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꿈
1, 나쁜 꿈 : 어두운 우물
어두운 방에서 나는 자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얼굴없는 사내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그는 이봐. 빨리 일어나. 모두가 알게 됐어라고 말한다. 나는 그를 보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있다. 어떨떨한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이게 누굴까. 뭐가 알려졌다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멍하게 있는 나를 보면서 그 얼굴없는 사내가 말한다.
사람들이 우물에서 시체를 발견했다구. 우리가 죽인 그 사람 말이야.
시체? 우리가 죽인 그 사람?
어디선가 먼데서 개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즉각 그것이 추격자의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물?
얼굴없는 사내가 말한다. 역시 넌 기억하지 못하는 군. 우린 말이야. 어릴때 관악산의 외딴 곳에서 한 사람을 죽였어. 너랑 나랑 그리고 또 한사람의 친구가. 그리고 그 시체를 쓰지 않는 우물에 던져넣고 흙을 덮었지.
그런데 그걸 내가 왜 기억못하는 걸까?
우리는 그 일을 잊어버리자고 약속했어.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고. 우린 그런 일을 한 적도 없다고. 잘 생각해 봐. 넌 그 일을 너무 잘 해낸거야. 그리고 이제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거야. 얼굴없는 사내의 얼굴부분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조금씩 또렸해지면서 눈코입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구 더라? 확실히 그의 얼굴은 눈에 익다. 조금만 더 선명해지면 알아 볼 수 있을 것같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우물이 떠오른다. 아 아 그 우물. 관악산 자락의 한 켠에 있었던 그거.
갑자기 개가 짖는 소리가 커졌다. 얼굴없는 사내는 내 손을 잡아 이끈다. 나는 추격자로 부터 피하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면서 개를 피해 달아난다. 그러나 개는 너무 빠르다. 내 뒤로 가까이 개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개의 숨결이 목뒤로 느껴지는 것같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 멱살을 잡는다. 나는 잡히고 말았다!
나는 눈을 떳다. 또 이 꿈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꿈. 몇번이나 꾼 꿈이지만 나는 꿈속에서 그게 꿈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항상 허둥지둥대고 만다. 꿈에서 깨고 나면 언제나 처럼 나는 내 방에서 자고 있으며 어디에도 얼굴없는 사내따위는 없다. 내가 이 꿈을 최고로 싫어하는 이유는 거기에 개가 나온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다. 이 꿈이 제일 기분나쁜 것은 꿈에서 깬 그 순간 때문이다. 아직 약간 멍한 그 순간. 나는 관악산의 한자락에 있던 우물이 어슴프레 기억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가 누군가를 죽였으며 오랜 시간 노력한 끝에 그 기억을 스스로에게서 지워버렸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몇초 몇십초동안 나는 정말 내가 살인자가 아닐까 하는 기분에 빠진다. 정말 거기에 우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진다. 나는 심지어 관악산에 가서 그 우물을 찾아보고 그 안에 머리를 디밀어 보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있다고 한들 찾기 힘들것이다.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꿈이 가장 기분 나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줄 알면서 자꾸 되씹어보게 되는 꿈, 나쁜 꿈이다.
2. 시시한 남자의 상처
나는 시시한 남자다. 이런 말을 자기 자신에게 되풀이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학이지만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달까. 내가 나의 시시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던 나에게도 아주 오래전에 아주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내 인생이 열어보지 않은 선물상자처럼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유명한 과학자며 철학가며 정치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나 나의 인생이라는 이 선물상자에도 그런 굉장한 것이 들어 있을까하고 꿈꾸고는 했다.
유명한 과학자며 정치가의 이야기는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나 단군신화에 나오는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들이 어떻게 뭔가를 하기로 했는가, 그들이 어떤 고난과 모험을 통과하면서 어떤 영웅적 행동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살고 죽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살고 있는 불멸의 존재였다. 그들이 남긴 업적과 그 영향력은 우리 주변에 가득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영원히 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도 그들처럼 뭔가 영원히 남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의미있는 것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곧 조금씩 조금씩 작고 시시한 것들에 의해 침식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작고 시시하긴 하지만 바로 그 시시함 때문에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들이었다. 대단한 것에 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영광된 일이니까. 예를 들어 이유없이 형이나 부모님이나 동네의 다른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놀림을 당하던 일들이 그렇다. 세상은 결코 내가 읽은 책속에 나온 것처럼 하나는 하나고 둘은 둘이 아니었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칭찬을 받는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세상에 의해 벌을 받곤 했다. 왜 형에게 맞아야 하는지, 왜 부모님이 그렇게 화를 내며 나를 때려야 했는지, 왜 내가 형편없어 보이는 동네 아이들에게 형편없는 인간으로 놀림받고 때로 협박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본래 불합리하거나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진실을 가진 곳이었다. 세상은 위인전 안에 나오는 것과는 달라보였다. 나는 그러면 그럴 수록 더욱 책에 매달려서 어떻하든 답을 찾고자 했다. 답은 있어야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세상을 말이 되는 세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답이.
