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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언론에 대한 글

언론을 생각한다.

by 격암(강국진) 2018. 6. 5.

18.6.5

법과 언론은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둥들이다. 그것들이 비정상이면 시민들은 피곤하고 우울하게 살 수 밖에 없다. 법과 정보는 모두 권력의 핵심에 무한히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권력은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합의에서 발생한다. 법은 그 시민들의 합의를 기록한 것이고 정보는 현실을 파악해서 그 합의를 만들어 내거나 바꾸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정보의 흐름에 관여하는 언론의 활동은 권력에 아주 가깝다. 모든 정보를 조작할 수 있다면 선거같은 민주국가의 과정도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 지난 3월에는 MBC의 탐사프로그램 스트레이트에서 한국언론의 민낯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보도한 적이 있다. 장충기 전삼성사장과 언론사 간부들이 나눈 문자대화는 한국의 언론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미 기본적으로 모두 자본의 노예가 된지 오래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대화속에는 일반 시민들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언론과 대기업간의 기본적인 구분과 예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야말로 삼성에 일자리를 구하는 구직자같이 보였다. 이것은 물론 한국에서 삼성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한국사회가 보통 시민들이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아직은 훨씬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국가로서 기본이 되어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문제를 가진 것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언론은 전세계적으로 몇가지 공통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그중 하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한 것인데 이는 사진기와 화가의 관계에 비할만하다. 사진기가 출현하자 실물과 똑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란 의미를 잃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까지 보편화되자 언론은 자신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비지니스 모델을 잃는다. 그것은 기자가 일반 시민 대신에 현장에 가서 기초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한다고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은 분석의 문제는 둘째로 하고 기초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신문을 사보고 티비를 봤으며 그것에 대해서 흥쾌히 댓가를 지불했다. 또 기자는 지식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기초적인 정보는 인터넷에 넘친다. 수십년전에 미국의 대통령도 전쟁에 대한 뉴스를 CNN같은 언론사 보도를 통해 본다는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말은 그때 이미 정보의 수집과 전달 능력에 있어서 국가 정보 기관을 시장 언론기관이 능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이라면 기초적인 정보에 관한한 많은 상황들에서 트위터같은 SNS가 더 빠를 것이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큰 사고가 났을 때 그 현장에 대한 정보를 가장 먼저 제공하는 사람은 요즘은 기자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스마트폰을 가진 일반인이다. 

 

정보기술의 발달은 기자나 언론사가 해야할 역할에 대해서 허들을 훨씬 높혔다. 허술한 정보 수집이나 분석을 가지고 언론사가 기사를 쓰면 그 보다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더 그럴 듯한 분석을 하는 네티즌들의 맹공격을 받게 된다. 신차기사를 보고 어느 지역에 대한 기사를 보라. 기자보다 차에 대해 더 잘아는 네티즌이 많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기사를 고치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신문사들도 이런 환경때문에 종이신문이 연달아 폐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한가하게 정보를 수집해서 다음날이나 다음주에 왕창 찍어서 그걸 파는 식으로는 신문이나 잡지를 팔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정보의 수집과 배포가 기성언론사로부터 대중으로 중심이 옮겨졌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인 것같고 이것은 좋은 소식으로만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그것은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다. 과도기는 혼란스럽기 마련이고 고통도 많다.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했지만 그 새로운 시대에서 질서를 만들어 낼 새로운 철학과 물리적 토대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때문에 우리는 종종 언론사들과 대중들이 양편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것같은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어디에 정확히 선을 긋기는 힘들지만 이것은 부패한 언론들과 정의의 시민들이 싸우는 문제와는 좀 다르다. 이것은 기성언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의 흐름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기성언론들이 반합리적 세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아프칸 선교사건을 생각해 보자. 23명의 한국국민들이 아프칸 선교를 하겠다고 하다가 납치되어 21명이 돌아온 이 사건에서 대중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하지만 당시의 언론보도는 이런 대중의 시각을 반영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당시의 인터넷에서는 전쟁이라도 터진것처럼 언론에 대한 비난이 폭발했다. 2018년 현재에도 이 사건이나 이 비슷한 사건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대중의 요구는 항상 비슷했다. 합리적인 의심이 드니 그것을 비판하고 질문하고 파고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사들은 그걸 대개 외면했다. 

