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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18-20

by 격암(강국진) 2018. 9. 18.

나쁜 꿈

 

 

18. 진실 병원 1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아이 하나가 혼자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한 손에 로봇을 들고 있다. 아키히로다. 넘어졌었는지 로봇이 팔 하나가 없어져 버렸고 아키히로의 바지에는 구멍이 나있었다. 손에는 피가 난 상처가 보인다. 칸나는 어디에 있을까? 아키히로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엄마를 찾는 듯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찾을 수가 없다.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키히로는 더욱더 찢어질 듯한 다급한 소리를 내며 운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손을 잡아주고 싶다. 얼른 가서 안아주고 내가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 있을까? 

 

갑자기 앞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밝아졌다. 나는 어느새 한 테이블에 앞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빛이 너무 강하다. 취조를 받는 것처럼 스탠드 불빛이 내 눈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 여기에 왔을까? 다시 나는 시간을 뛰어 넘은 것일까? 극진제세교의 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칸나와 아키히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 마지막 기억은 에노시마에서 바다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바닷가에서 나는 스스로를 송병철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나를 비추는 스탠드. 그 스탠드의 옆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불빛때문에 그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 얼굴 없는 남자의 목소리는 나에게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애초에 어딘가에 갔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극진제세교는 나의 환상이었고 나는 내가 살던 와코시에서 바로 이 병원으로 왔다. 나를 병원에 집어넣도록 결정한 것은 아내였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난 1년간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었다. 나는 혼잣말이 많아지고 사람들과 눈을 잘 안 마주치며 숨어 다니듯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지더니 점점 더 가족에게 폭언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인터넷과 티브이를 보면서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우울해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꿈이었다. 나는 늘 악몽을 꾸고 잠자리에서 몸부림을 치고는 했다. 아마도 그건 칸나와 사토에 대한 꿈처럼 생생한 꿈이었나 보다.  

 

그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내와 딸은 애초에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냥 제자리에 있었고 실제로 집을 떠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나는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이후 증상이 훨씬 더 심해진 것 같더니 집에도 이따금씩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무실에 나가봐야 하는 날인데도 어딘가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이 병원에 오게 된 날만 해도 나는 사무실에 가야 하는 날인데 마치 휴일처럼 공원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이러다가 내가 영영 실종될 것이 두려워졌고 주변 사람과 상담한 끝에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설명을 다 마치고 나자 얼굴없는 남자는 말했다. 

 

이게 공식적인 사실입니다. 

 

공식적인 사실? 나는 그 단어에 의문감이 들었다. 

 

공식적인 사실이 뭡니까? 그럼 진실은 따로 있다는 건가요? 

 

얼굴 없는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싶은 겁니까. 아내와 딸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당신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가족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럼 공식적인 사실에 의지를 가지세요. 중요한 건 의지고 우리는 그걸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겁니다. 세상 일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언제나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한히 많은 세부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확인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우리는 단지 아주 작은 부분만을 확인하죠. 생각보다 훨씬 더 작은 부분을 말이죠. 그리고 나머지는 그냥 믿는 겁니다.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들을 믿는 게 당연하니까. 우리는 그냥 믿어놓고는 우리가 그걸 확인했다고 착각하죠. 

 

따지고 보면 믿기 어렵고 놀라운 점이 하나도 없는 설명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설명이란 결국 어디선가 끝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가 등록금을 주면 고마워하겠지만 사실은 그 등록금은 아버지가 누군가의 돈을 훔쳐서 가지고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악덕 기업주의 딸도 자신의 아버지를 자상한 인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당신이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을 아버지 마음대로 팔아서 만든 돈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 어머니의 건강이나 동생의 미래같은 거 말이죠. 그런데 당신의 설명은 그저 아버지가 등록금을 주셨다에서 끝날 수 있죠. 더 묻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고마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더 이어나가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아버지가 고마운 사람이란 사실에 대한 진실이란 그런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진실이란 그렇게 우리가 캐다만 진실들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죠.  