그러나 사실 나를 결정적으로 상처주는 것은 이런 작고 시시한 것들이 이따금씩 반복되는 일상 자체가아니었다. 이러한 일들은 마치 흙탕물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었고 아직 어린 나는 나의 주변을 이해하고 그것과 싸울 힘이 없었다고 해도 그것들과 나를 구분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해서 비록 내가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도 내가 나쁘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틀린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마땅히 내가 싸워서 이길 어떤 상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잘못된 것이 없다고 믿고 살 수 있었다. 나는 잘못된 세상을 선악을 가르는 선의 뒤에 놓고 이쪽의 선의 세상에 여전히 나 자신을 놓을 수 있었다.
내가 만일 스스로에게서 어떤 위대함을 발견을 할 수있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단한 재능을 발견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큰 용기를 발견한다거나 하는 것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선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용사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파도처럼 나를 때리는 것이 계속 되어감에 따라. 내가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어짐에 따라, 나는 내가 그것들과 같아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무서운 아이가 있으면 눈을 내리깔고 피해가게 되었고,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도 말을 안하게 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고백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게도 되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아주 드믄 일이긴 하지만 나도 힘없고 어리버리한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를 밀치거나 험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내가 가는 길 중간에 그 아이가 서있다는 이유로 아무 죄가 없는 한 아이에게 거칠게 부딪히고는 '야 비켜'라고 말하던가 쏘아보고는 겁을 주는 표정을 지었던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곧 후회했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항상 사과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결국 항상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좋아하던 여자에게 차여서 첫번째 연애가 깨져버렸을때 나는 가슴이 아팟지만 내가 일종의 피해자라는 생각은 할 수가 있었다. 누군가를 차버리고 상처주고 하는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한 것이다. 배신은 그녀가 한 것이다. 나는 피해자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고 내가 누군가를 차버렸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저런 변명과 이유는 가져다 댈 수가 있지만 입장을 뒤집어 보면 결국 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여기저기에서 알게 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그것은 동시에 지극히 더러운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내가 겪고 억울하기도 했던 그 모든 불합리한 세상의 일들을 더이상 비난할 수 없을 것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니까. 나도 불합리하고 더럽고 치사하니까. 한마디로 나도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시시하니까.
나는 어느새 신화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위대함이 위대함일 수 있는 것은 혹시 위대함의 순수함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이나 사람들의 무감각함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더럽고 불완전한 것을 완벽하고 깨끗한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을 뿐이 아닐까. 결국 이 세상에 위대함이란 존재한 적도 없는 것 아닐까. 그건 그저 승자의 자화자찬이 아닐까.
