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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11-12

by 격암(강국진) 2018. 9. 4.

나쁜 꿈

 

 

11. 아버지는 나에게 실망하지 않으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가난한 농부의 첫째 아들로 태어 났다.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소학교에 다닐 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하지만 그게 과장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공부에 얼마간의 재능이 있어서 나중에 박사학위까지 했던 것으로보아 그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그 재능이 있었다는 아버지는 소학교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었다. 누구의 판단인지 몰라도 공부같은거 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같다. 그는 중학교도 안가고 집을 떠나 타지에 가서 심부름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군대에 있을 때 운전을 배워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고향에 남아 있던 부모를 돕고 그 밑으로 주렁주렁 태어난 동생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가장역할을 해야 했다. 그는 돈을 모아서 시골에 집이며 땅을 마련해서는 그것을 아버지와 동생들에게 줬다. 취직이며 농사자금이며 시골에서는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희생과 노고덕분에 그의 동생들과 세 자식들은 모두 그와는 달리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 적어도 그보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당연히 몇줄의 글로 요약될 수 없다. 게다가 어린 내 눈에 비췄던 세상은 아무래도 많이 왜곡되었을 것이고 옛날과 지금은 무엇보다 가치관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나는 때로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과연 할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였나를 생각한다. 일찍 요절한 자식들까지 치면 할아버지의 자식은 8명이나 된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며 손자에게는 다정하셨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나로서는 가난했던 할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중학교도 보내지 못한 큰 아들에게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면 말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형이라기 보다는 아버지 같았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버지는 10대 20대부터 벌써 누군가의 아버지처럼 살아야 했다는 뜻이 된다. 이건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나는 이미 10대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사람이 되었다. 지금의 내가 10대의 어린 아버지를 상상해보면 나는 그가 너무 가엽다. 

 

아버지는 막내인 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별 이유없이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저 우연한 발병일 수 도 있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의 인생이 가혹했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 당시에는 자식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까지가 부모의 역할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아버지는 마치 꾹참고 절제하면서 융자금 할부를 갚아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막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이 풀린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자립하고 누군가를 부양하는 삶을 시작해서 막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셨을 것이다. 집안에 재산도 없고 누군가 뒷배를 봐주는 것도 아니었으며 학벌도 좋지 않았던 아버지. 그저 딸린 식구만 주렁주렁 있어서 책임질 일만 많았던 아버지. 그에게 세상은 분명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었을 것이다. 무서운 세상이 그에게 상처만 주려고 할 때 아버지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보호받고 싶었을 테고 누군가를 부양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딸린 가족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어서는 나를 보호해달라, 나를 책임지라고 외쳤으니 앞이 더욱 막막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이 포기하면 식구들이 어떻게 살지 몰라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긴장이 일단락되는 순간이 막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이라면 누구나 쓰러지지 않을까?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50대였다. 다른 사람 책임지다가 평생이 거의 다 가버린 셈이다. 

 

아버지는 말수가 많지 않으신 분이었다. 나는 어릴적에 아버지와 공놀이를 해봤다거나 어떤 게임을 같이 해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가 바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버지는 워낙 취미나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이 없는 분이셔서 같이 택시 운전을 하던 동료분들에게서도 사람이 단순하게 일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같다. 술을 드시는 모습도 별로 본 적이 없다. 바캉스니 외식이니 하는 것도 우리집에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암투병끝에 은퇴하시고 사실 때도 아버지는 그저 산책과 텔레비전 시청이 전부였다. 예외의 순간들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언제나 매우 조심스럽게 살얼음을 걷듯 절제하고 조심하며 사셨다. 나중에는 그의 아들들이 장성해서 꼭 그렇게 살 필요가 없을 때도 그러셨다. 

 