 

여기 하나의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설명들처럼 유한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심하려면 의심할 구석이 있습니다. 더 파고들 부분도 있고 부분부분 사실이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뭘 믿기로 했는가, 누구를 믿고 누구와 함께 하기로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의 의지, 당신의 충성심이 중요합니다. 진실이 공식적인 사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언제나 공식적인 사실이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요. 공식적인 사실이 곧 진실입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을 만나고 그들과 다시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세계를 지키는 겁니다. 당신의 목적을 기억하세요. 목적이 의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의지가 진실을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지켜지는 겁니다. 가족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병을 치료하고 병원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면 조금은 꿈꾸듯이 사세요. 아니면 살고 있다는 꿈을 꾸는 겁니다. 그럼 머지않아 당신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이런 말에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입니다. 언제까지 숨기는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진실은 하나니까요. 모두의 입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얼굴 없는 사내는 내 지적에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의 말이 맞다면 역사가들이 왜 그렇게 계속 일을 해야겠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건 그럴듯하지만 사실 그것도 믿음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최종적 진실이란 건 천년이 지나도 도달되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세상은 허구적으로 단순한 세상입니다. 그런 건 적어도 요즘에는 없지요.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 우리가 편한 곳에 무지의 벽을 세우는 겁니다. 그 너머에 대해서는 절대로 묻지 않는 무지의 벽을 말입니다. 진실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접어 둡시다. 물론 당신은 도움이 더 필요하겠죠.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으니까 적당한 이유, 적당한 핑게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죠. 당신이 이렇게 계속 병 때문에 환각을 본다면 어쩌면 당신의 가족들도 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보통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정신병도 전염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당신의 귀여운 딸과 아내가 병에 걸려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이런 곳에 오지 않고 편안한 그들의 작은 행복을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일상의 작은 행복이란 깨지기 쉽습니다. 

 

이건 협박이었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 머리의 종양생각이 났다.

 

날 그냥 내버려두는게 어떻습니까? 난 어차피 종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합니다. 나는 누굴 괴롭히거나 행복하게 해 줄 시간도 없습니다. 

 

얼굴 없는 남자는 즉각 대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당신의 종양은 이미 처리되었으니까요. 당신의 종양은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꽤 오랫동안 말이죠.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 없는 남자의 얼굴이 있을 것만 같은 검은 공간을 봤다. 만약 나의 능력이 환상이 아니라면 그리고 극진제세교의 일들이 환상이 아니라면 그는 어쩌면 나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보다는 훨씬 더 대단해서 불가능한 뇌수술이 가능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은 그저 내 환상일 수도 있었다. 일단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남자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마음을 읽는 능력 같은 것은 본래부터 있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내 능력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내 능력도 그리고 그 처리되었다는 종양도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던 내 환상이었을까?

 

내게는 그래도 한 가지 남은 질문이 있었다.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당신 말을 다 믿는다고 해도 사실 이 모든 것은 굉장히 귀찮은 일일 텐데요. 저 같은 사람을 뭐하러 잡아와서는 설득하려고 하고 고치기까지 합니까? 친절하고 상냥하신 분이라서 모두에게 이러는 건 아닐 텐데요. 

 

얼굴 없는 남자는 이 질문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좋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핵심을 볼 줄 안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솔직히 이건 꽤 힘들고 시간이 드는 일이죠. 하지만 그건 다 당신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치?

 

그렇죠.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가치, 훌륭한 동료로서의 가치. 그런 게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시간 들여 만날 필요도 없었겠죠. 저는 당신이 언젠가는 저의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은 자질이 있으니까요. 소중한 재원이니까요. 

 

내가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동안 얼굴 없는 사내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치료되기를 원합니까?

 

얼굴이 없는 사내의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눈이 보인다면 그것은 불타는 듯이 강력한 시선을 나에게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을 것이고 그의 협박은 효과적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네. 저는 치료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나의 치료는 결정되었다. 나는 나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나의 결심과 함께 내 생각은 끊겼다. 

 

19. 진실 병원 2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웬 병원 같은 곳에 있었다. 일인용 소파에 나는 앉아 있었고 휴게실 같아 보이는 방안에는 줄무늬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일상복을 입고 있었더라면 나는 여기를 호텔의 로비나 공항에 있는 항공사의 라운지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방은 크고 호사스러웠다. 하지만 벽에는 창문이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병원복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휴게실에서 사람들은 꽤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방에는 나 말고도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 5명이 더 있었고 그중의 한 사람은 링거병을 옆에 세워두고서 주사를 맞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장기판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간호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작은 카트를 밀고 다니며 약을 배달하고 있었다. 장기판 주변의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모두들 편해 보였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초기의 당혹감이 가시고 나자 나는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시간을 또 건너뛰었고 어찌어찌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여기는 분명히 극진제세교가 아니었고 병원 같은 곳이었다. 중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거기서 빠져나왔다. 방금전까지 나는 극진제세교의 지도자였는데 벌써 그런 상황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여기가 극진제세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혼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안도감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극진제세교에서의 시간은 때로는 재미있었고 심지어 성취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사실 무서웠고 부담스러웠으며 너무나 자극이 심했다. 나는 언제나 초긴장상태로 살아야 했고 한시도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그건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연구하고 사색하기 좋아하는 평범한 연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좀 달랐지만 내 삶은 대부분 감정적 기복이 별로 없는 평탄한 것이었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변해 버린 환경이 부담스럽고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을 끝내 버릴 스위치를 누를 의무가 있는 사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앞으로 진격하여 죽으라고 말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는 내가 그런 위치를 차지하며 산다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압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압력은 끊임없이 나에게 시간 끌지 말고 당장 그 스위치를 누르라고, 세상과 함께 모든 것을 끝내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나는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나에게 던져야 했다.