나는 밝은 빛이 넘치는 선의 세상을 꿈꾸면서도 지저분하고 세상에 물든 나를 발견 할 수 밖에 없었고 때로는 악에 물드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도 느꼈다. 예를 들어 자위를 하는 것은 나쁘다라는 것은 세상에 나에게 준 규칙이었고 나는 그걸 지키지 못했으며 따라서 참을 성 없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규율을 깬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보다 더 심각한 규율은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규율이다. 나는 이 규율도 항상 지킨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항상 피해자는 아니었고 가해자일 때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저 시시한 일들이었지만 그게 남에게도 시시한 일이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랬듯이 사람은 아주 시시한 일에도 크게 상처입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의 악은 내가 선을 추구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로 책속에서 발견했던 위대하고 따스하고 밝은 세상을 동경하는 나의 마음은, 그렇게 되고 싶고 거기에 속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은 규칙을 만들고 악을 만들며 한편으로는 그 규칙을 깨는 쾌감을 느끼게 하고 어두운 악에 대한 동경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내가 돌을 걷어찬 날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관공서 직원이 나를 무시하듯이 대하는 성의없는 태도에 크게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길가의 돌을 걷어차고 말았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나 그 돌은 곧장 날아가서 길가는 중년의 아주머니를 때리게 된다. 평상시의 나라면 즉각 사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흥분해 있던 나머지 누구야라고 소리치는 그 아주머니를 쳐다보며 한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화가 잔뜩난 나의 얼굴이 흉폭해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당연히 그 아주머니를 불러 세워 사과를 해야했을테지만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하는 인간이라고 믿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악당이 된 기쁨이 가슴에 솟아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대단한 악당이 된 적은 없었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해도 악에 대한 동경이 가슴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때로는 이 지구따위 반으로 쪼개서 불로 태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런 폭언을 겉으로건 밖으로건 내뱉는 과정은 항상 같았다. 나는 뭔가 대단한 것이 되고 싶었다. 아니 대단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었고 대단한 것을 위해 내 삶을 불사르고 싶었다. 순수한 정의와 선을 이룩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나,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세상을 발견할 때 이젠 반대로 악으로 뛰어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로 그 건방진 공무원에 대한 미움이 결국 내가 악당이 되는 것을 즐기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 싹 다 불질러버렸으면 좋겠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시시하다. 그러나 나도 시시하다. 나도 그 시시한 세상의 분리되지 않는 일부다. 이런 저런 충돌과 퉁탕거림의 끝에서 나는 결국 연료가 다 떨어져 이미 늙어버리고 생기가 없어진 사람같은 상태가 된 것같다. 나는 이제 더이상 신화를 재미있게 읽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신앙심이 바닥이 난 것 같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내가 나와 세상의 시시함에 저항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일이 있기는 하다. 시시함에 빠져 죽기 전에 저항하는 최후의 힘없는 몸짓이랄까. 그것은 바로 시시함을 상처로 느끼고 있다는 바로 이 점이다. 나는 세상의 시시함을 바꿔보기 위해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다. 갑자기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직장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정의의 인간이 된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나와 세상의 시시함에 상처입고 그것을 의식하고 견디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에 완벽히 무감각해지는 일만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고독한 아웃사이더가 된다. 꼭 필요하지 않는다면 위선적인 말과 행동과 얼굴표정은 피하고 살며 그때문에 생기는 쓸쓸함이나 사회적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기꺼이 감수하고 산다. 사실 진짜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사막이나 산으로 가서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을, 그리고 남들은 보고 듣지 못하거나 보고 듣지 못하는 척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시시함에 익숙해 지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다. 남들이 자기의 발을 밟으면 펄펄 뛰면서, 죽일놈 살릴놈하고 흥분하면서, 자기가 남의 발을 밟을 때는 태연하게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시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쉽사리 세상은 본래 그렇고 나도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자신의 그런 현명함을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라는 말을 잘 쓴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듯이 ‘야 그건 원래 그런거야’ 하고 곧잘 말하는 것이다. 혹은 ‘이건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누가누가 말씀하신 뭐뭐뭐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들을 비웃으며 뭐든지 확실하게만 보는 그들의 시각을 자랑스러워 한다. 항상 확신에 찬 느끼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시시한 인간들이다. 눈조차 자기눈이 아니다. 입도 자기 입이 아니다. 나도 시시하지만 나는 최소한의 일관성과 감수성은 지키고 싶다.
사실 때로 그런 소시민적인 양심따위를 버려버리고 완전히 나를 시시함의 바다속으로 던져넣어 무감각해져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말이 안되고 불합리한 것은 나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어차피 난 순결하지는 않다. 사회도 그렇다. 사회도 불합리하며 사회속의 나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결국 선배들과 직장 상사들이 나에게 그렇게 했듯이 나도 젊은이들과 후배들을 알게 모르게 착취하고 이용해 먹는다. 되도록 그런 일을 안하고 싶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세상에 무죄인 인간은 하나도 없다. 노동자를 착취해서 부자가 된 사장이나 사학비리로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돈을 빨아들여 부자로 지내는 이사장의 예쁜 딸이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나는 세상의 부조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으니까. 결국 불합리한 시스템의 일부로 살면서 나는 그래도 양심적인 부속품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느날 내가 쓴 글의 일부에 나온 문장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은 착취하지 않고 남을 이용해먹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일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답을 모른다.
