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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23-24

by 격암(강국진) 2018. 10. 8.

나쁜 꿈 

 

 

23. 토론회 1

 

왭니까?

 

나는 고심 끝에 사토와 칸나 그리고 하야토를 불러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설명해 주었다. 하야토는 그간에 내가 개인적으로 만났던 교도들 중의 하나였으며 사토와 함께 나를 구하러 진실 병원으로 달려온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전직 자위대 대원이었던 그는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사토는 그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나의 설명을 묵묵히 듣고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다른 두 사람과 다시 돌아와서 그가 나에게 던진 첫 번째 말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저는 교사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교사님을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블루문으로 모신 것 자체가 사실은 지나고 보니 전혀 저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하도록 조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더군요. 게다가 교사님이 그간에 능력을 보여주신 일도 있으니까요. 극진제세교 전체가 그간 암중에서 누군가에게 정신적인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는 말은 여전히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사님이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저는 한가지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교사님의 말이 맞다면 교사님은 제 생각도 조종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저 제가 어떤 이야기를 믿게 하면 그만이겠지요. 이렇게 생각을 하니 이제 저는 제가 어떤 일들에 대한 설명을 들은 건지 아니면 또다시 세뇌를 당해서 있지도 않은 일들을 믿게 된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교사님은 왜 저에게 설명을 하신 겁니까. 

 

나는 사토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시작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을 모두 들으면 여러분들은 저에게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저는 사토 씨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설명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제 생각 말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여기에 있는 다른 두 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야토는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말씀하신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당장 거사를 중단시키고 이 조직이라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슨 질문을 하시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교사님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싸우지 않을 생각이라면 말씀도 하시지 않았을테고 말입니다. 

 

어떻게 싸웁니까?

 

진실을 알려야지요.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만들고 그들을 움직여야지요. 

 

저는 제가 가장 믿고 저를 가장 믿어줄 것같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제가 확신하는 만큼 강조하면서, 제가 믿는 대로 말했죠. 진실과 사실은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에게 의미를 주는 문맥이 있어야 합니다. 앞뒤 정황이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문맥들은 하나의 사실 주위에 무수하게 많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맥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실을 통과하면서 한 줄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며 사실이 진실이 되는 것은 그런 문맥들이 무수하게 알려지는 극한에서나 가능합니다. 하야토 씨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성추행범이라거나 어떤 사람이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야토는 이 말에 움찔했다. 그의 과거가 생각났을 것이다.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의 폭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집처럼 거대한 바위는 모른 척하면서 그 옆에 있는 조약돌에 호들갑을 떠는 것같은 위선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저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하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구멍이 많습니다. 저는 단지 제가 알고 있고 제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실들을 골라서 여러분에게 말한 겁니다. 저에게 뭔가를 숨길 의도는 없었지만 언제나 모든 것을 중요도의 판단 없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하야토는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교사님이 말씀하시는대로라면 진실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용기를 내서 그것을 무조건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선 진실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 직접적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적인 것만을 알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의 진리는 경계가 없는 것이며 그런 것은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정의나 신 같은 개념처럼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옳고 그름을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이 지구라던가, 이 나라라는 테두리를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혹은 불고기를 먹거나 야채를 먹으면서도 인간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이 지구 자체가 악일 수 있고 어떤 문맥에서는 인간이 암세포처럼 악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테두리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사위에서 1이 나올 확률이 1/6이라고 알고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사위의 객관적 확률을 알게 되는 때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뭘 결심하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며 우리는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어떤 결론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진실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그리고 궁극적 진실을 모르는데도 우리가 어떻게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질문일 수 있습니다. 

 