 

내가 왜?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하지?

 

나는 내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상을 구할 야망 따위는 없었지만 세상을 망하게 한다는 그런 엄청난 책임을 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어쩌다 놓인 그 자리에서 그 무겁고 계속되는 압력에 겨우 겨우 저항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내가 포기했을 때 생길 엄청난 결과가 두렵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나는 시간을 다시 건너뛰었고 나는 이제는 어떤 병원의 환자로 쉬고 있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세상이 망하건 말건 그 책임은 이미 내가 아닌 누구 다른 사람이 지고 있을 것이다. 공은 의도치 않게 나에게 던져지더니 또다시 의도치 않게 나를 떠나버렸다. 나는 할 만큼 했다. 게다가 나는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온 것은 내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는 병원이고 나는 환자다. 환자가 뭘 하겠는가? 이제 그건 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극진제세교는 정말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건 그냥 나쁜 꿈이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들이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전히 피곤했다. 나는 정말 휴식이 필요했다. 

 

그때 링거병의 남자가 갑자기 티브이에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내 생각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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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해서 시간을 건너뛰었다. 어떤 때는 깨어 있는 시간이 10분쯤 되고 어떤 때는 그 시간이 한 시간이 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잠을 자는 방에서 한밤중에 깨어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다시 이 휴게실일 때도 있었다. 내가 건너뛰고 있는 시간들은 짧았다. 대개는 하루였고 어떤 때는 고작해야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계속 시간을 건너뛰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증상은 이 병원이 내게 주는 약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시간을 건너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극진제세교에 갈 때도 시간을 건너뛰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주는 약은 단지 내 증상에 대한 치료제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치료는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의 증세는 오히려 훨씬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병원에서 한 늙은 신사와 친구가 되었다. 처음 여기서 눈을 떴을 때 링거를 맞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이었다. 70살은 되어 보이는 흰머리 칼의 할아버지인 그는 자신을 9번이라고 불러달라고 했고 나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다정했다. 9번은 내가 갑자기 시간을 건너뛰어도 당황하지 말라면서 다독여 주었고 물이나 차를 가져다주고는 했다. 그리고 병원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면서 나와 잡담을 나눴다. 나는 풀이 죽어있었고 위로가 필요했다. 극진제세교에 갈 때도 시간을 건너뛴 적은 있었지만 요즘처럼 그 일이 짧게 반복되지는 않았다. 나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9번은 여기에 아주 오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여기에서 가장 고참이야라고 말하는 9번은 그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밝게 웃었다. 나는 내가 한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나에게는 아내와 딸 하나가 있다. 나는 빨리 병을 고쳐서 여기를 퇴원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런 나의 말에 9번은 물론이지라고 말하면서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우리의 대화는 대개 그런 식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내 생각이 끊기면서 중단되고는 했다. 

 

내가 9번과 최초의 진짜 대화를 하게 된 것은 에노시마에서부터 시간을 건너뛰기 시작한 이래로 8번째 깨어난 때였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휴게실에 있었다. 그리고 9번은 이전처럼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9번의 어투가 좀 달랐다. 그는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안녕하신가. 정신이 없지?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서둘러 말하도록 하지. 이제 자네가 자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들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자기를 9번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거기에 링거병도 끌고 다녔다. 그는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런 사람이 나에게 정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9번은 자기의 옷이며 링거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것들 말인가. 뭐 신경 쓰지 말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링거병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네의 일일세. 내가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상황상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을 거야. 자네의 문제는 의사가 설명해 줘야 할 일이지 이런 정신병원의 또 다른 환자가 설명해 줄 일이 아니라고도 생각할 테지. 하지만 내 말을 잘 귀 기울여 주게. 그러면 왜 내가 이런 설명을 해주려고 하는지도 알게 될 거야. 내 말을 듣고 나서 그걸 미친 노인네의 헛소리라고 여기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아. 하지만 이건 정말 내가 힘들게 알아낸 거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네.

