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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15-17

by 격암(강국진) 2018. 9. 14.

나쁜 꿈

 

 

15. 메모를 남긴 남자

 

한 40대의 여성이 저 멀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나는 그녀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느껴진다. 어렵지만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령은 항상 같았다. 충격과 각인이다.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그녀의 뇌를 건드리고 그 안에 아이디어를 심는 것이다. 마치 원래 자기의 생각이었던 것처럼. 

 

충격과 각인. 충격과 각인을 반복해서 외우면서 나는 계속 같은 일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잘 안됐지만 결국은 성공했다. 나는 잠시 동안 버둥거린 끝에 그녀의 머릿속에 콜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결국 그녀는 지금의 그 생각이 스스로가 한 생각이라고 믿으며 풀밭에서 일어나서 콜라를 마시러 갔다. 

 

내 능력은 처음처럼 빨리는 아니지만 지금도 날마다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칸나와 아카히로의 얼굴이 생각났다. 언젠가는 아카히로를 고쳐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이게 아카히로를 고치는 능력으로 다가가는 것인지도 확실치가 않았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게다가 이런 걸 하면 머리도 아팠다. 내 머리 안에 종양이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나는 뇌수술을 할 수 있는 진짜 대단한 능력 같은 걸 가지기 훨씬 전에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때였다.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맞습니다. 그건 위험한 짓이죠. 게다가 지금 당신은 엉뚱한 질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는 서둘러 주변을 보지만 소리가 들렸는데 말한 사람이 보이지가 않았다.

 

찾으려고 두리번 거리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세요?

 

나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소개를 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좋을 것 같군요. 

 

제 이름은 송병철입니다.

 

그 사람이었다! 내 책에 메모를 남긴 사람. 

 

16. 아이의 자유

 

미국은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고 일본은 아이에게 별로 자유를 주지 않는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도 미국은 워낙 자유를 강조하는 사회고 일본은 화합을 강조하는 나라다.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게 뭔가를 보고 겪으면 과연 자유가 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의 자유를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미국의 부모는 아이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일까. 사실 부모는 아이가 속해 있는 세계 자체를 만든다. 그 세계에 있는 모든 규칙과 원래 이런것, 상식적인 것이라는 것은 실상 그 부모가 대개 정한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서는 아이는 원래 9시에 자야 하고 원래 이런저런 티브이 프로그램은 보면 안 되고 밥을 먹을 때는 원래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모든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 부모에 의해 결정된 것이고 아이는 그런 세계 안에서 자란다.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좀 더 크기 전에는, 그래서 부모가 만들어 낸 세계 밖으로 나가서 더 큰 세계를 보기 전에는, 뭔가 다른 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 즉 자신에게 어떤 선택의 길이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모든 것들이 원래 그런 것이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촌뜨기가 사기꾼에게 속기 쉬운 것처럼 순진한 어린애는 그래서 속이기 쉽다. 

 

아이가 속한 세계는 부모를 넘어서 그 문화권이 알게 모르게 정하는 것으로도 이뤄져있다. 예를 들어 영어자체가 할아버지건 엄마건 똑같이 ‘유’로 부르는 민주적인 언어이다. 영어에서 나는 그저 ‘아이’ 다. 존대어가 발달한 한국에서는 다르다. 나는 나일 수도 있지만 저일 수도 있다. 즉 나는 뭐뭐한다. 저는 뭐뭐한다라는 식이다. 일본에서는 나를 뜻하는 말이 아주 많다. 와타시, 와타쿠시, 보쿠, 오레. 이것 말고도 끝도 없다. 일본인들은 나나 너를 표현할 때 아주 여러 개의 표현이 있다. 즉 나나 너를 부르는 호칭 자체가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들어간다. 이것은 다름을 강조하는 언어다. 다름을 강조하는 언어는 대화의 결과를 바꿔버릴 수 있다. 언어 자체가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서 아이의 위치가 어디여야 하는지를 자연스레 결정해 버린다. 