학자로서 말하자면 저는 이런 질문과 그것에 대한 생각에 마냥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저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이런 추상적인 사고 속에 빠져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에 집중하고 그것에 대처해야 합니다.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 전체에 대한 답을 알고 난 다음에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걸 모르는 지금을 살아야 하고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에게 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생각의 탑은 그 기초가 무한히 단단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도 하야토씨에게 동의합니다. 저도 사람들이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것을 그냥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같이 대책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죠.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모두 말하자는 것도 한 가지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장 바람직한 것일까요? 말을 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 말하는 걸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분들도 제가 말한 것을 믿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간 제 곁에 가까이 있었기에 그래도 제 말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이미 저를 강하게 믿고 계셨기 때문에 제 말도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를 그정도까지는 믿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은 그저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겁니다. 그들은 이 모든 말들이 제가 거사를 중단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허무맹랑한 핑계라고 말할 겁니다. 어쩌면 제가 정부에게 뇌물을 받았다거나 저는 원래 정부가 보낸 스파이였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제 말에 대한 그런 설명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건 그럴듯한 가설입니다. 세상에는 분명 그런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동시에 존재하는 그럴듯한 여러 설명들 중에서 우리가 뭘 믿는가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제가 사실들을 말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시간만 끌면 나중에는 진실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집니다. 거사가 이미 시작되고 난 후에는 제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는 한가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에 대한 검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며 그들은 내가 말한 사실들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할 겁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 그 사실들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그들이 나를 믿을 수 없는 이유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사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저까지 믿지 않게 될 거라는 겁니다. 제가 욕을 먹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만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작은 주도권과 기회까지 날려버리게 될 겁니다. 

 

저는 물론 사람들이 믿건 믿지 않건 사실을 폭로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용감한 길이자 가장 무책임하고 편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사실을 폭로하고 사람들이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이제 세상에 생길 일들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몇몇 무책임한 언론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 시대의 핵심적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리고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저 사람들이 주목하기는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없는 사실들을 마구 던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무수한 사실이 있으며 사실이 간단히 진실이 되기에는 요즘 세상이 아주 복잡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건 말도 안되는 변명이고 책임회피죠. 죽으러 전쟁터에 가는 병사의 사소한 복장 불량을 안전한 곳에서 지적하면서 자신은 진실을 보도하는 영웅이며 권력의 억압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복장 불량으로 전쟁에 지기라도 하는가 싶어서 우왕좌왕하고 핵심을 비켜나서는 비난을 퍼붓다가 그것 때문에 전쟁을 정말 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누구도 그걸 책임지지 않겠죠.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연예인들 가십 기사로 관심을 돌려도 그것도 사실 보도라고 주장하고 자신은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는 진실을 폭로해서 세상을 구했다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폄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아무런 조건없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일까요? 그런 방식으로 접근했을 때 막았어야 할 비극을 막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런 방식으로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비극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내가 말할 것이 일으킬 일에 대한 부담 때문에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말하고 나서 나는 그저 본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그걸로 나는 세상일에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 아닐까요? 권리와 의무에는 균형이 필요한 법인데 요즘에는 너무나 큰 소리로 세상에 말할 능력이 있으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감은 없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중립적인 언론을 말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습니다. 편견에 물들지 않은 중립이란 그 관찰대상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관심과 애정이 없는 사람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관찰의 결과는 언제나 우리의 관심과 애정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관심과 애정이 있는 사람만 중요한 것을 봅니다. 우리는 애초에 보고 싶은 것을 찾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을 찾습니다. 관심도 없고 이론도 없는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은 사회문제가 아니라 심지어 과학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과학자가 과학이론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말하면 과학자야말로 세상에 가장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 중립을 가장한 무관심한 언론들은 종종 돈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고 있으며 남들이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주장하고는 하지요. 

 

다시 말하지만 저도 알고 있는 사실들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뿌려버리고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딘가에서 불타는 세상을 보면서 그것 봐 내 말 안 듣더니 저 꼴이지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죠. 제가 묻고 있는 것은 그것이 유일한 길인가 혹은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더 합리적이고 그것 보다는 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길은 없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저 자기 코앞만 보면서 보이는 것은 뭐든지 떠들어 대면 그걸로 좋은 걸까요? 우리에게는 세상에 대해 그 이상의 책임은 없는 것이고 그걸로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요?

 

하야토는 내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말하자마자 그의 뇌리에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여러명 떠올랐을 것이다. 이런 기회가 생기면 나에게 원수라도 진 것처럼 펄펄 뛰면서 잘난 체를 할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럿 모이면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극단적인 말들을 하기 좋아하고 우리들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과대망상에 빠져들기를 좋아하며 남들에게 피를 흘리라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정작 자기는 입만 움직이면서 말이다. 자기는 안간힘을 다해 군 복무의 의무를 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전쟁을 할 수도 있다고 쉽게 전쟁을 말하는 부끄러운 정치가들은 세상에 많다. 