 

정말 힘들게 알아냈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신뢰감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기꾼들은 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9번 환자는 매우 지혜롭게 생긴 잘생긴 노인이었다. 동양인이지만 선이 굵어서 007의 배우인 숀 코네리처럼 생겼다. 젊었을 때에는 여자들에게 엄청 인기도 있었을 것 같다. 이런 사기꾼도 있을까 싶었다. 하긴 사기꾼은 사기꾼처럼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9번을 그저 말없이 쳐다보았다. 사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나는 얼마 후면 또 시간을 건너뛸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했는지 9번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자네만 다른 사람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는 거야. 

 

나는 처음부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9번의 말은 처음부터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럼. 저 소리도 들리세요? 저 죽어라 죽어라 하는 소리? 사람들을 죽이는 소리.

 

물론 잘 들리지. 

 

그럼…

 

아. 잠깐잠깐. 그런 식으로 나가봐야 별로 도움이 안돼. 먼저 내가 가르쳐 줄 두 번째를 들으라고. 

 

두 번째는 모두가 그렇지만 자네도 한계가 있고 완벽하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제거된 거지. 그래서 여기에 끌려 온 거라고.

 

자네는 자네만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했지? 어쩌면 자네가 바깥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은근히 자네를 당할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확실히 저는 슈퍼맨 놀이를 좀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네가 벌써 하늘을 날았다고? 정말인가?

 

아니요.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만 있었죠. 

 

난 또. 괜히 놀랐네. 하지만 바로 그거야. 다들 그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고 전과는 다른 사람이 돼버리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아이디어도 넘쳐나. 처음에는 놀라지. 자기가 왜 이런가 하고. 그러다가는 자신의 능력을 쓰고 그 능력을 키우는 일에 빠져 버려. 사람들은 금방 자기만 특이하고 자기만 특이한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자기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곤란한 일에 얽매이기 시작하는 거지. 

 

하지만 실은 이 세상에는 자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어. 그것도 생각보다는 아주 많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사실 자네는 그저 신참에 지나지 않는 거야. 능력으로 보면 자네는 아마 제일 형편없는 쪽일걸?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건 대개 쓸수록 늘어나는 능력이니까 말이야. 중요한 건 자네는 특이하지 않다는 거지. 자네가 구체적으로 뭘 겪었는지 몰라도 결국 크게 보면 자네가 겪은 일들은 다른 사람이 겪은 일과 다르지 않아. 이걸 알아야 자네는 자네가 지금 어떤 게임에 끼어들어 있는 건지를 이해할 수 있네. 

 

다르지 않다?

 

그렇지. 다 똑같아. 우리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보다 더 많이 출세를 하고 사람과 조직에게 절망하지. 그리고 잡혀서 여기로 오는 거야. 그리고 치료를 받는 거지. 

 

그러니까 제가 꿈을 꾼 건 아니군요. 제가 겪은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거군요?

 

극진제세교 말이지?

 

아십니까? 극진제세교를?

 

간호사에게 들었네.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이 모든 것이 끝날 때가 말이야. 사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나도 자네에게 이런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좀 더 두고 봤겠지.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없네. 

 

우선 자네에게 말해 두지. 내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하나? 답은 간단하네. 나도 자네 같은 사람이니까 알았지. 

 

선생님도 사람의 마음의 소리가 들립니까?

 

그래. 벌써 아주 오래되었지. 내가 어릴 때부터라구. 사실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그래. 우리는 말이야 이 세상에서 불온한 생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고.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어느 날 우리는 우리의 불온한 생각을 깨닫기 시작하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지. 하지만 문제는 우리 스스로도 그 불온한 생각이 뭔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거야. 알기는 알았는데 뭔가 느낌은 있는데 그게 말로는 잘 설명이 안돼. 그건 처음에는 그냥 뭔가가 이상하다는 위화감같은 거지. 뭔가 이게 아니라거나 이 세상에는 뭔가 빠진 것이 있다는 느낌 같은거 말이야.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말하기 힘들어. 사실 의식적으로 분명히 그 불온한 생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온 세상에 그 생각을 퍼뜨릴 수 있다는 뜻이지. 내가 보기에 우리의 사명은 바로 그거야. 우리의 불온한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 그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켜서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 극진제세교는 우리 같은 사람 중의 하나가 만든 거야. 