 

애초에 친구끼리의 대화와 황제와 백성간의 대화는 엄청나게 다르고 따라서 같은 것을 토론한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대한항공에서는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모두 한국사람일 때도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이야기하도록 한다고 한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언어 자체에 포함된 비 평등적인 요소가 부조종사로 하여금 자기가 감지한 위험요소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장님 제가 생각하기엔 지금 항공기가 위험한 것 같습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항공사고의 위험률이 올라가고 만다. 언어가 바뀌면 대화의 결론은 전혀 달라지기 십상이다. 

 

미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어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유치원생 아이가 아빠를 존이니 톰이니 하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어디까지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평등을 강조하는 미국 부모가 너는 자유다, 이것은 네가 선택한 결과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일본 부모보다 공평한 것일까. 정말 거기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는 것일까. 왠지 이건 자신들에게 유리한 규칙들을 잔뜩 설치해 놓고는 자 우리 이제 공평하게 경쟁합시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 때문이지 누구 때문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악당들의 냄새가 난다. 그 세계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상태에서는, 그래서 거기에 어떤 가정들이 있는지, 어떤 다른 선택의 길이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테두리 안에 있게 된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그 테두리 안에서 이것은 누구 때문이다라던 가 무엇 때문이다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 테두리 바깥에서 보면 그건 전혀 엉터리 같은 이야기 일 수 있다. 

 

현실은 이런데 뭐가 자유롭다는 것인가? 미국에서 치과치료를 받으면 한국에서보다 몇 배의 돈을 내야 한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똑같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이러저러한 것이 너의 의무다라고 말하면 아이는 그런 의무를 가진 채 때로 부모와 거래를 한다. 그래서 어떤 책을 다 읽으면 보통 때보다 1시간정도 늦게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진한 아이는 결국 모든 정보를 가진 부모가 요구하는 데로 움직이게 된다. 그 시스템 아래에서도 모든 건 자기 선택이고 자유라고 말해지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비싼 주거비를 내려고 자유롭지만 힘들게 일하는 자본주의 시장 속의 노동자처럼 말이다. 이게 자유의 현실적인 의미다. 이 세상에는 진짜로 자유로운 인간이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서로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역시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내가 본 미국의 부모들은 일본의 부모보다 훨씬 더 아이들을 줄줄 쫒아다닌다. 뉴욕의 맨해튼에서는 아이들 생일 파티에도 아이만 보낼 수는 없고 어른들이 일일이 같이 참여해야 했다. 때문에 아이들 생일 파티 때문에 부모들이 일 년 내내 돌아다녀야 한다. 만약 20명의 아이를 자기 아이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싶다면 그 말은 그 아이의 부모가 남의 아이 생일파티에 20번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들 옆을 미국 부모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이가 부모가 만들어 낸 세계 안에 있기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아이가 누군가 그들과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 민감한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정치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뉴욕에는 워낙 다양한 삶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한 친구를 그 때문에 놀리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상을 어린 시절부터 주입당하는 것은 이혼하지 않은 집의 부모로서는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아이들의 인권과 자유같은거 덜 강조하는 일본 부모는 미국의 부모에 비하면 아이를 훨씬 동네에 풀어놓아 기른다. 당연히 플레이 데이트 같은 부모 간의 약속이 없어도 애들끼리 골목에서 놀고 애들 생일파티에 부모가 일일이 쫒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냥 아이만 친구 집에 보낸다. 아이가 새로 만난 누군가와 놀고 왔다고 하면 대개는 그런가 할 뿐이다. 사람들은 일본에서 그 지역의 공동체에 대한 훨씬 강한 믿음이 있다. 

 

일본의 부모는 미국 부모에 비하면 아이를 훨씬 더 아이로 취급하며 아이들도 자신들이 아이라는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때문에 미국의 아이들은 훨씬 조숙해 보이는 경우가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일본은 한자를 고유한 일본문자들과 같이 쓰는데 한자는 본래 존댓말 같은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매우 비민주적인 문자다. 한자는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 것이며 특히 일본은 같은 한자를 항상 똑같이 읽지도 않아서 더더욱 어렵다. 따라서 일본의 어린아이들은 책을 읽고 신문을 읽는데 더 큰 한계가 있다. 그 말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속력이 틀리다는 것이다. 

