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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7-8

by 격암(강국진) 2018.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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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

 

 

7. 일본의 초등학교

 

5층에서 창밖을 쳐다본다. 내가 방금 지나온 운동장이 보인다.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강해지고 있는 나의 능력과 내게 생긴 변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구 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었다. 괴질에 걸린 사람들을 그들이 죽기 전에 그 장소에서 끌고 나오면 어떨까. 그러면 그들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사실을 누구와 상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이제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마치 슈퍼맨 같다. 

 

슈퍼맨?

 

그러고 보니 문득 나는 내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바닥에 정신을 집중해 본다. 몸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할 것같다. 조금만 더 집중하면 드디어 나는 날 수 있게 되는 걸까? 커다란 창문의 창턱을 나는 바라다본다. 이곳에 올라서면 좀 더 집중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용기를 내서 뛰면 나는 떨어져 내리는 대신에 하늘을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실패하면 죽는다. 하지만 실패할 것 같지 않다. 설사 떨어진다고 해도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는 몸이라면 그저 바닥에 좀 구르는 정도 일 것이다. 모든 일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나는 내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창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여기서 한번 해볼까? 

 

안녕하세요. 

 

그 순간 내가 대기하면서 기다리던 사치코 선생님이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키작은 여자 선생님인 사치코는 아직 젊어서인지 근엄한 선생님 느낌이라기보다는 괴짜 여대생 같은 느낌이다. 여차하면 귀여운 표정이라도 지으면서 매달릴 여동생 같다.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면 일본 여자들은 워낙 귀여운 이미지에 집착이 심한 경우가 많다. 염색한 머리며 반짝이는 화장도 왠지 내가 생각하는 근엄한 선생님 이미지하고는 거리가 좀 있다. 이래 가지고 아이들 앞에서 권위가 설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오늘의 행사는 내가 미국출장을 다녀오기 훨씬 전에 그러니까 이미 반년 전에 결정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부모들 중에 몇 명을 불러다가 학급에서 아이들에게 강연을 하게 하는 일을 하곤 했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행사 일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된다. 일본 사람들은 예측 가능하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학교에서는 물론 아직 내가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메세지가 온 걸 보니 그들은 아내와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지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난주에 딸아이가 병가를 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정을 사실대로 말하고 그 행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이번에도 거짓이 진실보다 훨씬 간단하다. 다시 말해 그냥 한 시간 정도 아무 이야기나 하고 오는 게 훨씬 더 간단할 것이다. 하나둘씩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다간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래서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건강이 문제라면 어떤 문제인가 같은 질문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잘못이 없는 아이들의 행사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사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그런 질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예정된 시간에 와서 예정된 강의를 하는 것이 더 쉬웠다. 

 

동경의 옆에 붙어있는 사이타마 지역의 한 공립학교인 이곳은 세계적인 부자나라인 일본의 학교라고 하기엔 초라해 보인다. 건물은 얇은 벽으로 되어 있어서 언뜻보면 가건물처럼 보인다. 이건 아마 일본에 지진이 많아서 일까. 잔돌이 많은 흙으로 된 운동장은 딱딱하고 거칠다. 저 운동장을 일본아이들은 해마다 하는 운동회 때마다 맨발로 뛰어다닌다. 시험 삼아 나도 맨발로 걸어봤는데 꽤 아팠다. 정규 체육시간이면 물론 맨발로 수업을 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수업을 한다. 한국보다야 약간 더 따뜻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겨울이면 눈도 오고 서리도 끼는 등 추울 때는 추운데도 그런다. 일본에서는 겨울철에 거리를 오갈 때면 어른들은 두꺼운 오리털 파커 같은 것을 입고 다니는 날씨에도 맨다리를 다 내놓고 다니는 어린애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겨울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은 불가사의 한 온도감각을 보여준다. 일본에는 젊은 아가씨들 이외에도 어린 초등학생들이 그런 불가사의한 참을성을 보여준다. 