 

교주 말입니까? 다카기 시게노부라는 사람?

 

에이. 그 사람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어릿광대고 바보야. 자네도 아마 그쯤은 할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이디어를 심는 것. 

 

나는 놀랐다.  9번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간단한 것뿐이지만 그렇습니다. 

 

극진제세교는 그렇게 키운 거야. 극진제세교의 수뇌부들은 대부분 그렇게 고의적으로 만들어진거라구.  사실은 교주까지도 말이지. 다들 자신이 스스로 교도가 되었다고 생각할테고 자신들이 노력하고 능력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생각할테지만 그건 사실이 아냐. 극진제세교는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지. 그들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만들고 후원한 거야. 하지만 이제 때가 됐어. 모든 걸 수확할 때가. 

 

그들이란 게 누굽니까?

 

그들이 누구냐라. 그들은 주로 우리들이지. 불온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정확히 말하면 자기 운명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실패한 혁명가들이랄까. 그들은 좌절했고 자기 메세지를 잊었고 변절했어. 그게 아니면 그들은 너무 일찍 그들의 메세지를 구체화시켰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의 메세지란 이것이다라고 적은 다음에는 자기가 적은 것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야. 이건 자기가 적은 것때문에 자기 메세지를 잊어버리는 경우지. 어떤 때는 누군가를 너무 미워하게 된 나머지 자기의 메세지를 잊어버리기도 해. 메시지고 뭐고 그냥 그 악마를 죽이고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된 거지. 아무튼 이것들은 내 표현이고 내 설명일세. 그들이란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치료를 다 받고 완치된 사람을 말하네. 철이 들어서 세상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을 말하지. 나나 아직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지. 

 

나는 9번이 여기서 가장 오래된 환자라는 말을 기억하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9번은 나의 시선이 가지는 의미를 금세 알아차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뭐 내가 좀 고집 이세고 둔해서 그런가 보지. 하하. 

 

그런데 제가 왜 자꾸 시간을 건너뛰는 거죠?

 

잠깐 기다려 봐. 설명은 그런 식으로 할 수가 없다니까. 먼저 몇 가지를 말해 둬야 할 것이 있어. 일단 약에 대해서야. 여기서 주는 약은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켜. 그래서 그 약을 계속 먹으면 더 이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지.  

 

시간을 건너뛰는 것에 대한 치료제가 아니고요?

 

아니지. 그 약은 그런 게 아냐. 우리가 충분히 치료를 받기 전에는 우리에게 능력이 있으면 위험하니까 우리의 능력을 억제하는 거라고. 

 

그럼 선생님도 그 약을 드셨나요?

 

나는 그 약이 어떤 약인 줄 아니까 속일 수 있을 때는 속이고 안 먹었지. 하지만 늘 속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이따금씩 먹었고 나는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내 능력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됐어. 

 

그런데 그거 아나? 능력자들은 다른 능력자들을 알아볼 수가 있어. 뭐랄까 마음의 결이 다르달까. 느낌이 달라. 그래서 능력자가 능력자를 만나면 즉각 알아 채지. 느낌이 다르니까. 모든 자동차들이 다 엔진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데 한대만 엔진소리가 이상해. 혹은 자동차가 웅웅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소리를 전혀 안내. 그러면 이거 좀 다른데 하고 느끼지 않겠어? 그런 거지. 그래서 능력자가 능력자를 만나면 아 이사람도 능력자구나, 아 이사람도 우리중의 하나구나 하고 느끼는 거야. 마음의 결이 다르거나 아예 마음을 읽을 수가 없으니까. 능력자도 깨어있는 사람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어. 나는 이제 능력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그 느낌은 남아있지. 그래서 나도 누군가가 능력자면 그 사람을 알아 볼 수는 있어.

 

그런데 소위 이 불온한 생각을 가진 능력자들이라는 건 그렇게 완벽한 게 아냐. 불온한 생각과 함께 깨어났다가도 다시 잠들어 버린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 잠들어 버린 능력자들은 어떤 의미로는 다른 사람과 거의 같아. 다른 능력자들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심지어 조종할 수도 있지. 아까 말한 대로 능력이 있는 경우에는 마음의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잠깐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어 버린 능력자의 수는 어마어마할 거야. 그들은 능력을 개발할 시간도 없었으니 능력자라기보다는 그냥 재능이 있었다고 해야겠지. 어쩌면 모든 사람이 평생에 한 번 정도는 각성했다가 잠들어 버리는 건지도 몰라. 어쨌건 처음 각성했다가 다시 잠든 상태의 우리는 마치 몽유병 환자 같지. 드문 일이지만 그러다가 다시 깨기도 해. 그럴 때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시간이 흘러있고 내가 기억도 못하는 일들이 진행되어 있는 거야. 도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싶지. 