타고난 기질의 탓도 크겠지만 이것은 또한 그가 계속 무섭고 긴장되게 살아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그가 역시 가엽다. 누가 그를 부당한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을 것이며 누가 그에게 좀 더 쉽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것인가. 아버지 같은 사람의 주변에는 사기꾼들이나 말도 안되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득실댔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말 수없고 약삭빠르지 못한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으셨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는 그 빈 자리를 누구보다도 더 크게 느끼셨다. 살아생전에 나이 드신 아버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같았다. 아버지는 그저 별일없이 살면서 이것도 하지 말자 저것도 하지 말자고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되고 보니 집안의 어른이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자꾸 문제가 생긴다. 게다가 시대에도 뒤쳐져서 핸드폰이며 케이블 티비 조작도 어려울 때가 있다. 세상이 자꾸 바뀌니 지로용지로 내던 공과금을 자동이체로 낸다는 간단한 변화도 사실 노인들에게 그 일처리를 맡기면 자꾸 일이 꼬일 때가 많다. 일상이 단순해져서 쌓인 스트레스를 잡담으로 풀 상대를 구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니 집안의 노인들은 이리저리 일거리를 만들어 내기 쉽다. 망가진 형광등이나 어설픈 정수기 계약이 집안을 벌컥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같아도 특유의 절제와 조심스러움으로 집안 내의 문제를 최소화하면서 사셨는데 살아 생전에는 그것이 그리 눈에 띠지 않았다. 본래 불이 나지 않으면 소방관이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이 자꾸 나서 그 뒷처리를 하는데 고생을 해야 아 예전에는 불이 그냥 안났던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아무 것도 안하고 별일없이 사시는 것같았던 아버지지만 그것이 사실은 가족들에대한 깊은 배려였던 것이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되었고 아이를 키웠다. 그러다보니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나는 한가지 일에 대해서 새삼 신기하게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는 평생 한번도 아버지가 나에게 실망했다는 표시를 하신 적이 없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정말 그럴까 싶어서 내 기억을 뒤져 볼 때가 몇번 있었는데 정말 그런 기억이 없다. 나는 어머니에게 혼났던 기억은 많이 있지만 아버지에게는 혼났던 기억도 없다. 

 

예를 들어서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전자오락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어느날 나는 아버지의 동전통에서 동전들을 엄청나게 훔쳐서 오락을 했었다. 그런 일은 전에도 종종 있었는데 그날따라 오락하는 일에 집중하다보니 정도가 너무 심했고 게다가 나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 형도 같은 짓을 동시에 했었다. 그러니 애들 장난으로보기에 너무 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도 나를 혼냈던 것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화를 내는 표정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정말 화를 내지 않으셨다.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가 내게 화를 내지 않았었다는 것이 매우 다행한 일로 여겨진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실망했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상처입는 일을 피할 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걸 내 자랑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내가 워낙 착한 아들이고 잘난 아들이라서 아버지가 실망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뒤집어 말하고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요즘은 누구나 자식에게 실망한다. 그게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이다. 누구나 기대가 있으면 실망이 있기 마련이다. 의사나 판사 아들을 둬도 사업가로 부자가 된 아들을 둬도 교수가 된 아들을 둬도 우리는 얼마든지 자식에게 실망할 수 있다. 기대는 항상 현실보다 더 빨리 부풀어 오른다. 아인쉬타인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실망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본인의 기대로 나를 억누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아이였을 때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언제나 나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으시곤 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삶이란 밥을 먹고 있으면 그것으로 기본은 된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큰 욕심이 없으시니 실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크게 다르다. 아버지와 나의 개인차도 크지만 시대적인 환경의 차이도 크다.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욕심이 많다. 나는 인간은 최소한 이렇게는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큰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이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진로를 잘 고르기 바란다.  손바닥만한 세상에 갇혀서 그게 전부인 것처럼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일하시는 모습으로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대학입시 시절에 공부가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다. 왜냐면 내가 아무리 잠을 줄여도 아버지가 나보다 더 먼저 일을 나가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아버지가 나보다는 더 성실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이외에는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나처럼 박사학위를 가진 분은 아니셨지만 꼬마가 어른에게 배울 것이 없을 리가 없다. 사회생활을 기반으로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라도 하실 법한데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학업이건 진로건 내가 자랄 때는 다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마치 내게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식이었다. 그때는 시대가 그렇기도 했지만 우리집 분위기가 워낙 그랬다. 

 

옛날과 지금의 교육이 얼마나 다른가를 이야기할 때 내가 자주드는 예가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80년대에 나는 같은 동네에 살던 중학생의 공부를 도와주었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옛날의 나는 학원한번 안가고 과외한번 안해보고 대학입시를 준비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중학생 과외공부를 시키면서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그 과외로 돈을 벌어야 밥을 굶지 않는다는 뭐 그런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냥 이웃집 아이가 공부때문에 힘들어 한다니 고등학생인 내 아들을 보내서 과외를 시켜준다는 식이었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고 자식이 서울대 가는 것에 목숨을 거는 듯한 요즘 분위기에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학생도 부모도 요즘과는 정말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야 그렇다고 치고 우리 어머니는 무슨 배짱이었을까하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요즘의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요령을, 보다 고상하게 말하면 어떤 이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로, 학업, 연애, 취미등 여러가지에 대해서 부모들을 참 할말이 많다. 그러니까 짧게 가는 지름길이 있는데 자식이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굳이 힘든 길을 가는 경우를 보면 탄식이 나오고 실망을 하게 된다. 