 

유년기의 실종이라는 책을 쓴 닐 포스트만은 이 세상에 어린애라는 개념이 생긴것은 다름 아닌 문자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지식의 정도가 문화적 차이, 사회적 위치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차이를 만들어 냈다. 출판이 대중화된 시대에 글을 읽고 가르치는 학교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게 되자 이제 자연스레 연령에 따른 구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즉 학교에 다니고 글을 읽고 쓰게 된 어른들은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아이들과 문화적으로 다르고, 사회적 위치도 보다 다른 사람으로 뚜렷이 구분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직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라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닐 포스트만은 유년기라는 개념이 본래 있었다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한 차이는 현대로 오면서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미디어가 다양해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티브이를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아이는 이제 어른들만큼 아는 것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아이 같은 어른이 나타나고 어른 같은 아이가 나타나서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즉 어린이가 실종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이론이 얼마나 맞건 틀리건 그 이론의 측면에서 일본을 보면 한자문화는 아이들을 미국에 비해 보다 뚜렷하게 아이로 남게 만들어 주는 것같다. 일본의 아이들은 미국의 아이들이나 한글만 쓰는 한국의 아이들보다 종종 훨씬 더 단순하고 순진한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아이가 아이 같다. 이것은 나름의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 사회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아이가 아이 같다는 말은 자연스레 어른들이 보다 더 책임을 진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아이에게 너는 자유다라던가 너의 선택이니 네가 책임져라 같은 말 같은 건 상대적으로 훨씬 적게 쓰인다. 너는 아직 아이니까 잘 몰라 같은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인다. 이것은 분명 권위주의적인 것이지만 부모가 자식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는 태도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 일본이다. 

 

우리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뭐하나 나를 제약하는 것이 없는데도 뭔가 얽매인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의 보이지 않는 제약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상식이라는 것은 그 존재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상식이란 건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한 나라안에서도 다양하다. 가장 훌륭한 남편이 되는 길은 이웃집 남편보다 조금 더 돈을 많이 벌고 조금 더 가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록 그것이 작은 차이일지라도 갑자기 당신은 매우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칭찬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이사를 가서 이번에는 이웃집 남편보다 조금 더 돈을 적게 벌고 조금 더 가정에 시간을 적게 쓰는 상황에 되면 당신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주변의 환경이란 건 익숙해지면 원래 그런 것 같고 당연한 것 같아지지만 남편이나 아내가 응당 이래야 한다는 기준은 그 주변의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한다. 단 한 사람의 이웃 때문에 자기 배우자에 대한 평가는 쉽게 바뀔 수 있다. 

 

결국 나는 자유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자기가 어떤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완전히 100% 자유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그나 그녀를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고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이렇다고 할 때 자유롭다는 것은 어느 쪽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니 결국 본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그 위태로운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부자유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나는 자유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흔히 그것을 권리의 문제로 파악한다. 즉 나는 어떤 일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는 훨씬 더 많이 인식의 문제다. 얼마나 넓은 영역을 얼마나 자세히 인식하는가의 문제다. 자유는 이러저러한 게임의 법칙들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다. 떨어지는 돌멩이에는 하늘로 날아갈 권리 같은 건 없다. 적어도 우리가 그렇다고 믿는 한 절대로 그렇다. 하지만 모두가 일단 어떤 선택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면 상황은 바뀐다. 그럴 때 자유의 권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부당한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17. 두리라는 꽃

 

그들은 이제 자기 본래의 뿌리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그들은 메이지 유신이래로 일본의 피를 빨다가 이제 일본 민중을 배신하고 조선에게 우리를 팔아버린 것입니다! 지금 조선인들은 우리를 모두 죽이고 일본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북조선과 남조선의 행동은 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극에 불과합니다! 

