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여교사 어떻게 봐야 하나

by 격암(강국진) 2017. 8. 30.

연합뉴스의 기사에는 이런 것이 있다.  "여교사가 초교생과 수차례 성관계. 좋아서 그랬다." 이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는 당연히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어제 오늘 포털의 가장 주목받는 몇몇 기사들도 이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그 중 하나의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 스스로 주부라고 밝힌 한 여성은 이런 지적을 한다. 왜 이것이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여교사 사건이 아니고 여교사의 성관계 사건이냐는 것이다. 이 글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이 되었는데 이 것은 시민들의 집단적 지성이 상당수 언론사의 관점보다 지적으로건 윤리적으로건 훨씬 더 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사실 매우 충격적인 것이며 상당한 파장을 그 피해자는 물론 한국사회에 남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것을 깊은 고민없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하는 언론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말과 관점의 선택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그 초등학생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사건을 여교사와 초등생의 치정사건쯤으로 보도하고 낙인찍는 경우 그 초등학생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지게 된다. 사랑은 본인의 선택이니까 말이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인 초등학생에게 나누어지게 만드는 관점은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 것인가. 앞으로 그 아이가 어딜 가건 '제가 걔래'식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우리는 삐뚤어진 여교사의 행위로 일어난 일에 대해 초등학생에게 이런 부담을 지워야 할까? 너는 성폭행당한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가 모두 경악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고? 이건 성폭행당한 여자에게 너도 좋았지 않았냐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이중의 폭행이다. 그런 식이라면 그 아이는 한국에서 정상적으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초등학생을 완전한 피해자로 인식하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초등학생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수 있다. 어떤 식의 믿음과 불신이 자리잡고 나면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윤리적 관행을 바꾸고 사회를 바꾼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현재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조심은 해야하지만 지나치게 문제를 보편적인 것으로 강조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필요도 있다. 그런 호들갑은 없던 문제도 만들어 낸다. 우리에게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이런 종류의 충격적 기사는 대개 후속기사들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언론사들은 비슷한 류의 사건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해 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는 금방 비슷한 사건에 대한 기사를 또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설사 그것이 오보라거나 옛날에 일어난 일을 다시 보도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기사들를 통해 이런 일이 그렇게 자주 있었던 일이냐면서 놀라게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상당부분 착시다. 어떤 희귀한 일이건 모아서 보도하면 그렇게 보이기 쉽다. 


문제는 그러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불신이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여자들을 성추행하고 성폭행하는 남성범죄자들 때문에 남성들은 이미 여러가지 불신의 피해자로 살고 있다. 남성들 중에는 소위 소아성애자도 있고 아동포르노를 즐기는 변태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든 남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심지어 한국인도 아니며 당연히 그런 극단적 성추행범은 매우 소수다.  대부분의 한국 성인남성들은 윤리적이고 법적인 테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남자들이 기본적으로 그렇다라는 믿음은 여성들에게도 중요하다. 남자를 잠재적 성추행범이나 성범죄자로 보는 시각은 남자를 억압하지만 결국 그런 불신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더 불편하게 만들기도 때문이다.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불신이 아니라 믿음에 기반하여 굴러간다. 남자에 대한 극단적 불신은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는 섬마을에서 여교사가 학부형들에게 성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섬마을 주민도 학부형들도 대부분은 성폭행범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섬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학부형이 여고사를 성폭행하는 일이 꽤 자주 있을 수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마치 학부형을 만나는 여교사는 언제나 매우 조심을 해야 하는 것처럼.  현실을 보면 한국의 학부형은 외국의 학부형보다 학교생활에 참여하는 정도가 오히려 적은 경우가 많다. 그런 현실을 개선하는데는 지나친 조심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섬마을의 삶을 더욱 나쁘게 만들기도 한다. 한 명의 흑인 범죄자나 한 명의 섬마을 범죄자가 모든 흑인과 섬마을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 