 

이것은 물론 아이의 어깨를 부모의 기대로 억누르는 일이고 부모의 욕심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아이는 실망한 부모의 눈빛에 상처를 입는다. 부모도 그걸 알아서 절제를 하고 이해를 해보려고도 한다. 그래도 잘 안된다. 아이를 상처주는 일을 좋아하는 부모는 없지 않을까? 나는 내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더 상처받는다. 내가 괴롭다. 그럴 때면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는 아버지에게 고맙게 느껴지고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못난 아버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21세기 부모에게도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전보다 세상이 훨씬 더 복잡하고 빨라졌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근본적으로 좀 달라졌다. 만약에 타임머쉰이 있어서 과거의 나를 지금으로 데려와 꼭같이 자유방임으로 키웠다면 나는 엉망으로 컸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경쟁이 더 뜨거우며 아이를 도울 방법이 더 많아진 요즘은 아이들의 경쟁에 훨씬 더 부모의 영향이 크다. 그러니 부모가 도와주지 않고 너 혼자서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은 요즘은 대도시 한복판에 어린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아이들은 다 도움을 받으며 경쟁하는데 내 아이만 혼자서 해보라고 하면 늘 경쟁에 진 나머지 좌절하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관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가 관여를 하게 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대를 하고 이론을 가지게 되고 아이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된다. 아이의 뜻도 아니고 심지어 부모의 뜻도 아닐 수 있는데도 현실적으로는 부모가 아이를 항상 감시하는 것처럼 된다. 아이와 부모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지고 애정때문에 생기는 기대는 다시 실망의 눈초리가 되어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바보같은 일인 것을 누구나 알지만 자식이 그림 하나 잘 그리고 수학 시험 한번 100점 맞으면 부모의 기대는 하늘로 치솟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를 상처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옛날에는 집성촌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웃간에 더 가깝게 지내는 일이 많았다. 요즘은 자동차가 흔하고 소셜네트웍이며 쇼핑센터며 하는 것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이웃사람들과 모여서 떠드는 것이 오락이었던 시절이고 음식은 나눠먹고 장은 동네 골목가게에서 보던 시절이다. 아쉬우면 서로 부탁할 것이 많아서인지 사람들은 이웃간에 서로 간에 외면하지 않고 가깝게 지냈다.

 

한국에서는 생판 처음보는 학생이라도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학생이 그런 일을 하면 안된다고 혼내는 어른들이 가끔 있다.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어떤 때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치 부모라도 된 것처럼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지역공동체가 강했던 옛날 시절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동네 어른들이 다 부모같고 모든 아이들이 다 자식같았던 것이 그 시절이다.

 

그런 곳에서는 아이들과 부모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 아이를 풀어놓아도 부모가 걱정이 없다. 온 동네 사람이 다 친척이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밥때가 되어서 안돌아와도 어디선가 밥을 얻어먹었겠거니 한다. 핸드폰 들고 다니며 매시간 나는 어디에 있다고 부모에게 보고하는 요즘과는 상황이 다르다. 부모가 걱정을 덜하니 반대로 부모가 아이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게 되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가 있고 부모들은 부모의 세계가 있다. 자식에게 실망하지 않는 부모란 이런 시대에 있던 것이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지역공동체의 보호를 믿고 있었고 아이는 집안에서 이상으로 집바깥에서 자유롭게 컸다. 

 

요즘은 물론 이와 다르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고 적어도 미국에서도 그렇다. 미국도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소위 플레이 데이트라는 관습이 생겼다. 플레이 데이트란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만나서 아이들을 같이 놀게 해주는 약속을 하는 것을 말한다. 아이들이 노는데 사전 약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도 그 이전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그냥 골목에 풀어놓고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는 점차로 아이를 더 따라다니고 간섭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만 있다면 누굴 만나도 안심이라는 생각이 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사회적 융합이 강한 나라 다시 말해서 지역 공동체가 잘 보존된 나라다. 그래서 일본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게 미래인지 과거인지 혼란스러웠다. 21세기가 시작되던 그 무렵의 일본은 한국보다 부유한 나라라서 어떤 면에서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사는 것같은 느낌을 줬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일본사회를 20년정도 격차를 두고 따라가면서 꼭같은 사회적 변화를 겪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일본사회는 한국의 과거같다. 집도 그렇고 동네분위기도 그렇다. 무엇보다 일본 사람들은 상당히 아이들을 마을에서 풀어놓고 키운다. 

