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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26 (끝)

by 격암(강국진) 2018. 10. 18.

나쁜 꿈

 

 

26. 마지막 진실 (끝)

 

그건 낡고 촌스런 노란색 3인용 소파였다. 갑자기 나는 허름한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또 시간을 건너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하늘을 날았던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무실은 큰 데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옆쪽의 커다란 상황판에는 여러 개의 이름들이 써져 있고 그 밑으로 그들에 대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큰 사무실의 끝쪽에 있는 작고 지저분한 책상 앞에는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이 앉아서 뭔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뭔가를 고민하고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한다. 그 사람의 책상 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이름표가 올려져 있었다. 마치 그것이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라는 것처럼. 그런데 그 이름이 내가 아는 이름이다. 송병철. 송병철이다!

 

송병철은 약간 뚱뚱하고 지저분한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였다.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책상에서 오래 앉아 있었으며 야근을 계속한 것같은 사람의 전형적 모습이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기름진 머리칼을 가진 이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송별철은 어디선가 손을 다쳤는지 왼손에 붕대도 감고 있다. 왠지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다. 아무리 봐도 나를 살릴 수 있다던 그 신비로운 사람일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소리를 내서 내가 앞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진다. 

 

아. 잘왔어요. 잘 왔어요. 마침내 왔구먼. 

 

그는 소란을 떨면서 일어나더니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책상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놓고는 만든 지 오래된 것 같은 커피를 찻잔들에 부어서 들고 왔다. 우리는 커피잔을 책상 끝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커피는 형편없었지만 뭐라도 나에게 더 잘해주려고 하는 것 같은 그의 다정한 모습 때문에 분위기는 좋았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자기 찻잔에 든 커피를 마시면서 바로 입을 열었다.  

 

흠. 솔직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하죠. 사실은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아마 고작 5분정도랄까.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은 이상 5분이면 모든 게 끝날 겁니다. 그 5분 안에 당신은 수수께끼를 풀던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찾던가 하게 됩니다. 다음 기회란 게 있다면 말이죠. 사실 지금으로서는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건 정말 중요한 만남인 셈이죠.  

 

5분! 5분이라니. 내가 물어야 할 질문들은 너무 많았다. 질문만 하는데도 그것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정작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사람은 송병철씨인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나보고 5분 안에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안색이 변하면서 입을 열려고 하지만 그는 계속 말한다.

 

아. 그러니까 계속 들으세요. 지금은 질문하기보다는 들어야 합니다. 왜냐면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올바른 것이라야 그 답도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물론 뭔가를 배우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답에 근접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아직은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아직도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지금 무엇에 대해서 물어야 하는가.

 

왜 5분밖에는 시간이 없다는 거지요. 

 

왜냐면 5분후면 우리는 방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방해를 받아요? 누가 방해를 하죠? 

 

온 세상이.

 

온 세상? 내가 5분후면5분 후면 체포되거나 재입원된다는 뜻일까? 아니 그보다 그렇다고 한들 5분 후면 체포된다는 걸 어떻게 아나. 송병철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난 과학자였습니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였죠. 내가 관심있었던 건 인간의 환각과 의식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연구를 하다가 나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게 뭐죠?

 

간단히 말하자면 이 세계에는 심각한 일관성의 문제가 있더라는 거지요. 하지만 과학이나 제 논문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제 답이 아니라 당신의 답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저는 질문을 하게 되어 있고 당신은 답을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그러기 위해 깨어났듯 당신은 그러기 위해서 깨어난 거니까요. 

 

나는 내 발견의 의미를 사색하기 시작하면서 그걸 세상에 발표할 수도 없고 발표해도 소용이 없을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는 나를 숨겨야 된다는 것을 알았죠. 그런 걸 모르는 척,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나는 세상 속으로 숨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나고 아는 사람들과의 연락도 대부분 끊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공간을 만들었죠. 거기서 기다렸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당신들을 찾고 도와주는 겁니다. 

 

나를 도와요? 당신들?

 

그렇죠.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미 들었을 텐데요. 당신들은 불온한 생각이라고. 당신들은 이 세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불온한 생각들입니다. 중요한 일을 해 낼 씨앗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자신의 메세지가 뭔가를 구체적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고 나서는 나를 만나야 하는 겁니다. 기억납니까? 충격과 각인. 그게 요령이죠. 벽을 넘자면 충격이 필요합니다. 이 경우에는 제가 벽을 넘는 충격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여기서 뭔가를 배워서 그걸 확실히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가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이제까지도 나는 몇번이나 당신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 숨어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다릴 시간도 없습니다. 괴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고 세상은 완전히 끝나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요. 당신은 그러니까 성공해야만 하는 겁니다. 

 

나는 진실병원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죽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내 이전에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 사람을 찾아왔었을까?

 

제가 이 세계에서 중요하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죠?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그걸 해내지 못하면 온 세계가 죽는다는 겁니다.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온 세계가 죽어요? 지금 사람들을 죽이는 목소리에 대해 말씀 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것과 직접적 연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든 일에 대해 스무고개를 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중요한 건 사실 대화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 나를 봤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이미 뭔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게 뭔가를 스스로 일깨워야 합니다. 기억해 내야 합니다. 당신은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을 겁니다. 당신은 뭔가 이상한 꿈을 꿨을 겁니다. 그걸 합쳐서 당신은 답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우리는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파괴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상 밖에서 당신들을 기다려야 했던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면서. 우리가 가진 5분은 당신이 벌어들인 5분입니다. 당신에게 가까스로 생긴 힘과 용기입니다. 애초에 당신에게 내가 쪽지를 보내고 당신이 세상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시간을 쓴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당신이 뭘 배웠건 그건 다 이걸 위한 수단에 불과하죠. 그것 자체들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당신은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무슨 답을 말입니까?