 

건물에 들어서니까 정면에 이 초등학교의 세가지 교육목표가 쓰여있었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건물 복도를 걸어 내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학급으로 들어서면 교실 앞쪽의 칠판 위에 다시 그 학년의 교육목표가 세 가지 쓰여있는 액자와 이 학급의 교육목표가 세 가지 쓰여있는 액자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교육 목표라는 것을 이렇게 단계별로 세 가지씩 각자 정하고 액자로 걸어놓는 것도 좀 이상해 보이지만 특히 눈에 두드러졌던 것은 그 세 가지 목표 중의 하나가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는 이 학교의 교육목표 중의 하나이며 학년의 교육목표 중의 하나고 학급의 교육목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같은 목표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써놓았다! 

 

친구와 사이좋게, 친구와 사이좋게. 친구와 사이좋게. 그들은 하나의 단위를 일단 이루면 그 안에서는 평등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예를 들어 모든 학생들은 평등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 그런 건 어느 나라에나 있는 당연한 덕목이지만 항상 문제는 그런 원칙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냐의 문제다. 일본의 초등학생들은 모두들 란도셀이라고 불리는 무겁고 두꺼운 가방을 메고 다닌다. 이 가방은 상상 이상으로 비싸고 굉장히 비싼 제품이 아니면 무겁기도 하다. 개구쟁이 6학년들의 가방은 넝마 같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가방을 새로 사주기 어렵다. 본래 6년 이상 쓸 것을 생각해야 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그것이 교칙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암묵적인 관습일 뿐이다. 다시 말해 교칙이 아니지만 모두 란도셀을 매고 다닌다. 그리고 이런 암묵적인 관습은 끝도 없다. 학생들의 실내화도 똑같고 심지어 공책도 연필도 똑같다. 미술용구인 조각도도 똑같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은 성문화 된 규칙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똑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분위기가 아이들로 하여금 주변의 사람들과 다른 것을 쓰는 것을 막는다. 다른 것은 나쁜 것이다. 

 

내가 이것을 지적하자 딸아이는 모두가 같은 것을 쓴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슨 소리야. 나와 에이미는 색깔이 달라!

 

같은 회사의 똑같은 조각도지만 서로 다른 4가지 색깔로 제품이 나오는데 친구와 자신은 조각도의 색이 다르다면서 모두가 같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자란 딸아이는 어느새 서로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그 정도의 폭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육의 힘이다. 다만 이게 공평한 일일까? 아니면 이건 불공평한 일인가?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학용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 잘난체하는 것은 매우 나쁘게 여겨지는 것 같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덕분에 나는 일본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우등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은 초등학교 시절 발표를 잘할 수 없었던 것이 불만이었다. 자기들은 선생님이 물어보는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기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급에는 똑똑한 아이가 있고 멍청한 아이가 있지만 똑똑한 아이가 너무 튀지 않도록 선생님은 그런 수재를 억누른다. 서로 너무 달라지는 것은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에 방해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일본 교육의 중요한 핵심중의 하나는 우리는 동료이고 따라서 누구 하나도 뒤에 홀로 남겨두지 않는다는 정신을 주입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감동스럽기도 한다. 일본의 초등학교에서 하는 운동회는 학교의 큰 행사인 동시에 지역의 큰 행사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학기 내내 많은 시간을 써서 준비를 하는데 학생 중에는 몇명인가 개인 선생님이 손을 잡고 이끌지 않으면 참여가 불가능한 학생도 있었다. 한국 같으면 분명 너는 참여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건 너를 위해서라고도 말할 테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할 테지만 사실은 전체 행사에 큰 부담이 될 것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나 남보다 좀 다르고 남보다 좀 못하면 한국 사람들은 그 사람을 쉽게 배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장애인 학생도 다른 학생과 함께 참여하게 한다. 많이 연습한 집단 행사가 엉망이 되는 한이 있어도 그렇다. 기억하는가? 우리는 친구고 누구 하나도 뒤에 홀로 남겨 둘 수는 없다. 이런 건 꽤 감동적이다. 똑똑한 학생이 앞으로 마구 뛰어 나가면 뒤쪽 아이들이 자극을 받고 따라오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식이 아니다. 동료의 생각과 행동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일본인, 다른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은 이렇게 교육 속에서 만들어진다. 