 

지금 소위 진실을 폭로하는 상황을 만들면 그걸 자신이 출세할 기회로 삼으려고 할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와 교도들간에 생길 작은 틈 사이로 끼어들어와서는 그것을 키우고 그 틈을 넘을 수 없는 단절로 만드는 일에 광분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조롱할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할 것이다. 언제나 조직의 내부에는 이렇게 조직을 와해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장 조직에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이 나의 지지자라고까지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은 항상 똑같다. 그들은 먼저 조직의 내부를 순수하게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직이 그 외부를 보기보다는 내적인 투쟁에 몰두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조직안에는 더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정체성 내부투쟁의 끝에서 그들에게 조직이 완전히 장악되는 일은 별로 생기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책임을 떠맡을 능력도 결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내부 정화는 영구히 계속되며, 조직의 외부에 있는 조직의 적보다는 자신이 동지라고 부르거나 이제까지 동지였던 내부의 친구들을 공격하는 일만 계속 벌어진다. 결국 이런 일들은 그 조직이 망하는 그날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조직이 마침내 망하고 난 뒤에도 그들은 말한다. 

 

봐 내 말이 맞잖아. 그렇게 된다고 했잖아. 바로 저런 사이비들 때문에, 바로 저런 더러운 놈들때문에 우리가 망했다니까. 

 

그들은 결코 자기들이 조직을 망하게 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남탓만 한다. 

 

사실 지금 내가 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것 자체를 용인받는다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을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도구였다. 형식상으로는 교의 지도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일을 대신해줄 도구였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믿고 아끼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때 사토가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눌러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책임있는 태도, 결단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바른 조직을 원한다면 그걸 위해 투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사님은 물론 그런 걸 좋아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큰 조직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이 두려워야 법을 지키는 것이죠. 

 

사실 교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지금 당장 거사를 취소하자고 하면 아마 큰 소동이 나면서 교사님은 물론 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적당한 핑계를 대고 거사를 약간 뒤로 미루고 그동안에 최대한 조직을 강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중요한 보직을 바꾸고 말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어려운 일이죠. 저는 다만 그게 우리가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니냐, 그 길밖에는 없지 않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효율적인 구조개혁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향해서 힘들게 나가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제도적인 힘을 갖추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도개혁과 인적교체라. 나는 이 말들을 되새기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제도적 개혁과 인적 교체가 이뤄지고 나면 우리의 공동체 즉 극진제세교는 앞으로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는데요. 하나는 바로 그런 개혁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수파이고 권력도 큽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작은 힘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큰 힘에 대해 힘대 힘으로 싸움을 거는 것은 탱크에게 돌멩이를 들고 덤비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용감하다고 칭찬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뭐가 될까요?

 

또 하나는 개혁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실은 굉장히 성가신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것과는 다른 대안적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우리에게 맞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동조한다고 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개혁의 대의나 필요에는 공감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선택한 방식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아가 우리의 방법은 대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은 개혁을 막을 겁니다. 그럼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주판을 두들기기 시작하겠죠. 또 다른 길들은 끊임없이 계속 등장할 겁니다. 개혁파는 끝없이 분열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질서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온 사람들은 자기의 희생과 이득을 계산하겠죠. 그들은 자신의 희생은 줄이면서도 자신이 개혁파에 든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개혁안을 생각하겠지만 언제나 세상에는 그런 개혁안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안을 주장하면서 그런 느슨한 개혁은 실패할 거라고 주장하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개혁을 방해하면서 자기 자신들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소수파가 전체 공동체를 개혁하려고 할 때 우리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집니다.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 개혁에 반대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개혁을 이루려고 하는 거니까 다수결로 개혁을 진행하려고 한다면 그런 개혁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 지금의 패러다임을 깰 수는 없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설득을 하려고 하겠죠. 하지만 저들도 우리를 설득하려고 할 것이고 여러 가지 논리를 만들고 증거를 만들 것입니다. 

 

결국 개혁은 엄청난 대재앙이후에나 가능합니다. 엄청난 대재앙이 있고 난 후에는 사람들은 그 재앙이 가져온 피해 때문에 개혁에 동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재앙을 피하려고 하는 개혁을 하려고 하면 개혁은 실패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적어도 민주적인 방식으로는 말이죠. 

 

사토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빠르게 그 일을 해치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한 질문을 던지는 교도들도 억누르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협박도 해야 할 것입니다. 폭력도 써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개혁은 일종의 쿠데타니까요. 그것이 우리의 결단입니다. 

 

이 말이 있고 난 후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때 칸나가 끼어들었다. 