 

하지만 사실 한번 각성이 되었다가 다시 잠이 들면 다시 깨어나는 일은 드문 일이네. 대부분 한번 잠이 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지.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한 번이라도 각성을 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알 수가 없어.  어떤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각성상태에 있다가 잠이 들어. 그래서 자기의 메시지가 뭔지를 고민하고 그걸 퍼뜨리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능력을 꽤 발전시키지. 하지만 그들도 결국 다들 잠이 들어서 다시는 수면상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 병원에서 말하는 치료된 상태란 건 바로 그 상태를 말하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잠깐만요. 지금 말씀하시는 건 병을 고친다는 게 시간을 건너뛰는 것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영원히 잠들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 병을 고치는 거라고요?

 

맞아. 병을 고친다는 건 그런 거네.

 

20. 진실 병원 3 

 

9번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또 다른 자네와도 꽤 친하네. 같이 장기도 두고 책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 자네는 또 다른 자네로 바뀔 때에도 같은 말을 해. 자기가 병이 있어서 시간을 건너뛴다고. 그 친구도 자네 만큼이나 예의가 바르고 자네만큼이나 자신의 병을 걱정하지. 빨리 병을 고치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어 해. 자네와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차이가 없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누가 꿈속에 있고 누가 불온한 생각을 가지고 깨어난 자인지 말이야. 자네는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닐세. 자네가 곧 병이야. 자네는 이 세계에 대한 위협이며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란 말이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9번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네. 자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들 뿐일 텐데. 나는 자네 사정을 봐줄 수가 없군. 사실 이번에 자네가 다시 잠들면 다시 깨어나기나 할지 모르겠어서 말이야. 게다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면 내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내가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걸세. 다시 말하지만 자네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물어. 아니 나는 처음 봤네. 

 

나는 이야기가 내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요즘 들어서 내가 자주 시간을 건너뛰는 것이 내 증상이 악화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내가 병을 고치면 시간을 건너 뛰는 일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가 옳았다. 병이 고쳐지면 시간을 건너 뛰는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영 깨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9번은 혼란에 빠진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나는 말이야. 자네같이 자꾸 다시 깨어나는 사람은 처음 봐. 내가 말했듯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능력자였었지. 이미 아주 여러 사람이 여기를 지나갔네. 하지만 나말고는 다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었지. 그리고 이 안에서건 여기를 나가서 건 바보 같은 소리나 해대면서 생각 없이 편하게들 지내고 있지. 나만 아주 오랫동안 깨어 있었어. 능력이 없어서 탈출을 하지 못한 채 기회를 노리면서 말이야. 아니 솔직히 말하지. 나는 기회도 제대로 노리지 않았어. 다만 능력도 거의 잃어버렸는데도 영원히 잠드는 것만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버텼지. 굴욕적으로 버텼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뭐하나 이루는 일도 없이. 

 

그런데 자네는 일단 잠이 들었는데도 자꾸 깨어났지. 그래서 이제 내가 자네에게 질문이 하나 있네. 자네는 왜 그렇게 자꾸 깨어나는 건가? 왜 자꾸 돌아오는 거지? 왜 그렇게 한밤에 깨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가. 왜 그렇게 불안한 건가. 다 놓아버리고 잊어버리면 편할 텐데. 이미 그러기로 한 거 아닌가? 뭔가 미련이 있거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야?

 

왜 자꾸 깨어나는가라는 9번의 질문은 평범하지만 신선했다. 나는 그가 말해준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자꾸 깨어나는 거지? 나는 왜 그냥 잠들지 못하는 걸까? 

 

이윽고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정말 제가 자꾸 돌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사실 극진제세교에 있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죠. 제가 생각해 봤는데 그 이유는 하나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 아이 때문 같습니다. 아키히로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제 비서로 일하던 칸나라는 여자의 아이입니다. 극진제세교가 이대로 계획을 실행하면 아키히로는 아마 죽을 겁니다. 칸나가 계획에서 뒤로 빠질 리가 없고 아키히로를 누군가에게 맡길 리도 없습니다. 혼자서 감옥에 갈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칸나는 분명 아키히로와 같이 죽으려고 할 겁니다. 