 

초등학교 교실의 복도쪽으로 난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있다. 부모님의 얼굴을 그린 것 같은데 거기서 나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모든 얼굴 그림의 구도가 똑같다. 이게 왜 이럴까. 나중에 물어보니 선생님이 도화지에 그 얼굴의 테두리를 미리 다 그려주고 아이들에게 그림을 완성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지만 미국에서 몇 년 아이를 키워본 나는 미국이라면 어디가 눈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그림을 그리는 상황이라도 아이들에게 미리 얼굴 구도를 그려놓은 도화지를 나눠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언젠가 지역의 초등학교와 중학생들이 만든 미술작품 중 우수한 것을 선택해서 전시한 전시회를 가본 적도 있었다. 아이들의 작품들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 안에서도 주제와 형식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상상력은 제약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친구와 사이좋게. 결국 일본의 학교는 매우 집단을 의식하는 사람을 키워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일본전체가 획일화된 똑같은 사람으로 채워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면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섬세하게 신경 쓰는 사람들은 주로 자기와 같은 지역공동체나 직장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즉 작은 테두리의 안쪽에서만 그렇고 그 바깥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섬세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 학교와 저 학교가 어떤 큰 차이가 있어도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중의 하나지만 여전히 쇼군 시대에 전국을 번이란 단위로 나눠서 영주님과 사무라이 농민들이 계층을 이루며 살던 시대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각 번은 기본적으로 번주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규칙이었고 따라서 이쪽 번과 저쪽 번이 다른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번주 마음이니까. 예를 들어 서양처럼 기독교라는 힘으로 전국이 뭉쳐있다거나 한국의 조선시대처럼 유교라는 관점으로 전국이 뭉쳐있다면 지역의 지배자가 그런 전국적인 규모의 원리에 반하는 일을 할 때 농민이나 하찮은 지식인이라도 지역의 지배자에게 따질 수가 있을 것이다. 영주님은 성경에 나온 말씀을 어기실 작정입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왕도 유교에 따른 예절 문제로 항상 시달려야 했다. 즉 보편원리라는 것이 일본과는 달리 있었던 것이다. 

 

불교도 있지만 일본의 전통종교는 신도다. 일본에는 어디에 가나 신사가 있고 새해가 되면 신사는 새해맞이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 신도는 어떤 지켜야 할 교리같은 것도 없고 모든 신도가 찬동하지 않아도 일부 신도들이 원하면 어느 누구나 모셔야 할 신으로 신사에 모셔질 수가 있다. 그래서 천황 같은 유명한 인물들은 물론 인도의 신들도 신사에 모셔져 있다. 예수와 부처를 나란히 놓고 같이 복을 기원하는 식이다. 교리가 없는 종교는 유교적 예절이나 논리 문제로 수백 년간 싸움이 잦았던 한국의 역사와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인들은 집단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매우 강조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다양성에 대해 기묘하리만큼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매우 전체주의적이고 집단, 공동체를 강하게 의식하지만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가 가정하는 테두리는 한국만큼 넓지는 않다. 한국인의 눈에는 일본인은 작은 집단 내부는 강하게 결속하지만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다른 집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도 이 학교 내부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똑같이이지만 다른 학교에서 전혀 다른 규칙이 지켜지고 있어도 그러려니 한다. 실제로 일본에는 굉장히 다른 학제를 실시하는 다양한 학교가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 비하면 모든 한국인은 다 똑같아야 한다는 평등의식, 평준화의식이 훨씬 강하다. 즉 우리라는 단어가 대개 한국인 전체를 더 강하게 다 포함한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 나타난 기괴한 패륜 범죄에 대해 사람들은 훨씬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작은 집단 하나하나의 내부를 보면 서로 다른 것에 대해 일본인이 훨씬 더 민감하다. 한국인들은 서로 똑같이 지내라는 압력을 싫어하고 실제로 차이가 많다. 그래서 이런 스케일에서는 한국인이 훨씬 더 개성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인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어디선가 어떤 이상한 변태범죄자나 패륜 범죄자가 나타나면 일본인의 경우 한국인에 비하면 훨씬 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우리 집단에 속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 이상한 인간들이 많다. 그런 인간이 있다는 것에 왜 내가 충격을 받아야 하는가. 물론 우리 학교나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인간이 있다면 충격을 크게 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이 작은 집단을 지킨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한국인의 행동이라면 훨씬 더 흥분한다. 그들은 저런 인간이 나타나다니 ‘한국’이 타락했다는 식으로 탄식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한국인이 ‘우리’라는 단어에 들어가 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이 펼쳐지는 테두리와 범주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한국인도 아프리카나 남미의 어느나라에서 패륜적 범죄가 일어났다는 것에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다. 그곳은 ‘우리’의 범주를 넘어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일본은 작게 보면 아주 균일하고 크게 보면 한국보다 더 다양성이 크다. 한국은 작게 보면 개성이 넘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전국 어디나 비슷해서 결국 국가 단위에서 보면 일본보다 다양성이 훨씬 부족해 보인다. 