 

할아버지는 어떤 아버지 였을까?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아버지였고 나는 나의 딸에게 어떤 아버지 인가. 그 답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두 사람만 봐서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이 우산을 쓰듯이 행동들과 선택들은 모두 다가 아니라면 상당부분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게 된다. 누가 좋은 아버지 인가를 아버지가 자식에게 직접 뭘 줬는가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내가 만들어 줘야만 하는 사회적 연결, 내가 만들 수 있었으면 좋았을 사회적 연결들을 내가 충분히 만들어 주지 못했을 때 나는 공평한 아버지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준 아버지일 수는 없을 것이다. 

 

12. 교사의 설교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일본에는 선거철만 되면 서민을 위한 정치가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를 서민이라던가 지도자층이라던가 부르는 것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숨겨진 커다란 가정들이 있으며 그 같은 가정들은 실상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단순한 것으로 느끼게 하며 무엇보다 우리들에게서 어떤 책임감이라는 것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는 서민의 사정을 잘 아니 서민을 위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라고 선전하는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서민이라는 관념하나를 써서 연소득이 비슷한 엄청나게 많은 사람, 어쩌면 전국민의 3분의 2는 될것 같은 사람들을 한덩어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많은 서민 중의 하나이므로 서민을 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젊은 정치가는 젊은이를 안다고 말하고 여성 정치가는 여성을 안다고 말하며 집이 농사를 지었다는 정치가는 자신이 농민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단 한명, 자기의 자식이나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물으면 대개는 물론 자식이라고 해서 제가 모든 것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제 자식이니 어느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진짜로 솔직히 대답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자식에 대해 그들이 지금 뭘 어떻게 생각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뭘하고 싶은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사람이 태반일 것입니다. 그들은 비교적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나 가족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식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조차 다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서민이 어쩌고 하고 말하거나 농민이 어쩌고 하고 말할 때는 완전히 망각됩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아 저사람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니 서민들을 잘 알고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안다던가 모른다던가 하는 것은 결국 정도의 문제고 이것은 사소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사회적 경제적 법칙의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해보도록 해봅시다. 그리고 저는 나중에 지금은 사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서민 정치가라던가 여성을 대표하는 중의원따위의 말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로 돌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 여러가지 법칙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시장의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던가 인구론에 나오는 인구증가의 법칙 같은 것말입니다. 그리고 좀 더 옳은 경제적 사회적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까요? 망치가 혼자서 집을 짓습니까?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는 경제학의 토대를 만들었던 선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믄 희귀한 환경속에서 경제학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스피넘랜드법이라는 구호법이 있었는데 이는 모든 빈민들에게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구호법이었습니다. 빈민을 위한 구호법이라지만 실상 산업혁명이 완결되지 않았던 이 시대에 노동자계층이라는 개념은 아직 확고하지 않았고 빈민이란 귀족계층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피넘랜드법은 빈민을 구호하는 법이 아니라 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최저소득을 받고 살아가게 만드는 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법이 통하던 시대는 대부분의 국민들의 경우 일을 해봐야 노는 사람과 버는게 거의 차이가 없어서 자본을 축적한다던가 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 세상이라기 보다는 노력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국민이 그저 굶어죽지 않을만큼 먹을 것을 받고 머슴처럼 일하며 살고 귀족은 그걸 관리한다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일한만큼 노동의 댓가를 받는게 아니라 신분이 일해야 하는 의무를 주는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빈민을 도와줘봐야 인구가 늘어서 결국은 마찬가지가 된다던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 그리고 경쟁을 통해서 시장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주장은 이런 환경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즉 일하는 사람이나 게으름피우는 사람이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이나 보상이 별로 차이가 없던 환경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똑같은 양의 사료를 받아 먹고 사는 농장의 가축들처럼 살았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시장의 경쟁을 말하던 아담 스미스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일하는 사람을 대우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보상을 받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일할 의욕과 노동자의 능력을 증가시켜서 일하는 국민들이 마땅히 그들이 누릴 만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빈민이 더 많이 돈을 번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질은 좋아질 것입니다. 법칙이란 그걸 위해서 말해진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이 발달하면서 이런 경제 사회적 법칙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장님으로 만드는데 주로 쓰입니다. 그들에게 경제 사회적 법칙은 이제 자연의 법칙처럼 어길래도 어길수 없는 법칙이 되었습니다. 법칙은 이제 양심과 책임감을 외면하기 위해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경제적 법칙을 알고 있는 부자들은 이웃이 굶어죽어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많이 가지고도 남의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내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사회 경제적 법칙의 결과였습니다. 