 

기성언론은 흔히 대중들의 주장을 음모론으로 말하거나 비전문가의 의견으로 폄하한다. 그런 지적이 옳은 경우도 있지만 이미 현실은 그런 지적이 옳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다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걸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김어준인데 그는 나꼼수 방송이래로 오랜동안 비언론인으로 취급당했지만 아주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결국은 지금은 기성 언론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은 라디오라는 매체를 새로 자리잡게 했다고 할 정도로 큰 인기고 팟캐스트라는 매체를 크게 인기있게 만들었다. 

 

대중의 인기가 곧 올바른 정보의 검증일 수는 없다. 하지만 뉴스의 소비자인 일반 대중 사이에는 전문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대중이 오랜간 그 정보를 들었을 때 오히려 그 전문성이 기성언론보다 뉴스공장이나 다스베이다쪽이 뛰어나다고 판단한다면 이것은 분명 의미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김어준의 방송에서 소개되고 알려진 사람들이 이제는 타 방송에서 방송을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타언론사들도 그 전문성을 인정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삼성 전화기와 동네 철물점 주인이 만든 전화기가 시장의 판정을 받았을 때 동네 철물점 주인이 이겼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 엄청난 인력과 자금력을 가지고 기성언론들은 뭘하고 있는 것일까? 기성매체들이 얼마든지 불러댈 수 있는 그 많은 전문가며 학자들은 뭘했던 것일까? 우리는 김어준같은 언론인의 인기를 단순히 의미없는 유행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성언론을 비교비판하는 재료로 쓸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합리성의 기초에 대해서 반성하는 기회로 쓸 필요가 있다. 

 

김어준은 무엇보다도 탈권위적 언행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쫄지마 씨팔이라는 욕설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김어준을 포함한 나꼼수 출연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오히려 찌질한 사람들이라고 격하하곤했다. 이것은 객관적 보도를 그 사명이라고 말하면서 엄숙한 태도를 취하고 자장면을 짜장면이라고 하는지 자장면이라고 하는지까지 신경쓰는 기성 언론인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런 차이를 통해 극명해지는 것은 누구의 입도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김어준의 방송은 이것은 김어준의 방송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다. 주어진 대본대로만 방송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요즘 방송의 대세가 된 예능 방송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계산하고 숨기고 가리지 않고 생각나는대로 떠들면서 이게 내 의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어준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방송의 편파성을 부각시킨다. 다만 그는 너희는 편파적이지 않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지금도 많은 방송들은 마치 세상에는 절대적인 정답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정교한 형식에 맞춰서 정보를 보내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에만 매달릴 뿐 그 내용을 보면 편파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매우 권력지향적이다. 사실 언론들이 엄숙한 권위주의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보수 정치세력에 대한 편파다. 

 