 

선생님의 소개가 끝났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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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났다. 부담스런 숙제가 끝난 셈이다. 나는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교문을 나왔다. 아까 해보려던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디가 조용한 장소를 찾아야 할까? 어디가 높던가. 뛰어 보려면 높은 곳에서 뛰어야 했다. 

 

그런데 학교 바깥으로 나오는 길에 나는 언제나 낮게 들리던 배경 잡음이 조금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또 죽으려는 것일까? 그때 내 귀에는 예상치 못한 소리들이 들렸다.

 

아이. 하필이면 오늘 연구실에 안 나올 건 뭐야. 

 

이봐. 조심하고. 뒤에서 잡는 순간 차에 태우는 거야. 그 약국 모서리를 돌아서는 순간이 좋겠군. 

 

좋아. 목표물 약국쪽으로 방향을 잡았어. 차댈 준비해. 

 

갑자기 머리칼이 곤두 서는 느낌이 든다. 이건 누군가가 나를 납치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다행히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지 몰라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무선으로 통화하는 내용은 마음의 소리를 읽는 능력으로 나에게 직접 전달되고 있었다. 뒤를 흘낏 보니 모른 척하면서도 저 멀리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가 내 행동을 뒤에서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계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약국쪽으로 모퉁이를 돌 것처럼 하다가 감자기 그 앞의 건널목을 건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당황한 듯 새로 계획을 짠다. 

 

야 야 야. 방향이 다르잖아. 연구소 쪽으로 가는 거 아닌가? 

 

빨리 따라잡아!

 

나는 발 걸음을 조금씩 빠르게 하다가 건널목을 건너고 좁은 골목으로 돌아들어가는 순간 뛰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언젠가 꿨던 그 꿈이 생각났다. 다 발각 났다고 말하며 나를 골목 속으로 밀어 넣고 뛰게 만든 친구가 생각이 났다. 금세 숨이 가빠 온다. 이럴 리가 없는데. 비록 하늘을 날 수는 없을지라도 이런 가벼운 몸쯤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리게 할 수 있을 텐데. 심장이 마구 뛴다. 숨은 더욱 가빠진다. 가슴이 조여 온다. 문득 괴질 생각이 난다. 죽는 사람은 혹시 나인가? 어느 순간 눈앞이 컴컴해졌다.

 

 

8. 어린이를 위한 과학수업

 

교탁 앞에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내가 설명해 주기로 한 것은 과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기 위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다. 귀여운 아이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되도록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잠시 그 안에서 내 딸의 얼굴이 보인다는 착시를 느꼈다. 딸이 보고 싶다. 외롭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선생님에게는 우리 딸은 독감에 걸려서 요양을 위해 엄마와 친척집에 잠시 보냈다고 말해 두었다. 

 

나는 돌아서서 칠판에 한 줄의 글을 썼다.

 

과학은 친구와 하는 레고 블록 만들기이다.

 

과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만 나는 오늘 이렇게 과학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과학은 친구와 하는 레고 블록 만들기입니다. 과학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딱딱한 수식이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는 천재들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이란 애초에 친구를 만드는 일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 과학을 만드는 것이 상상하기 어려운 외계인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이나 나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천재도 알고 보면 적어도 책 속에서 그들의 친구를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물론 과학이 뭐냐 하는 것은 복잡하고 길게 여러 가지로 말할 수가 있어서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 아주 간단한 실험이나 발견은 혼자서 해낼 수가 있을 것같고 과학은 반드시 여러사람이 등장할 필요가 없을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건 비현실적인 경우고 지금 지구 위에 존재하는 과학이라는 것은 결코 그렇게 혼자서 만들어 진게 아닙니다. 따져보자면 애초에 과학을 하려면 말을 해야 하는데 말도 혼자서 만든게 아니니까요. 말을 배우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러가지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 그 지식도 결국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요. 

