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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언론에 대한 글

송유근과 부끄러운 언론

by 격암(강국진) 2018. 8. 14.

오늘은 소위 천재소년 송유근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송유근이 어떻게 살 건 그것은 그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송유근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는 이것이 단순히 송유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송유근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고 언론의 인식이다. 그것이 송유근이라는 이름을 자꾸 비극에 얽히게 하는 것같다. 



언론이 송유근을 보도 하는 태도를 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로또복권당첨식의 한탕주의를 본다. 즉 학문에 있어서 발전이란 매일 매일 나무를 심고 물을 줘서 숲을 성장시키는 것과 같은 행위들의 결과가 아니라 어디선가 금이나 다이아 몬드를 줍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천재나 영웅적 리더에 대한 신화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어디선가 한명의 리더가 나타나고 그 리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인쉬타인같은 천재가 나타나서 과학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갑자기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나라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천재의 신화는 과장되어 있다. 천재는 흥미롭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천재가 시대를 만든다기 보다는 시대가 천재를 만든다. 다시 말해서 뉴튼이나 아인쉬타인도 그 시대적 배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런 업적을 낼 수 없었고 심지어 그들이 없었어도 그다지 큰 차이를 내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업적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뉴튼과 동시대에 미적분을 만들었고 갈릴레오나 케플러, 티코브라헤같은 다른 사람들이 있었기에 뉴튼도 있는 것이다. 상대성이론도 아인쉬타인이 없었다면 포앵카레같은 다른 사람이 발표했었을거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다시 말해 천재 한명 때문에 서구문화의 오늘날이 있는게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재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혹시 그런 시각이 1등이 모든 것을 독식하게 하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세뇌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된다. 즉 이것은 한국 역사와 사회의 현실이 만들어 낸 왜곡된 인식이 아닐까?


또한 이 천재소동은 이공학문에 대한 천박한 인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 두돌이 되기 전에 한글을 익힌 아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아이를 가지고 노벨 문학상을 받을 인재라고 시끄러울 것같지는 않다. 왜냐면 문학의 심오함을 생각하면 한글을 빨리 습득했다는 것으로 노벨문학상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인생에 대한 넓은 시야를 배워야 훌룡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는 한글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럼 왜 과학은 그렇게 만만하게 보는지 모르겠다.  세익스피어의 문학은 오늘날에도 위대한 문학일지 모르지만 과학은 그보다 더 잘 누적된다. 뉴튼의 과학은 오늘날에는 기초에 불과하다. 그러니 심오하기로 친다면 과학이 왜 심오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초등학교때 성적이 좋으니까 노벨상급 천재라고? 이런 소동의 뒤에는 감히 철학이나 문학이 뭔지 단언하기를 꺼리는 겸허한 자세를 가진 분들이 과학이 뭔지는 뻔히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태도를 종종 지적해 왔다. 이런 태도는 예를 들어 알파고 인공지능 소동이 있거나 닌텐도 게임기가 외국에서 잘팔린다는 소식이 있으면 태연히 우리는 왜 그런 걸 못하냐고 질책하듯 묻거나 그냥 몇십억쯤 지원해 주면 몇년안에 그런 걸 만들어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태도를 만든다. 


한국 문학을 읽는 외국인은 얼마나 있을까? 거의 없다. 이건 외국에 가서 한국문학 섹션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종종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왜 우리는 노벨상이 없냐고, 왜 이렇게 늦냐고 타박하듯이 묻는다. 인문학분야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국제적 성과를 내온 한국 과학기술계에게 그 성과에 찬탄을 금하지는 못할 망정 노벨상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묻는 것이다. 


당신이 송유근은 분명 천재다라고 믿고 있다면 그건 관련 학문을 전공하는 사람의 관점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이공계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송유근을 천재로 부르는 것을 무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기자들이 자신들이 과학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은 관련분야의 전공자들이 느끼는 공감대를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는거 아닐까? 질투나 뭘 잘모르는 낡은 시스템의 관점쯤으로? 그 결과 송유근만큼 유명한 과학계의 인물도 별로 없게 되었다. 이건 참담하다. 과학은 서커스 쇼가 아니다. 이건 마치 학자들이라면 다 지동설을 아는데 언론은 아직도 천동설이 옳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물리학은 구구단이 아니다. 물리학은 미적분도 아니다. 송유근은 인하대도 UST박사과정도 제대로 졸업하는데 실패했다. 송유근은 몇해전 영국 잡지에 실었던 논문이 표절로 지적되어 개제가 철회당한데다가 박사논문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더이상 박사 과정에 있을 수도 없는데 그것은 8년 연한을 그가 다 채웠기 때문이다. 


8년에 박사 받는 것에 실패한 사람이 천재면 3년에 박사 받는 사람은 외계의 생명체인가? 사실 그런 사람보다는 박사 졸업하기 전에 논문 5 편쯤 내는 사람이나 네이쳐, 사이언스같은 유명 저널에 논문을 내는 사람이 대학원생에게는 더 천재같아 보인다. 기존의 잣대만 옳다는 것이 아니다. 박사과정 재학연한을 8년으로 삼는 것은 괜한 기준이 아니다. 논문 한편을 쓰라는 것은 최소 규정이다. 그정도에 박사 못받을 것같으면 그만두라는 것이다. 송유근이 설사 그 규정을 지켜서 박사를 받았더라도 그 성과 자체는 나이를 제하면 평균 대학원생의 수준에도 못미친다. 그런데 송유근이 천재인가?  


송유근이 불과 10살이던 2007년에 부모는 발을 동동 굴렀다. 송유근이 혼자서 양자컴퓨팅 연구를 할 실험실을 구하지 못해서다. 그래서 결국 구한 것이 구리시 하수처리장 옆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였다. 그 컨테이너 박스 안에 뭐가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학술연구에 무지한 부모가 보이는 이런 식의 조급증에 대해 아마 학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혀를 찰 것이다. 10살짜리 아이에게 적당히 컨테이너를 구해주고 그것을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부모. 그리고 거기에서 최신 연구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는 부모. 무엇보다 이런 걸 보도하는 언론. 이건 싸구려 쇼다. 연구실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양자역학의 개척자인 하이젠베르크는 천재로 여겨질 인물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가 쓴 부분과 전체라는 책은 양자역학계의 영웅들이랄까, 천재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면서 혁명적 과학을 만들어 냈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혼자 천재는 없다는 것이고 과학을 키우는 것은 과학 공동체라는 것이다. 또한 인문계와 이공계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의 풍토와는 달리 과학과 철학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송유근을 더이상 천재로 부르지 마라. 그건 한국과학의 발전은 물론 그 송유근에게도 좋지 않다. 그냥 개인으로 살게 하라.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은 한국의 과학발전이 걱정되고 관심이 있다면 일단 자신들이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언론사 기자들은 정말 과학이 뭔지 잘 알고 있으니 당신들이 누군가를 주목받게 하고, 누군가를 냉혹하게 비판하면 한국 과학이 거기에 힘입어 발전하게 되는 걸까? 나도 그러길 바란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과 과학은 둘이 아니다. 인문적 수준이 뒤떨어지면서 과학기술만 발달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사장을 하면서 돈을 벌고 뛰어난 엔지니어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 무식한 사장에게 관리를 받고 심지어 과학이 뭔지 아냐고 조언까지 받는 그런 세상을 생각나게 한다. 아직도 한국에서 과학기술계의 인물은 조선시대의 기술자들인가? 그래서야 과학기술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될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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