이 초등생 성폭행 사건을 여교사의 욕망의 측면에서 취급하는 관점은 성인 여성이 초등학교 남학생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계속 사람들에게 환기시켜 줄 것이다. 그런 일은 여교사들을 곤란하게 만들어 남학생 앞에서 강의를 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나아가 교육전반의 효율성을 낮추게 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물론 여러가지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겠지만 정책이나 관점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걸위해 이혼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옛날의 일인데 1993년에 나온 미세스 다웃파이어라는 영화를 보고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 영화는 이혼한 가정에 대한 것인데 주인공인 로빈 윌리엄스가 자식들이 보고 싶어서 여자 분장을 하고 자기 집에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주인공 남자와 그의 아내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끝무렵에는 결국 이혼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다시 관계가 좋아지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합치지 않고 끝난다. 이것이 당시의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나는 가정은 소중한 것이라는 메세지에만 강하게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까지 있는 부부가 사이가 서로 좋아진 후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계속 따로 살기로 결정한다는 결말이 뜻밖이었다. 그 둘은 모두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결국 이혼은 정상적인 삶의 일부이며 흔히 일어나는 선택이니까 충격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이혼을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봐서는 안된다. 두 사람 중의 어느 한쪽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도 가정은 깨어질 수 있다.


이 메세지에는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 장점은 어차피 이혼이 흔해 빠진 현실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현실을 똑바로 보고 거기에 맞춰서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단점은 이혼이나 결혼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혼이 별게 아니라면 결혼도 당연히 별게 아니다. 결혼한 상태라도 진정한 사랑을 따로 찾으면 그걸 쫓아가는 것이 옳고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깨진 가정에서 자라게 되어도 그건 이차적인 문제다. 그래도 그들은 잘 자란다. 이런 관점이 보편화 된다. 우리가 현재 사회에서 이혼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상적 행위로 인정하고 인식할 때 우리는 이혼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깨어진 가정의 아이들도 덜 상처받을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것은 깨어지는 가정을 지탱하던 힘을 약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어느 쪽도 공짜는 아니다. 효과가 있으면 댓가가 있다. 


여교사 성폭행 사건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이 여교사 성폭행사건을 특이한 미친 여자의 일탈사건으로 처리하는 경우 우리는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도 안되지만 그 여교사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상한 짓을 저지른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우리는 앞으로도 남학생들을 여교사에게 어느 정도 무방비로 방치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여교사들은 정상일꺼라 믿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나는 이 문제를 미친 여자의 일탈로 처리해야 하며 그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여자는 병에 걸린 것이다.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 정상인 여성들에게 어떤 종류의 불신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 남학생은 미친 여자를 만나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나는 언론도 이런 메세지를 보내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을 여자의 욕망이나 치정 사건으로 보도하는 황색저널의 기사는 이런 식의 관점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한다. 어떤 기사가 사회적 파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가진 보편성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기사들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모든 여자와 모든 여교사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부각하기 마련이다. 불륜남에 대한 기사들은 모든 남자들을 불륜을 저지를 준비가 된 사람들로 보이게 만든다.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한 남자들의 이야기는 모든 남자들이 그런 욕망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성별을 바꿔도 효과는 같다.


우리는 현재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고 선택이 필요하다. 여자들로 인한 성폭행이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는 전략으로 간다면 피해자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섯불리 이런 일이 아주 흔하다고 강조하고 여성들을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인식한 나머지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규칙을 만들면 그 자체가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의 반응은 결코 지나친 호들갑이어서는 안된다. 그것 자체가 불신을 통해 문제를 만들어 낸다. 


지금도 이런 선택에 저항하면서 다른 쪽으로 우리 사회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주목받기 쉬운 전략이다. 그들은 심지어 정의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실제로 진짜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본 초기의 기사들에서는 아직 성폭행이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범죄라기 보다는 포르노그래피의 관점에서 보도하는 느낌도 든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필요하다. 침묵하고 가만히 있으면 무책임한 언론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지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믿기에는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언론들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