 

과학이란 말하자면 아주 아주 거대하게 만들어진 건물 같은 것입니다.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에 도쿄의 스카이트리나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건물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혼자서 만들 수가 없고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친구와 함께 만들자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자동차의 앞부분을 만들었고 친구는 뒷부분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게 서로 합쳐지지 않는다면 함께 만드는 게 아니죠. 그래서 표준적인 부품을 쓰는 게 중요합니다. 과학을 레고 블록 만들기라고 했는데 바로 이 레고 블록이 서로 딱 맞아떨어져야 내가 앞쪽을 만들고 친구가 뒤를 만들어도 서로 합쳐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조금씩 크기가 다른 레고 블록을 사용한다면 높이 높이 쌓아 가다 보면 느슨하게 연결된 부분이 결국 전체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우리는 뭘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과학자가 실험을 할 때는 작년에 했던 실험이 올해에 하는 실험과 같은 결과를 주게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이걸 재현성이라고 하는데요 다시 말해서 같은 조건 아래서 같은 결과가 나온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이던 프랑스 던 어디 외국에서 한 실험이 일본에서 다시 해봤더니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과학자는 일본의 과학자를 친구로 해서 같이 레고 블록 쌓기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재현성이 있는 실험들과 관찰을 통해 과학자들은 항상 시공을 초월하는 법칙을 찾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한계를 가지지 않고 옳다고 믿을 수 있는 법칙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법칙만이 과학자들에게 만족감을 줍니다. 

 

중력의 법칙 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과를 떨어뜨릴 때 뉴튼이 영국에서 그렇게 했을 때와 지금 일본에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같은 법칙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익숙해 있어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런 것이 얼마나 과학자들을 흥분시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인데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 옳은 것으로 생각되는 법칙을 알아낸다는 생각은 과학자들이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영원히 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저기 저 먼 별이나 은하계에서 화석에서나 만날 수 있는 원시인이 살던 시대에서도 다 옳은 법칙을 찾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은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보이게 만듭니다. 뉴튼의 중력 법칙을 알고 나면 이제 이 세계는 불확실하고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무서운 세계가 아니라 중력 법칙에 따라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시계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친구와 만드는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건물 같다는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친구와 만드는’이라는 부분에 집중하면 우리는 과학이란 것이 가지는 많은 특징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시간을 고려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실험을 하고 그걸 글로 써놓았는데 1년 뒤에 그걸 읽어보았더니 소리가 매우 컸다라던가 온도가 매우 뜨거웠다라던가 하는 식으로 쓰여있다면 나는 대개 그 실험을 다시 해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정확히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온도는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정확히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뭔가를 말할 때 최대한 정확히 말하는 게 필요합니다. 2층이 흔들흔들하다면 그 위에 3층을 쌓을 수는 없지요. 정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걸 믿고 다른 과학적 이론을 만들거나 다른 실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학이나 계량화라고 하는게 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주 단단하고 서로 이가 꼭 들어맞는 레고 블록이 아니면 크고 높은 건물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꼭 기억해 둬야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과학의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이라던가 논리적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리학처럼 매우 수학적으로 엄밀하고 실험도 매우 정밀하게 하는 분야에서 논리 전개를 하고 과학을 하는 방식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통 쓰는 말로 이러저러한 경우가 있는데 이러저러하다고 할 때는 대개 너무나도 확실한 자연법칙에서부터 수학공식을 풀어내는 것처럼 엄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학 같은 학문은 우울한 학문이라고 불립니다. 경제학자들은 물리문제를 푸는 것처럼 경제문제를 수학적으로 풀어 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다 들어맞지 않습니다. 경제학은 그나마 계량화가 많이 되어 있는 학문이지만 역사나 사회학으로 가면 더더욱 논리의 단계  단계를 이루는 블록들이 엄밀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누가 역사적 법칙을 말하면서 왜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살게 되었는가에 대해 제 아무리 멋지게 설명을 했더라도 그 설명이 길고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그런 설명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제 아무리 다른 방도가 없어 보이는 완벽한 설명이라도 그런 설명은 엄밀한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것에는 예술도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과 예술 사이에 선을 하나 긋는다면 과학 쪽의 맨 끝에는 이론물리학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나 사회과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른 학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론물리학보다는 어느 정도 예술 쪽으로 더 가깝게 놓아야 합니다. 역사는 물론 사실에 기반하여 쓰는 것이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역사학자가 그린 그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리면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죠. 