 

결국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아는 사실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는 길이 하나고 또 하나는 전체 조직을 단기간에 장악하기 위해서 일종의 중앙집중식 쿠데타를 하는 것이로군요. 그런데 교사님은 그 모든 방법들이 다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럼 교사님은 어떤 또다른 제3의 길을 아시고 계신 건가요? 거사는 다가오고 우리는 대파국을 반드시 막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할 텐데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좋지 못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뭘 해야 합니까?

 

24. 토론회 2. 

 

나는 내가 진실병원에서 탈출한 이후의 일들을 떠올렸다. 능력을 되찾은 나는 간호사를 설득해서 전화기를 받았고 그 전화기로 사토에게 연락을 했었다. 사토는 10여 명의 남자들과 함께 총을 들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생각보다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병원은 그저 병원일 뿐 군대 시설 같은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이 있었던 환자들은 나와 같이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병원을 혼자 탈출했다. 

 

병원을 탈출한 이래 내가 한 첫번째 일은 단순했다. 나는 더 많은 능력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능력을 얻기 위해 가장 빠른 방법이 뭔가를 고민했다. 9번에 따르면 능력을 키우는 것은 결국 고통이었다. 나는 송곳을 구해다가 내 손바닥에 가져다 댔다. 고통은 두려웠다. 하지만 9번이 바닥에 누워서 피를 흘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송곳에 힘을 가했다. 송곳이 손에 박히자 꿰뚫린 내 손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흘렀다. 그리고 고통이 퍼졌다. 이걸로 나는 더 강해진 걸까? 나중에 방에 들어와서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본 칸나는 이게 무슨 일이냐고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날카로운 도구는 상처만 깊을 뿐 생각보다는 많은 고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보다는 차라리 플라스틱 자에 손가락을 맞는 것이 더 아플 것 같았다. 암환자는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들이 내 악성종양을 해결해 준 것에는 어쩌면 어떤 두려움이나 계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실은 그 암이 내 능력의 발전을 굉장히 빠르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이번에는 쇠막대기를 준비했다. 바닥에서 피 흘리던 9번을 생각하면 그들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약의 도움을 받으면 이 일이 조금은 수월해 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바보같은 짓을 결국 그만뒀다. 내 손을 망치로 내려친다고 해도 내가 당장 하늘을 날아다닐 능력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9번이 그렇듯 나는 스스로에게 가한 고통 때문에 성장하는 게 아니라 죽을 것 같았다. 즉 비약적으로 단숨에 성장해야겠다는 생각, 더 큰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죽음의 위기에 빠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한두 번은 성공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능력의 크기는 한계가 없었다. 나는 모험에 모험을 거듭하다 결국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말 것 같았다. 9번도 정확히 어떤 종류의 고통이 어떻게 능력을 키우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 만약 한없이 능력을 키울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9번이 계속 병원에 머물러 있었을 리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키워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나는 몸에 상처를 내는 위험한 방법은 포기했다. 

 

비교적 안전한 방법들 중에서는 내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극진제세교에 있는 교도들을 만나고 그들의 아픈 사연을 읽어 들이는 것이 가장 능력의 성장이 빨랐다. 나는 2일 동안 지쳐 쓰러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2일이 지나고 몸이 녹초가 되자 나는 내 능력의 성장을 노리는 이런 접근은 어느 쪽도 실질적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몇 년의 시간이 있다면 이런 접근이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내가 계속할 수 있는지 이런 식으로는 처음에만 능력의 발전이 있을 뿐 나중에는 다른 것이 필요한 건지도 나는 몰랐다. 내가 하는 일은 저기 쓰나미가 이미 몰려오고 있는데 그 앞에 방파제를 세우겠다고 자재를 모으기 시작하는 꼴이었다. 하나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뻔했다. 심지어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저들조차도 자신들이 모든 흐름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는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충분한 능력을 가지는 때에 집착하고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것은 제대로 된 접근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가진 것만을 가지고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미래에 가질 수도 있는 능력을 기반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충분한 권력과 충분한 돈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칸나와 사토와 하야토를 불러서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할 결심을 했다. 나는 짐을 나눠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칸나에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내 말은 앞으로 고통받고 심지어 죽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되겠죠. 하지만 우리는 이번이 아니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약간의 사업자금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이번 달 말까지 반드시 자신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가진 돈은 5천만원인데 이번 달 말까지 절대로 100억을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자신이 가진 정상적인 모든 방법들은 100억을 벌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절대로 100억을 벌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에 집착하고 그 생각을 고정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남는 것은 결국 5천만원어치 복권을 사거나 말도 안 되게 위험한 투자를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사고는 단순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성공할 가능성이 0이지만 복권을 사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작아도 0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뜻 들으면 합리적인 것 같은 이런 사고는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돈을 복권을 사는데 다 써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내려지는 이유는 바로 100억을 이번 달 까지 벌지 못하면 세상이 끝난다고,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이 소위 제가 말하는 무지의 벽으로 작동합니다. 우리는 그 생각을 너무 믿기 때문에 다른 생각만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상에 있었던 수 많은 선거들 중에서 이런 식의 말이 나오지 않는 때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선거날이 다가오면 누군가는 여지없이 이번 선거를 지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말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표현은 점점 더 극단적이 되어 갑니다. 이 선거를 상대편 후보에게 지느니 외국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자살을 해서 이런 더러운 세상 더 이상 안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식이 될 정도입니다. 물론 보통 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거날이 다가오면 너무나 손쉽게 이런 분위기가 생깁니다. 이번 선거를 지는 것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느낌입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은 이 선거에서, 이 승부에서 패배한다면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남기지 못하고 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참 안타깝습니다. 진작에 준비를 했다면, 진작에 좀 더 많은 힘을 비축해 두었다면 세상이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무력한 우리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금지된 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분노합니다. 