한계는 있지만 나는 그런게 싫어서 커다란 조직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커다란 조직이란 결국 어딘가의 누군가를 쥐어짜서 더 많은 것을 꺼집어 내기위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슈퍼에서 소고기를 사먹으면서 나는 동물을 죽이는 사람이 싫어라고 말하는 식으로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척 하면서 뭔가를 해내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이 커다란 조직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다. 거대한 권력 피라미드의 위쪽에 서는 것이 성공이라고들 대개 말하지만 피라미드란 결국 합리화, 효율화라는 이름하에 위에서 아래를 쥐어짜는 구조일 수 밖에 없다. 모두가 누군가를 쥐어짜고 누군가에게 쥐어짜진다. 누군가가 나를 쥐어짜고 내가 누군가를 쥐어짠다면 공평한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럴수도 있고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그게 세상사는 방식이라는 것을 간단히 수긍하기 어려울 뿐이다.
나는 누군가의 상사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을 확바꿔버릴 의지나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 열정에 찬 순진무구한 젊은이를 만나면 적당히 대답해 주고 조언해 준다. 때로 진지하게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해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해만 생기기 쉽다. 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나와 공유하는 것이 너무 적다. 그들은 종종 너무 많은 것을 이름만 알고 있다. 그 이름들에는 본인의 체험과 고민에서 나온 피와 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때로 남들을 경멸하기도 한다. 그들은 안다는게 뭔지도 고민해 본적이 없다. 자기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모르는 것이 뭔지 알게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지금 보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좋은 것일까. 세상은 시시하고 나도 시시하고 나는 적당히 참으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나는 죽을때까지 적당히 살아갈 수 있는것일까. 완벽한 세상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 때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가 않다.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나는 때로 내가 보다 더 혼란에 차고 보다 더 큰 분노와 욕망에 차있었던 때를 그리워 한다. 내가 아무 생각없이 신화를 믿거나 권력피라미드의 어딘가를 목표로 뛰던 때가 그리워 질 때도 있다. 왜냐면 어떤 의미로 그때 나는 더 희망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일 때 사람은 천천히 죽어간다. 그럴 때 사람은 자기 자신조차 지겨워 진다. 그런 사람은 자기 파괴적이 되기 쉽다.
나는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몇십년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뛰어난 지혜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놀라운 무감각한 능력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한번 먹어본 아이스크림은 두번째로 먹을 때는 맛이 같지 않고 천번째나 삼천번째쯤 먹을 때는 먹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겨울 수 있다. 제 아무리 첫번째 경험이 달콤했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므로 똑같은 생활을 반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그 생활에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제 아무리 대단한 권력과 화려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 변화가 없다면, 매일 매일 그 생활에 끌려다니며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면 그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 그래서는 왕도 거지의 생활을 부러워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뜻하지 않는 불확실성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온통 헝클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청년에 이를 때까지는 몸이 자라고 다른 학교에 가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변화를 만난다. 때로 대단한 성공을 하기도 하고 때로 누군가가 죽어서 상실을 경험하거나 때로 사기를 당해서, 가족 중의 누군가가 일을 만들어서, 자꾸 그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우리는 안정된 삶을 꿈꾼다. 연금을 붓고 보험을 들고 저축을 쌓아서 언젠가는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날마다 안정되게 살기를 꿈꾼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성과 싸우는 과정이다. 불확실성이 너무 커도 사람은 죽지만 불확실성이 사라져도 그래서 더이상 불확실성과 싸울 일이 없어도 사람은 죽는다. 사람들은 안정된 삶을 원하지만 변화가 없는 삶은 죽음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삶의 연료로 사용하는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변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지나지 않아 권태에 빠진다. 좋다는 곳을 여행하는 것도 맛있다는 것을 먹어보는 것도 금새 한계에 이른다. 세상이 감옥이 된다.