 

과학이라는 레고 블록 만들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는 두 가지 예를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원자론이고 또 하나는 신경세포 이야기입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던 파인만은 그가 물리학 강의를 하면서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 세상의 물질들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원자라는 것은 영어로 아톰(atom)이라고 해서 본래 쪼개지지 않는다는 말인데요 사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요즘은 원자도 더 쪼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예가 바로 핵발전소에서 핵분열을 시켜서 에너지를 내놓는 것입니다만 실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자는 쉽게 쪼개지거나 합쳐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자의 종류도 무한대가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면 고작해야 92개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라는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일단 원자라는 레고블럭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설명 할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떤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이건 레고블럭으로 만들어진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일이 훨씬 쉬워집니다. 물건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의 수가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죠. 답을 찾기가 쉬운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고 블록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질세계의 레고 블록은 원자고 과학의 레고블럭은 말과 개념들입니다. 

 

이 세상은 원자라는 것들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 말은 그다지 대단한 발견도 아닌 것 같지만 다른 수많은 과학이론이 만들어지는 기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튼튼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원자라는 게 잘 쪼개지지 않으며 같은 종류의 원자는 기본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같다는 성질을 가진 레고 블록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들이 모여서 이뤄진 분자라는 것은 원자보다 약한 레고 블록입니다. 안정된 분자도 있지만 분자라는 건 화학반응으로 생기거나 깨지거나 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뇌과학에서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뇌는 수많은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는 것입니다.  뇌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바로 뇌과학의 원자론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 같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뇌세포들이라는 게 서로 각각 존재하는 세포인 것인지 아니면 서로 완전히 이어져서 한 덩어리를 이루는 것인지가 과학계에서 큰 논쟁거리였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뇌는 서로 소통하지만 따로따로 존재하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고 뇌를 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되었습니다. 신경세포는 서로서로 떨어져 있고 시냅스라는 곳을 통해 서로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뇌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는 말을 신경세포의 원리라고 불러 봅시다. 우리가 일단 이 원리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경세포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신경세포들은 각각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해서 뇌를 이해하려고 하게 됩니다. 허지킨과 헉슬리라는 사람들은 오징어의 뇌세포를 연구해서 뇌세포 하나가 어떻게 전기적으로 활동을 하는가를 수학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찾고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수많은 수학자들이 방정식을 써서 뇌의 활동을 설명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인간은 뇌를 전부 이해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신경세포의 원리가 뇌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레고 블록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빼뜨린 블록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뇌를 이해할 수 없겠지요. 어떻게 해도 우리는 뇌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애초에 뇌를 이렇게 레고 블록들의 합으로 생각하는 신경세포의 원리라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경세포의 원리는 우리가 뇌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가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레고 블록이 어떤게 있는가를 찾는것이고 두번째는 그 레고 블록을 어떻게 합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만들어 지는가를 알아내는 것이죠. 일단 어떤 레고블럭이 있는가를 알아낸 후에 레고블럭 만들기를 자꾸하다보면 우리의 레고블럭 만들기 솜씨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레고블럭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과학적 설명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설명들을 자꾸 시도하다 보면 그런 이론들을 점점 더 능숙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아무리 레고 블록들을 이리저리 붙여봐도 만들 수가 없는 것이 나오면 때로 우리는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레고 블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로운 블럭이 하나가 늘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의 수는 크게 늘어나지요. 때로는 우리가 전에 하나로 알고 있던 레고블럭이 사실은 쪼개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경우에도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의 가짓수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그래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원자가 사실은 부서지지 않는 게 아니라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내자 우리는 태양이 어떻게 빛을 내는지, 우주의 창조는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원자론은 원자의 구조와 안정성에 대한 이론이고 이걸 연구하다가 사람들은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과학은 친구와 하는 레고 블록놀이입니다. 친구를 사귀려면 믿음이 필요하지요. 과학에서도 엄밀한 계산이나 논리적인 사고 이상으로 믿음이 중요합니다. 과학이란 어떻게 말하면 과학 공동체라고 부르는 집단 내부의 믿음을 말합니다. 친구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매우 그럴듯한 설명 혹은 과학적 이론이 있다고 해도 사실은 그 이론을 대체할 전혀 다른 설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설명은 앞의 설명을 약간 다르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같은 세계라도 완전히 다른 설명을 가지고 설명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패러다임의 변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변환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반에 신경질을 잘 내는 A라는 한 친구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 친구는 여러분이 말을 걸면 괜히 화를 내고 짜증을 냅니다. 그럼 여러분은 저 친구는 성격이 나빠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다른 친구한테 가서 A라는 친구에 대해 물었더니 그 친구도 그렇게 말합니다. 나도 A한테 당했어라는 둥, A를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더라, A가 누구한테 물을 끼얹었어 같은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반에는 대부분의 상냥한 친구와 한 명의 성격이 나쁜 A라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여러분의 반에 대한 하나의 설명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여러분이 직접 경험한 것은 물론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도 일치합니다. 그러니 아주 훌륭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친구들을 믿고 있다면 이 설명이 틀리다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A라는 친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은 진짜 나쁘거나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A라는 친구 이외의 모든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A라는 친구는 자기에 대해 모두가 나쁘게 이야기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손가락질하는 것 때문에 늘 화가 나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다른 친구들은 A라는 친구의 말은 들어주지 않고 다른 친구들이 말하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믿고 있는 어떤 아이가 계속 A에 대한 거짓말을 해서 모두가 속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A라는 친구가 이상하다는 설명은 아주 그럴듯하니까요. 하지만 하나의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다르게 설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서 활동했던 2천 년 전의 그리스 천문학자입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 지구라고 믿었고 그가 만든 별들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은 하늘의 별들에 대한 아주 좋은 설명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 따라서 예측을 하면 별이며 달이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니 경험에 의해서 그것은 올바른 천문학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과학자들이 전혀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사실은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라던가 뉴튼의 중력 법칙 같은 것을 쓰면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에 대한 설명을 더 잘할 수 있다던가 하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 이론이 옛 이론을 완전히 대체하려면 앞에서 왕따를 당하던 A학생에 대한 설명이 그러하듯이 증거 이상으로 사람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증거도 사람들이 믿어야 힘을 발휘합니다. 관련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면 주변 사람들이 온통 옛 법칙을 믿는 상황에서 새로운 이론은 믿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 초기에는 새로운 이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어질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런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과학자들이 지금도 계속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과학자들이 아직도 설명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들도 과학적 설명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는 것뿐입니다. 