편파성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계적인 중립이라는 것인데 언론사 스스로는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투명한 유리인척 하면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찬반 양쪽의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가 비슷하게 보이게 되는 것을 중립이거나 공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물론 이런 기계적 중립은 진보정권때였던 김대중 노무현때에는 없었다. 노무현 정부때에는 노무현을 비판하는 것이 곧 언론사의 책무인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하에서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러면서 근엄한 행동만 보이니 대중의 언론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근엄한 행동이란 결국 권위주의의 결과다. 즉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너희와는 달리 우리는 오류가 없는 전문가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결론을 비전문가인 너희들은 그냥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판결은 판사가 한다. 모두가 다 같이 다수결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판사는 근엄한 언행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판결이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판사의 권리는 사법체계 그 자체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판사의 이러한 행동을 가식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과연 그 권위를 진심으로 인정받고 있는가? 근엄하게 진리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파업때문에 타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할 때가 있었다. 혹은 정치가로 변신해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 보면 우리는 대개 그들의 근엄이란 가식에 불과한 것을 느낀다. 그들은  자기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근엄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안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근엄한 태도로 말해도 문제없고 오히려 꼭 그렇게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같은 자명한 명제를 말하면서 자신없게 말하거나 낄낄거리며 말한다면 오히려 그게 문제일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확신하지 못할 때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전문가의 권위주의, 상명하복의 조직에서의 권위주의가 불합리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이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의견을 합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편파적이면서 편파가 아닌 것처럼 말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면서 100%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 의견이 전체의 판단을 완전히 그르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어느 건물에 불이 났다고 하자. 그런데 출구는 동쪽 아니면 서쪽이다. 우리는 어느 쪽 출구가 진짜로 열린 출구인지 몰라서 사람들의 정보를 모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두시간전에 내가 저쪽 출구로 들어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통상 저쪽 출구는 이 시간에는 열려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나는 100% 알고 있는데 동쪽이 열려있고 서쪽이 닫혀있다고 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 1%라도 자기 의견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의견은 묵살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자신이 확신한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이런 말은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두가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며 말한다고 믿는다면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독재를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게 된다. 즉 과장과 거짓말이 독재를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의 언론은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함으로써 사회의 합리성을 해치고 있다. 대중은 앞에서 말한 아프칸 선교사건같은 보도에서 이걸 느끼기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권위주의는 쓸데없이 벽을 만든다. 생물학자의 일에 물리학자는 말할 수 없다는 식이고 이사들의 일에 과장은 말을 할 수 없다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모든 일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미디어 속의 인간들을 대개 도통한 도사나 성스러운 수도자처럼 보이게 만들어 왔다. 화도 안내고 실수도 안하며 욕심도 전혀 없는 사람, 다시 말해 매우 비인간적인 사람이 아니면 매우 엄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빨간 양말을 신은 초라한 사람이 내가 거의 확신한다면서 말하는 의견은 간단히 무시되고 멋진 슈트를 입고 이력이 화려한 전문가가 나와서 나는 100% 알고 있는데 이것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그 엉터리 의견은 존중되게 된다. 엘리트 코스를 한번이라도 벗어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이러한 압력은 결국 사람들을 체제  순응적으로 만든다. 결국 모두가 죽을 폭탄의 스위치라도 위에서 누르라면 누르는 사람들이 사회를 움직여 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리성은 파괴된다.

 

10년 20년이 지나서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나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정보를 생산하고 처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연산능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이 혼란한 세상을 볼 수 있는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면 바보같은 소리로 가득찬 미디어는 지금보다 정화될 것이다. 엉터리 정보조작의 의혹을 받는 포털이나 음란한 기사들로 가득찬 신문사 홈페이지들 따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매너없는 사용자들때문에 인기게시판에 가보는 일이 고통스러워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환경속에서는 재벌들이 미디어를 장악하는 일이 보다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의 한국언론이 엉망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언론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재벌들이라서 그렇다. 저효율을 가진 큰 언론사를 운영하자면 돈을 주는 사람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광고찌라시에 가까운 것을 신문이며 방송이라고 보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과도기도 중요하다. 언론들은 두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군살을 빼고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이다. 과거의 비대한 언론사들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언론개혁일 수는 없다. 공중파의 프로그램이 유튜버에게 지고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너무 늦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고통을 당한 후일 것이다. 또하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지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심층적인 분석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즉 독립영화를 만들거나 아니면 블록버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언론은 지금 모든 시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시대에 뒤쳐져 있는데 이따금은 시민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계몽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것이 특정 기자나 언론인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언론의 반성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런 분노가 만들어 낼 폭력적 결과는 언론인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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