 

그런데 실은 선거에 져도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선거에 져도 세상은 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겨야 할 선거에 패배한 것은 정말 가슴아픈 상처를 남기며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어떤 때는 상상하기 싫을 만큼 큽니다. 우리에게 절대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남깁니다. 다만 세상도 역사도 정말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죠. 우리들에게는 만약에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은 일들이 때때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이후의 삶은 비록 지긋지긋하게 힘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대개 삶은 계속됩니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한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선거에 진 이유는 바로 선거에 결코 질 수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이득때문에 혹은 눈앞의 패배 때문에 손잡지 말아야 할 사람과 손을 잡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이유는 이번의 패배가 곧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행동들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습니다. 그리고 다음번에 또다시 결코 지지 말아야 할 싸움이 시작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 지난번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난번에 누군가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이번 싸움을 이길 수 있을텐데.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을까. 이번 싸움이야 말로 무슨 짓을 해서든 이겨야 하는 싸움인데.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패배에 대해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태도, 패배가 있게 된다면 차라리 그것을 있을 수 밖에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린다고 해서 우리가 성공하게 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는 거의 확실합니다. 즉 우리가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집착이 길게 보면 우리를 확실하게 패배하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을 포기하게 하고 진짜 어리석은 도박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합리성을 파괴합니다. 말이 좋아 도박이지 반드시 패배하게 되는 길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우리의 확률적 선택에 대한 감각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현대사회처럼 복잡한 것을 감각적으로 이해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도록 진화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요즘 세상은 이 조언과는 대개 반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세상에서는 패배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말처럼 흔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후배에게 부하직원이나 학생들에게 반복합니다. 모든 승부에 대해서 우리는 여기서 질 거라면 이대로 죽어버리자는 식으로 말하는 일이 많습니다. 진학에 성공하지 못하면,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연애나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면, 승진에 성공하지 못하면, 사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인생이 끝난 것처럼, 스스로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낍니다. 

 