 

처음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그 이론의 반대자들은 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그걸 설명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처음에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런 질문들에 대해 모두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왜 우리는 그걸 못 느끼냐고 질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걸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증거처럼 보이게 됩니다. 반면에 오래된 이론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것에 대해서 설명들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이론을 믿는 것은 종종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이론은 나중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걸 믿게 되기 전까지는 매우 허술해 보이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매력적이지만 어떤 면에선 분명히 틀린 것같습니다. 양자역학이 처음 등장했을때도 이랬습니다. 양자역학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사실 양자역학은 지금도 기묘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자 공동체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과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과학이 레고 블록 만들기라면 3층 밑에는 2층이 있고 2층 밑에는 1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레고 블록 밑의 레고 블록으로 계속 내려가면 결국 어딘가에서는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말했던 레고 블록이 아닙니다. 과학은 오늘날 아주 엄청난 크기의 건물이 되었고 지금도 빠른 속력으로 더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학은 결국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입니다. 

 

서양의 옛날 사람들이 천문학을 공부했던 것은 배의 항해 같은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던가 이 지구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 있다던가 하는 신화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적으로 압력을 받지는 않았겠지요. 

 

과학은 근거 없는 미신을 없애주지만 과학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과학이 과학 때문에 있게 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믿음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재미있게 생각하거나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발전해 온 것입니다.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적이 아닌 것은 의미가 없어라고 해버리면 이상하게도 과학 자체가 재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과학을 하게 된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여러분이 물리학을 공부할지 뇌과학을 공부할지, 혹은 로봇을 만들거나 로켓을 만드는지 하는 것은 과학이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여러분의 마음과 믿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죠. 만약 이 세상에 과학적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다른 게 없다면 애초에 과학을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을 테니까 과학이 발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대해서 뭘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과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는 아픈 엄마를 위한 치료법을 발견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과학을 발전시켜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과학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과학을 발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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