 

사토가 준 동영상속의 남자는 헛소리를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자신있는 것인지 잘도 말한다. 아마 그는 이 동영상을 찍은 사람에게 자신이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사토는 말했다.

 

교사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세상에는 참 별별 사람들이 많더군요. 우리는 거짓말을 퍼뜨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기이한 이야기들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고르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람들을 비밀리에 후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까?

 

지금 후원할 후보들을 고르고 있습니다. 이 후보들 중에는 서로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정되는 대로 우리는 이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화제가 되는 인물들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는 인터넷 부대를 동원해서 웹상에서 크게 서로 싸우게 할 겁니다. 종말 전쟁이 인터넷에서 먼저 터지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믿기 힘든 말들에 세상에 시끄러운가. 내가 혹시 뭔가를 잘못 알고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그 싸움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의혹의 씨앗이 심어졌을 때. 

 

우리가 거사를 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엄청난 혼란 속에서 사회는 마비되고 진실은 묻힐 겁니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었던 여러가지 음모론들 때문에 더 판단력을 잃게 되겠지요. 교사님 말씀처럼 더욱더 뭐든지 믿을 수 있는 상태가 될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면 그건 바로 정부 탓이라고 하게 될 겁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내게 되었다고 믿을 겁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이고 혼란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죠.  

 

일을 아주 잘하시고 계십니다.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바위 같은 사토의 얼굴에 더욱 깊은 주름이 잡힌다. 사토는 웃고 있었다. 

 

다 교사님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입니다. 시키시는 일들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사토는 나에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사토의 칭찬을 떨떠름한 느낌으로 받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이런 쪽으로 유능하다고 칭찬받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꽤 유능한 것 같았다. 즉석에서 지어낸 심리전에 대한 지적은 교도들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들은 좋은 지도자 때문에 거사가 훨씬 쉬워졌다고 믿었다. 

 

극진제세교의 조직은 강대하고 유능했다.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빠른 속력으로 일은 진척되어가고 있었고 종말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떠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도 이 조직의 손을 거치면 가능한 것으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맙소사. 다들 미친 거 아냐. 왜 이렇게 능력이 좋은거야!

 

나는 내 능력으로 극진제세교의 지도자 자리에 누구보다 빠르게 올랐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이미 몇 사람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관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목적지를 향해 사람들을 끌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그게 누구 건 깔아뭉개버릴 것이다. 나는 물론 심지어 사토라고 할지라도 그걸 멈추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조직의 목표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순간 그 사람은 미쳤다거나 변절자라고 불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미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들은 어쩌면 세상에 복수하고 죽고 싶다는 욕망을 기이한 방식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애초에 결론이 중요할 뿐 논리나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그것이 어떤 말이건 그 같은 결론을 만들어 내는 말들은 모두 합리적인 말들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반대로 결론이 그렇지 않으면 그게 무슨 말이건 모두 불합리한 말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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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와의 만남이 신도들에게 알려지자 나와 개인면담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만남은 금세 신과의 만남이라고 불렸으며 신도들은 이 만남이 구원을 준다고 믿었다. 이것은 내게 모처럼 생긴 희망이었다. 어쩌면 교내의 영향력이 이런 식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걸로 당장 뭐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런 만남들이 나의 자유를 늘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 칸나는 본래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상담 이후에는 나를 지극히 존경하는 태도를 취했고 진심으로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사토도 나에 대한 감시와 제약을 조금 느슨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세 사람은 가까워졌고 좋은 팀이 되어서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나는 하고 있는 일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일하는 시간 자체는 좋아했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좋았다. 나는 마치 가족이 새로 생긴 것 같은 따스함을 이따금씩 느꼈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은 역시 면담이었다. 나는 현재의 궁지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과 면담을 가졌다. 아니 최소한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알고 남의 인생에 관여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거듭 생각했지만 새로운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 하나님.  

