로 소통이 가능한 세상, 최소한의 합리성은 지켜지는 것같은 세상은 언제나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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