우리는 모든 승부를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만드는 슈퍼히어로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보면 결국 핵심은 나로만 이어집니다. 세상은 한 사람의 노력과 결단으로 구원되는 것이고 승리와 패배는 결국 개인적인 문제가 됩니다. 즉 내가 방법을 찾아야 하고 내가 그 방법을 실행해야 하며 내가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내가 아니면 세상은 망한다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른 부분을 채워 줄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 나 나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미국식의 사고가 불합리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분은 하나의 메세지를 저에게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믿자. 인간을 믿어야 한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말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극히 단순하게 해석했습니다.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진짜 대화를 말입니다. 과장하지 않고 잘 모르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잘 모르는 것은 잘 모르는 대로 이야기하고 상담을 하는 것이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소통은 종종 폭력이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을 해놓고 당신이 못 알아듣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말이 좋아 토론이지 싸움을 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토론도 그렇고, 현대 기술을 이용해서 다수의 사람에게 메시지를 대량으로 뿌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고 정복하겠다는 행위이며 다르게 말하면 인간에 대한 포기입니다. 상대가 알아들을 리가 없으니 세뇌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매스미디어는 점점 집단적 합리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의 비합리적인 천성을 파고 듭니다. 핵심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작하는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타인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지나 다름없는 빈민들이 엄청난 부자들의 고민을 대신해 주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에서 집단에 이르기까지 어떤 의미에서 과장하고 정보를 숨겨서 타인들의 생각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교육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더 뛰어나 보이고 더 똑똑해 보이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걸 잘하는 아이들은 칭찬받고 그렇지 못하는 아이들은 열등한 학생으로 심지어 게으르고 비윤리적인 학생으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그런 걸 화법이라던가 당당한 태도라고 말하며 추천합니다. 아이들은 커서 사회인이 되고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도 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훌륭한 이력서를 쓰는 방법을 배우는 우리는 사실상 그 이력서를 읽는 사람의 뇌를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용될 만큼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우리의 이력서를 읽는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아주 깊이 뒤틀어져 있어서 우리는 타인의 생각을 조작하는 것을 거의 우리의 천성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혹은 남의 사고를 조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장 큰 거짓말쟁이를 능력 있다고 지도자로 뽑고 싶어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말을 어떤 추상적인 큰 단어들로 요약하고는 이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집단적인 비합리성은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 중에는 다리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말하길 요즘은 사실 다리가 있으면서도 가짜로 그렇게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그래서 자신은 길에서 다리장애가 있는 사람이 구걸을 하면 절대로 적선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은 오늘날 사방에서 일어납니다. 누군가가 정말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비명을 질러도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그 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왜냐면 너도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치와 권태에 찌든 사람들도 힘들어 죽겠다고 하니까 이제는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비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답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 토론회를 열면 답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초대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답을 모르면서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단순히 그냥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곳에 나가서 누구의 답이 맞는지 가지고 서로 싸웁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금새 잊어버리기 쉬운 것은 사실은 거기에 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세 사람들은 1번이 옳은지 2번이 옳은지를 가지고 투표를 하고 고민을 합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 갇혀서 그렇게 답을 찾으면 우리가 최선의 답을 찾은 거라고 믿어 버립니다. 진짜 정답은 우리가 완전히 무지한 그 작은 세계의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손쉽게 망각됩니다. 우리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아주 쉽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작은 능력으로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애초에 그 한계가 뻔한 것이지만 할 수 있을 때도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제가 제 능력을 써서 여러분의 생각을 조작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나는 사토를 보면서 이 말을 했다.

 

저는 어떤 비극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집착을 하는 것이나 어떤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비극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비극도 역사의 끝이거나 세계의 끝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으로 희망을 던져버려서는 안됩니다.

 

희망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되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세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이 세상을 누가 구한다고 할 때 그것이 꼭 우리가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어떤 방법이 더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할 하나뿐인 히어로가 아니라 거대한 그물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저는 진짜로 합리적인 방법은 바로 그 그물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없고 절망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진짜 절망, 진짜 탈출구가 없는 상황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개미의 절망이 세상의 진짜 끝은 아닙니다. 그것은 대개 개미의 오만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개미같이 유한한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믿는 여러분들에게 제가 아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다만 여러분들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제가 강조했듯이 이게 세상의 끝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어차피 세상은 끝이니 폭탄을 던지자, 칼을 휘두르자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 우리는 스스로 촛불을 켜야 합니다. 촛불을 모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지켜야 합니다. 촛불은 입으로 거센소리만 내도 꺼지기 쉽습니다. 폭력은 촛불을 꺼뜨릴 것입니다. 게다가 스스로 촛불을 켠다는 말은 누군가가 연단에 올라 모두 다 일사불란하게 촛불을 켜라고 명령해서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가진 촛불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밝히고 스스로 지키는 촛불이 필요합니다. 과장하지 않고 자기가 믿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촛불이 필요합니다. 좌절과 불신 때문에 대오를 무너뜨리지 않는 촛불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런 촛불이 세상을 가득 채울 때 그때 우리는 진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짜 합리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통과해서 흐르는 정보가 가장 합리적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책임한 폭로의 길도 아니고 무지한 민중을 내 맘대로 이끌겠다는 계몽도 아니며 중앙에서 모든 것을 결정해서 정의를 이룩하겠다는 독재적 쿠데타도 아닌 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저는 이것이 인간을 믿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코앞에 다가온 비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는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을 믿는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진짜 승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길 이외의 것은 승리처럼 보여도 승리가 아닐 것입니다.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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