 

칸나도 사토도 불쌍한 사람들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세상이 이럴 수 있는지 몰랐다.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는 사연들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슬픈 사연들은 그들을 지독히 어리석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을 알아보는 일은 쉬운 일이었는데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문제를 처음부터 머릿속에 가득히 채워서 방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극진제세교같은 것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그들이야 말로 내가 사토에게 말했던 심리전의 피해자인지도 몰랐다. 깊은 정신적 충격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에 스며들었고 일단 한번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자 그 생각들은 시간이 흘러도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그 머릿속에서는 전투가 절대로 끝나지 않는 참전용사들처럼 말이다. 

 

결국 세상을 멸하겠다는 극진제세교를 만든 것은 세상이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더구나 외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병이 들었고 이제 세상에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정당한 복수가 아닐까? 어딘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나는 세상에 책임질 일이 없다면서 평온한 삶을 권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뤄진 저 세상은 분명 유죄가 아닐까?

 

칸나의 만남 때까지는 잘 참았지만 나는 다른 만남을 가질 때마다 거의 매번 그 인생이 불쌍해서 울었다. 나는 도저히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고 일단 내가 눈물을 감추기를 포기하자 교도들은 내 눈물에 더욱 감동했다. 면담에 지쳐가는 나는 점점 더 내 감정이 가는 대로 행동했는데 그 때문에 어떤 때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대놓고 화를 냈다. 어떤 때는 손에 잡히는 걸로 아무거나 잡아서 교도를 때릴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욕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신도들은 말 한마디 듣지 않고도 벌써 고맙다고 머리를 숙였다. 내가 울면 그들도 울었고 그러다가는 자기 문제가 풀렸다고 말하고는 했다. 결국 그들이 가진 문제의 핵심적 부분은 대개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고백할 용기가 없었고 그게 누구의 탓이건 그들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사람도 없었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썩고 썩어서 그들의 인생을 한도 끝도 없이 뒤틀어 오고 있었다. 그들을 외로운 사람들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내 방의 문턱을 넘어왔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큰 용기였다. 그들은 뭐든지 비춰준다는 마법의 거울을 볼 용기를 낸 셈이니까 말이다. 결국 가장 부족했던 건 용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 방의 소파에 앉기도 전에 그들의 고통을 줄여줄 약을 먹은 셈이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주고 싶은 것을 받아가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내 방에 들어왔고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토해냈다. 그리고 적어도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칸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현실은 그대로일지라도 그들은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나는 매번 이렇게 말해 주었다.

 

신은 본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교도들은 본래 신앙인들이라 이 말을 들을 때 가장 깊이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내가 뭘 알고 있는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내가 입을 열어 그들의 문제를 말하는 것을 오히려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내 표정을 통해서 그리고 점점 더 그럴싸해 보이게 된 나의 권위 때문에 설명이 없어도 내가 그들의 비밀과 과거를 진짜로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가 일부러 말하지 않는 한 내가 진짜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신성모독이라고 느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나에게 호되게 얻어맞기 위해 나를 만나러 왔다. 소원대로 있는 힘껏 뺨을 쳐주자 그녀는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엎드려 울었다. 그 사람은 친동생을 배신했었고 그 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였다. 

 

사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문제들이 해결책이 없다고 믿게 된 지 오래였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있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할 뿐 그들은 이미 스스로 이 세상에 그들의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들의 전부였으며 지독한 아픔을 주는 마음의 상처는 그 아픔이 지독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사과를 던지면 땅으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진짜로는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상실에 아파하면서도 자기가 진짜로 뭘 잃어버렸는지, 지금 정확히 뭘 가지고 있으며 뭘 포기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을 잃었다면서 절망하고 체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들은 진짜로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쌓아 올린 무지의 벽안에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다고 쓰여있는 벽 앞에서 체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설사 어떤 해결책을 말한 다 고해도, 그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한 어떤 방향을 가리켜도 그것은 전혀 소용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장님의 눈을 뜨게 만드는 기적이 필요했다. 결국 스스로 눈을 뜨고 자신의 벽을 직면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구원은 없었다. 