이런 권태중의 최고로 빠져나가기 힘든 권태는 아마도 지적인 권태나 철학적 권태일 것이다. 자기가 변화없는 자기를 지겨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조차 지겨워지게 된다. 거만하게 세상은 시시하고 나도 시시하다고 선언한 순간 삶은 막다른 골목을 만난다. 남은 삶은 변화없이 그저 견뎌내야할 시간이 될 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책들만 생각해 봐도 지적으로 권태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나 어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유럽을 가보고 미국을 가보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를 돌아다닌다면 어떤 사람은 보는 것마다 새롭다는 사실에 찬사를 보낼지 모르나 어떤 사람은 그런 여행속에서 금방 어떤 패턴을 발견한다. 그리고 번잡하게 여행을 떠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우리가 책을 보고 고대로 부터의 역사라던가, 원예나 애완동물키우기라던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논설을 읽어본다던가, 신기한 과학적 업적을 공부해 본다던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할 수는 있지만 당신이 시시한 아마추어이자 지적인 구경꾼으로 남아있는 한 그 수많은 일들은 금새 그다지 신나지 않은 일이 된다. 당신이 서울의 어디나 뉴델리의 어디, 예루살렘의 어디나 사이타마의 어디, 뉴욕의 어디 중의 하나에 거주하면서 그곳에 살고 거기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모두 관심을 가지는 그런 상태가 아니고 그저 쓱 둘러보는 관광객에 불과할 때 넓디 넓은 세계라는 것도 금새 힘들게 움직여봐야 그게 그거인 세계로 변하게 된다. 지적인 풍경이라는 것도 그렇다. 당신이 시시하지않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뭔가를 내놓을만한 사람이 아닌 그저 지적 풍경의 구경꾼일 때 그 넓디 넓다는 지적 세계도 금새 새로움을 소진하고 이걸 들춰보나 저걸 들춰보나 그저 그게 그거인 상황이 된다. 사랑하는 고향이 없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롭게 방랑할 뿐이다. 여행이 계속 될 수록 여행은 더 이상 즐겁지 않고 갈 곳이 없어진다. 새롭고 멋진 고장이라는 곳도 가보나 마나라는 생각이 든다.
실재 세계에서건 지적 세계에서건 당신이 타인으로 남아있는 한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져 있다. 세상에는 시시한 지식인이 있듯이 시시한 여행가도 있다. 그들이 여행을 하거나 책을 읽는 이유는 남에게 잘난 체를 하기 위한 것이다. 나 거기 가봤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며 시시한 여행가들은 실제로 몸을 움직이고 돈을 들여서 거기에 가봤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 특히 권위있는 여행작가나 기자들이 쓴 여행기의 조잡한 축약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가기전에 자기가 뭘 봐야 할지를 알고 있으며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그것을 자랑한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을 봐도 현실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들과 그들이 만들어 낸 가상현실 속에 있었던 것이다.
시시한 지식인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들은 종종 나는 일년에 몇권의 책을 읽는다던가 나는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그저 잘되봐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에 불과할 뿐이며 책을 읽지 않는 다는 것이 자랑할 일은 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잔뜩 읽어서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결국은 시시한 일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런 저런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은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로 치면 조연이고 음식으로 치면 장식이다. 자신이 느낀 것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장식하고 돕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이미 뭘 느낀다는 능력자체를 이해하질 못한다. 그들은 영혼없는 관광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광대한 지식의 세계도 진정한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에서는 금방 소진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과학자와 그저 대중과학잡지를 구독하는 아마추어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중과학잡지를 백년을 읽어도, 수학을 공부하는 일없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개론서를 백년을 읽어도, 직업이 과학자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경지에 도달해도, 아마추어는 과학자가 되지 않는다. 자기를 던져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경꾼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과학을 만드는 사람이다. 미술평론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예술가가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 좋은 고전 한권만 해도 적어도 한사람이 평생을 고민한 내용이 들어있거나 어떤 때는 수백 수천년간의 고민이 집약되어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느끼지 않으면서 다 읽고 외운다는 것은 엉터리 여행가가 세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한국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전세계를 본 사람보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고향의 뒷산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나도 시시하고 세상도 시시하다는 철학은 어떤 경로를 통해 거기에 도달했건, 내가 제 아무리 절대적으로 옳건간에 지적으로는 막다른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자기 완결적이며 변화없고 열정없는 감옥이다. 그러므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 날이 계속 되어 감에 따라 삶에서는 긴장감이 점점 올라가게 된다. 나는 나자신이 지겨워지게 되고 너무나도 예측가능한 미래에 화가 나게 된다. 뻔한 말, 뻔한 대답, 뻔한 핑게, 뻔한 위선에 지겨워지게 된다. 삶은 하나의 감옥이 되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떤 파국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 파국이 죽음이 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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