누군가가 화를 낸다고 뉴튼의 중력법칙이 깨지지 않는 것처럼 부자가 뭘 한다고 가난한 사람이 죽는 것이 멈출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학 법칙을 말하기 전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안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만 이제 산처럼 돈과 음식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부자들은 빈민들이 굶어죽어가도 그들이 임금을 더 주거나 사회적인 기부를 행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시장의 법칙의 결과일 뿐이며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은 인구를 자연스럽게 줄여서 빈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이제 경제학 법칙이나 인간의 본성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사람으로 조롱받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칼 폴라니는 사실 부자들의 논리는 커다란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자유 경쟁 시장의 법칙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은 모든 가능한 종류의 경쟁이 모두 다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굶어 죽을때는 시장의 법칙운운 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감행해서 회사가 망하게 되면 그것은 시장질서의 파괴라고 말합니다. 국가가 환률을 중앙은행에서 조절해서 물가를 조절하는데 이것도 물론 항상 서민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적어도 자유로운 경쟁에 의해 최선의 답이 나온다는 시장 법칙하고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시장이란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으며 사람들은 여러가지 법을 만들어 자유를 제약해 왔습니다. 즉 경제의 흐름은 인위적으로 선택되어 왔으며 경제라는 게임의 법칙은 계속해서 바뀌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쟁행위는 도덕적으로 비난되고 어떤 경쟁행위는 당연한 것으로 선택됩니다. 그리고 물론 그 기준은 종종 어느 쪽이 부자들에게 유리한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는 곧 국가이며 국가가 살아야 국민도 있다고 주장되면서 말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법칙이나 이와 관련된 관념에 대한 믿음이 행하는 가장 큰 일은 사람들의 양심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민이라던가 노동자 계층이라던가, 사회지도층이라던가 하는 관념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어떤 법칙, 어떤 예측, 어떤 세계를 만듭니다. 그러한 관념화와 단순화가 필요한 때가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필요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지 어떤 시스템, 어떤 법칙을 이용한 계산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종류의 관념화도 결국은 사태를 나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체불가능한 존재를 관념의 조각으로 대체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단어로 만들고 결국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법칙, 어떤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책임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관념화는 항상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더욱 탄압하고 싶어하는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겠다는 진보주의자들이 더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히도 관념화에 지나치게 빠져서 관념화자체가 인간을 말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계산, 어떤 이데올로기에 빠져듭니다. 그들은 그들의 엉성한 단어와 관념으로 자신들이 신처럼 모든 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많지만 동시에 세상에 좋은 일을 한 사람도 같이 매장해 버리는 일도 많이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깨닫게 되기나 한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가소롭게도 때로 한줌도 안되는 자기들끼리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설혹 서로 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서민이라던가 중산층이라던가 하는 단어 몇개로 세상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넓고 넓어서 어떤 의미로 도쿄의 이발사는 도쿄의 이발소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더 공부를 많이했거나 더 돈이 많거나 더 잘생기거나 더 몸이 튼튼하거나 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는 치바나 호카이도에서 이발소를 하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흔히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인지 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념의 필터로 서로를 볼 때 우리는 서로를 조악한 장난감으로 볼 뿐입니다. 그러니까 레고 블럭 장난감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서로를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보는 시각은 결국은 서로를 그렇게 취급하게 만듭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서로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때 그래서 우리가 서민이라던가 여자라던가 노동자나 지식인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하나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때 우리는 책임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카다라는 사람은 오카다라는 사람인 것이지 서류위에 씌여진 숫자 1이 아닙니다. 오카다는 태어나서 공부하고 사랑하고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무수한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살아있는 인간으로 오카다가 죽으면 그 모든 역사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카다를 알게 되면 오카다의 가치가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집에 몇송이의 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 꽃들에게 모두 이름을 붙여 불러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그 꽃들을 단순히 코스모스 5송이라던가 백합 한다발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꽃들이 모두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해마다 자살하는 학생이 천명이 있다고 할때 우리가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함부로 그저 천명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잊었던 책임감을 기억할 것입니다. 천명이 죽는대신 천한명이 죽었으니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한명은 당신의 남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결국 깨어있는 좋은 사람들로 세상을 채우는 것 그것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시스템이 그렇게 해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멋진 도구나 기계도 결국 그걸 사용할 인간, 스위치를 누를 인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함부로 개념을 남용하여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벌하고 청소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시스템입니다. 사람들에게 단어 몇개를 던지면서 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져가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의 숫자나 가축으로 만듭니다. 특히 어른들이 나쁩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죄없는 어린 세대들의 머리에 자신들의 관념을 집어넣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그 당연한 질문들을 지우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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