 

교도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넘어 육체적인 고통을 주었다. 나의 능력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엄청나게 뛰어난 시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 문제를 말해도 두서가 없다. 덕분에 사람들 간의 대화에는 안전한 거리가 생긴다. 누군가가 자기가 얼마나 아픈지를 말해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느끼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깊은 아픔을 느끼는지 거의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벙어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에게 자신의 내면을 언어로 잘 전달하기는커녕 스스로 조차도 자신의 아픔을 단어와 개념으로 구체화해서 인식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아픔뿐이었다.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눈멀고 소리도 못 내는 연약한 짐승이 학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살았다. 

 

내 능력이 뛰어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한계였다. 그리고 그 능력은 대가를 요구했다. 몇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나는 우울증이 올 것 같았고 탈진하고 말았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후련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의 상처를 내 쪽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나라고 해서 그들의 문제에 대해 100% 확실한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이 아니였기에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왜 있지도 않은 문제들을 잔뜩 만들어서 그것때문에 고통받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해는 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얼마나 그것때문에 고생하고 고통받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다. 폐지를 줍는다고 해도 모두가 그 할머니처럼 지치고 우울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열심히 일하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달랐다. 너무나 피곤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 할머니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모습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의 무의미한 손짓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발은 움직이지만 그것이 몸을 뜨게 하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 할머니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지만 그것이 그 할머니에게 어떤 보람이나 희망을 주지는 못하는 것같았다. 내가 누구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걸 보고 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시 그 자리에 가보니 이제는 할머니가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을 발견하면 마음이 더 안 좋았다. 그 할머니는 지금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이하고 보낼 때마다 잊어버리기 힘든 기억들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낮에는 신도들과의 면담을 하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혼자서 열이 오르면 욕을 하면서 빈 공간에 설교를 했다. 골프채를 바닥에 쳐서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누굴 욕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화가 났다. 고맙다고 하는 신도들이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화가 났다. 그들이 울거나 웃는 모습이 기억나면 더욱더 그랬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환심을 사야겠다는 처음의 생각은 참으로 어리숙한 것이었다. 이런 식이면 정말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지금 저들을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같았다. 거사가 벌어지면 저들은 어찌 될지 몰랐다. 죽거나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욱 대책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극단적인 해결책은 언제나 그런 결과를 만든다. 

 

오늘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쉬기로 했다. 시간은 없었지만 다들 이해해 주었다. 나는 에노시마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바다가 보이는 벤치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햇볕이 바다를 빛나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앉아있으려니까 세상은 믿을 수 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그저 배가 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말할 가족이나 친구가 좀 있고 이렇게 따뜻한 날에 바다를 구경하는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하루에 밥을 백 끼를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바쁘기만 했을까. 왜 다들 함께 행복할 수 없을까. 왜 사람들은 뭔가에 그렇게 구속된 것 같고 자유로울 수 없을까. 정말 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할까?

 

벤치 근처의 콘크리트 틈새에는 이름을 모를 들꽃들이 피어있었고 눈부신 햇볕을 받아서 선명한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누가 키운 것도 아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꽃들이지만 아주 예뻐 보였다. 나는 그 꽃들 중의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문득 그 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 꽃이 저기에 있게 하기 위해 뭐하나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저 꽃은 저기서 빛나고 있고 나는 그 꽃의 아름다움에 혜택을 입는다. 물론 저 꽃이 나를 위해 피어준 것은 아니다. 꽃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꽃이 나에게 미안해하거나 내가 꽃에게 섭섭해해야 할 일은 없다. 그러나 꽃은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꽃은 그냥 거기 있고 나에게 혜택을 베푼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고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도 없다. 그래도 서로에게 의지한다. 나도 저 이름 없는 들꽃처럼 존재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꽃에 이름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문득 저 꽃에 하나뿐인 이름을 주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없이 잊힌 꽃이 이름이 생기면 좀 특별해지지 않을까? 두리라는 이름이 즉각 떠올라서 나는 그 꽃을 두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두리야 좋은 하루 보내라라고 마음속으로 말해 보았다. 들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마치 내 말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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