 

그래? 그래서? 그 아이가 그렇게 특별한가? 칸나라는 비서와 그렇게 친했어?

 

가깝다면 가깝지만 그래 봐야 그렇게 오래된 사이도 아닙니다. 게다가 아키히로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라서 저를 보고 웃어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죽는 것은 왠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설사 죽지 않는다고 해도 그 아이가 혼자가 되는 것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왠지 그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에서는 아키히로의 얼굴과 울음소리가 사라지지가 않아요. 분명히 나를 계속 깨우는 것은 아키히로가 위험하다는 사실입니다. 

 

9번은 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는 몇 살에 각성을 한 건가?

 

전 40살입니다. 그 각성이란 일이 있었던 건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것도 특이하군. 다들 10대나 20대 초반에 각성을 하는데 말이야. 어쩌면 자네가 특이한 것은 자네가 각성을 늦게 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너무 젊은 나이에 능력과 메시지를 얻은 사람들은 금세 주변을 볼 수 없게 되지. 

 

나도 그랬네. 난 19살에 각성을 했어.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지. 재능을 발견하고 재능에 취하고 능력으로 출세하다가 능력보다 더 출세하는 거지. 아무리 대단한 능력도 한계가 있거든. 그런데 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나? 능력보다 더 출세하는 것이 악의 시작이야. 그런데도 모두들 끝없이 더 출세하려고 하지. 그래서 출세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출세를 너무 해버린 사람들은 악당이 되기 시작한단 말이야. 능력이 그만큼이 안되는데 자기 자리를 유지하거나 거기서 더 출세하려고 하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사람들은 잠들어 버리지. 그러다가 사람들은 대악당이 돼버리는 거야. 그런데 난 못난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런 길을 걸었는데도 금세 그 출세의 길에서 내려왔네. 덕분에 내가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다 포기하고 잠들 수도 없었지.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내 메시지를 퍼뜨리기는 커녕 그게 뭔지를 도통 모르겠는거야. 뭔가를 써보거나 말을 해봐도 다 그저 횡설수설일 뿐이라서 나도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지. 그저 잠들지 않는 것이 내 유일한 긍지였네. 아무 일도 못하고 메세지를 구체화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잠들지 않는 게 내 유일한 자존심이었어. 쥐처럼 숨어서 그저 굴욕을 버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지. 세상에 바보 같은 놈들은 어찌나 많은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메시지는 이게 아닌가 싶어. 길지 않아. 간단해. 잘 듣게. 이게 내 평생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니까.  

 

9번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 자 한자 똑똑히 말했다. 

 

인간을 믿자. 인간을 믿어야 한다. 

 

나는 자네를 믿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자네 이외에는 대안도 없지만 그래도 왠지 자네가 믿겨. 자네가 어떤 대단한 메시지를 위해 깨어나는 게 아니라 한 아이를 위해서 다시 깨어난다는 것도 마음에 드네. 좋은 이야기일세. 한 아이를 위해서 잠을 설치게 된다는 건. 이게 다 운명이겠지. 극진제세교는 1주일 뒤로 거사 날자를 잡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1주일 뒤면 세상에 난리가 날 거야. 천명이 죽을지 만 명이 죽을지 아니면 정말 저들이 바라는 대로 종말 전쟁의 서곡이 될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난리가 나기는 나겠지.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보기엔 자네뿐일세. 나는 안돼. 늙기도 했고 이제와 세상에 나가서 1주일 만에 뭘 하기에는 연줄도 없어. 

 

하지만 저는 약을 먹어서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 능력이란 게 돌아온다고 해도 그런 거사를 막을 만큼 대단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은 제가 막을 수 없는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고 말씀하신 대로라면 정말 대단한 능력자들이 그 테러의 뒤에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그걸 어떻게 막습니까?

 

그렇지. 그들 중의 우두머리가 내 친구일세. 그는 내가 4번이라고 불렀던 친구지. 한때는 같이 세상을 구하자고 하기도 했었어. 10년 전에 내가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미 그의 능력은 대단했어. 지금은 더 대단하겠지. 정말이야. 그 친구가 하려고 들면 세상이 망할지 몰라. 일본 테러는 그 시작에 불과할 거야. 도미노처럼 일이 번져갈 거야. 게다가 이제 와서는 너무 일이 급해서 그 친구 하나 없앤다고 굴러가던 일이 멈출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도 그 친구도 슈퍼맨은 아닐세. 총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천 사람 만 사람을 인형처럼 부리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아무리 작아도 희망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 나로서는 자네라도 보내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실패해도 어쩔 수 없네. 부담 가지지 말게. 자네는 특별해 보여. 그렇지만 자네 말이 맞아. 사실 객관적으로 뭘 자네가 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네. 그래서 자네에게 미안해. 이건 탱크를 막으라고 맨 몸으로 보내는 것보다 더 하군. 

 

하지만 내게도 할 말은 있네. 자네는 자꾸 깨어나더군. 희망 따위 없다고 잊으려고 해도 자네는 자꾸 깨어났네. 탈출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나도 하려고 들면 진작에 탈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가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 초라한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이 망해간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새삼 뭘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자네가 자꾸 깨어났어. 그리고 자네가 깨어날 때마다 나도 마지막으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걸세. 내 메시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말이지. 어쩌면 내 일을 자네에게 미루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이게 최선이지. 자네가 가는 게 맞아. 이건 운명일세. 

 

사실 자네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래서 자꾸 깨어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내일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지금 생각하지 말자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에만 신경 쓰는 거야. 지금 나는 한 가지를 할 수 있네. 바로 자네의 능력을 돌려놓아서 자네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 그럼 아마 자네는 그 능력을 써서 여기를 탈출할 수 있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내 메시지대로 해보겠어. 나는 내 선택을 했으니 자네는 자네의 선택을 하게. 나도 자네에게 강요를 할 수는 없겠지. 자네는 늘 다시 깨어지만 동시에 늘상 다시 잠드네. 그것은 자네가 잠들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네. 눈을 감기로 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다시 묻겠네. 기회가 된다면 자네는 그 아이에게 돌아갈 텐가? 자네는 자네의 운명을 받아들일 텐가?

 

아키히로를 엄마 없는 아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사실 내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일단은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제 능력을 되돌릴 능력이 있으세요?

 

9번은 의자 밑을 뒤지더니 커다란 몽키스패너를 꺼냈다. 

 

이렇게까지 말해놓고 무책임한 말 같지만 내게는 자네의 능력을 되돌릴 능력이 없네. 하지만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거기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지.  자네 우리의 능력이 어떻게 커지는지 아나? 우리의 능력은 고통을 통해서 커지는 거지. 고통이 우리의 신경을 흐르는 동안 우리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고 더 많은 고통이 흐를수록 우리의 능력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일세. 능력이 커진다는 건 어쩌면 고통을 더 잘 참게 되었다는 말일지도 몰라. 고통에 무감각해졌다는 말일 수도 있고. 말한 대로 내 능력은 전성기에 비하면 거의 다 사라졌네. 하지만 극렬한 고통을 겪으면 능력이 부활할 거야. 나도 예전에는 꽤 능력자였거든. 그럼 어떻게 고통을 겪을까? 그건 바로 이렇게 하는 거지.

 

9번은 이 말을 끝으로 몽키스패너로 들고 무릎을 꿇더니 사선으로 기울인 그의 발목을 내리쳤다. 그의 연약한 발목은 당장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지며 피를 흘렸다. 몽키스패너가 땅에 떨어지고 그의 손은 통증으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9번은 말했다. 

 

이런 제길. 이 정도로는 안돼는군. 내가 약을 얼마나 먹은 거지. 이게 끝이야.  

 

9번은 고통을 참으면서 다시 몽키스패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걸로 그의 이마를 힘껏 내리쳤다. 그는 쓰러졌다. 바닥에는 그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흘렀다. 나는 그의 머리에 난 상처를 손으로 누르면서 그를 돌려 눕혔다. 나는 한순간 그가 즉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감각이 돌아왔다. 약을 나눠주던 간호사가 9번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뛰어 왔다. 내게는 다시 그 간호사의 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9번은 이제 눈도 뜨지 못했다.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콸콸 흘렀다. 그는 눈을 감고 바닥에 누운 채 말 한마디 없이 겨우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나는 그의 메시지를 다시 크게 말했다. 

 

인간을 믿자! 인간을 믿어야 한다! 

 

나는 그가 내 말을 들었기를 바랐다. 내가 그의 메시지를 잊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그의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살아날 수 있었으면 했다. 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일을 했으니 이제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할 차례였다. 

 

요령은 충격과 각인이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간호사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내 온몸에는 분명 고통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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