 

송병철은 갑자기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세상에는 뭐가 없습니까? 아이에게 공평한 아빠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뭘 잊고 있습니까?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서 이 남자를 쳐다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난 이 남자가 일으킨 기적에 대해 질문하고 싶은데. 내 괴질을 고쳐줄 수 있냐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질문하고 싶은데 그런 말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분위기다. 게다가 그가 말한 5분은 이제 거의 다 되어간다. 뭘 답해야 한다는 걸까?

 

조용히 그를 쳐다본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이제는 뭐를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서 탁자를 쾅하고 친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언제 거울을 봤습니까?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송병철은 이것이 수수께끼에 대한 마지막 힌트라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심장이 아프다. 온몸이 조여 오는 느낌이다. 그가 말한 5분이란 괴질로 죽기 전의 5분을 말하는 것일까? 그가 말한 5분은 짧았고 나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수수께끼는 그대로 있고 그는 더 이상의 힌트는 허락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혈압이 오르는 듯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아파왔다. 아무 일도 안하고 앉아있던 내가 숨을 헐떡인다. 이제 정말 죽는 것 같다. 벌써? 아직은 좀 더 시간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진행이 엄청 빠르다. 그러나 만약 죽는다면 이왕이면 수수께끼를 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그것이 두려웠는데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자 놀랍게도 죽는다는 그 사실 자체를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는 느낌보다 수수께끼의 답에 대한 욕망이 더 커졌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쪽지를 보냈고 어떻게 나를 살려줄 생각이었을까? 

 

나는 겨우 말했다. 당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난 그걸 알고 싶습니다. 

 

송병철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냉정한 눈빛이다. 그는 대답없이 나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파온다. 죽음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다. 나는 죽어서 시체가 되고 물질이 되고 없어질 것이다. 나는 저 탁자처럼 될 것이다. 나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몸이 얼음에 들어간 듯 이미 차가워지는 것 같다. 이제 죽는 것일까? 또다시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이 세상을 끝내라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는 언제나 세상을 채우고 있다. 왜 나에게는 계속 이 세상을 끝내라는 목소리가 들릴까?

 

죽음의 직전에 이르자 이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자잘하고 의미없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척하던 것들이 본모습을 들어내고 모두 의미 없는 일로 부서지고 무너져간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이제 진짜 중요한 것만이 내 앞에 남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하나의 엉뚱한 사실이 기억났다. 내 아이는 하나가 아니다. 내 아이는 둘이다. 나는 딸아이가 아니라 사내 아이도 하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송두리. 

 

숨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나는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책상이 내 빰에 느껴진다. 심장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할 것처럼 크게 들린다. 가슴이 터질 것같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송병철은 무서운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천천히 박수를 친다. 그는 나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일까? 

 

눈이 감긴다. 세상이 컴컴하다. 몸이 가라앉는 것같다. 머리가 점점 천천히 돌고 세상이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내가 지금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전에는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송병철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지금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다. 나는 눈을 조심스레 떴다. 한 남자가 보인다. 아직 시야가 흐려서 눈코 입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나쁜 꿈이 생각난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던 얼굴 없는 사내. 이건 뭔가. 내가 꿈을 꾸는 것일까. 그러나 이 남자의 얼굴은 금세 또렷해진다. 그 순간 새로운 생각들이 몰려온다. 그러면서 주변이 갑자기 확실하게 또렷해진다. 

 

괜찮습니까?  

 

그 남자가 묻는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자기 이름을 말해보세요. 

 

내 이름? 내 이름이 뭘까? 

 

옆에 서있던 한 여자가 말한다. 

 

섬망이 온 걸까요? 

 

내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내게는 천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 이름?

 

내 이름은 송병철입니다. 이름을 말하는 나의 입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겠어요? 

 

그 남자가 묻는다. 무슨 일이라. 무슨 일이지? 맞다. 사고였다. 내 몸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린다.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맞아요.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송병철 씨는 수술을 받고 2주간 깨어나지 못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송병철 씨가 이렇게 깨어났으니 매우 잘된 일이로군요.

 

방 밖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아내다.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에 그랬듯이 나를 많이 걱정하고 사랑해주던 그런 아내다. 그녀는 깨어난 나를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2주간이나 깨어나지 못했었다니 걱정했을 것이다. 아내가 사람들이 포기하라고 했다면서 더더욱 운다.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나 보다. 

 

나는 거울을 부탁해서 내 얼굴을 봤다. 머리를 미라처럼 붕대로 칭칭감고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바로 꿈속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던 송병철이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만나야 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걱정 많이 했다는 말을 한다. 힘없는 웃음이긴 하지만 웃음을 지으면서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줬다.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꿈속의 일들이 엄청난 속력으로 잊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꿈은 강렬했고 나는 한참을 꿈과 현실 사이의 어딘가에서 서성였다. 아마도 나는 조금 뒤면 그 꿈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저 병실 문이 열리고 칸나와 아키히로가 들어올 것 같았다. 꿈이 잊혀 가는 동시에 내가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똑같이 맹렬한 속력으로 나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서운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진다. 심장이 맹렬히 뛴다. 몸이 식어가는 느낌이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나는 물어야 한다. 비록 이미 그 답을 알지만 말이다.  

 

두리는?

 

두리는 나의 두번째 아이다. 내 꿈속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두 번째 아이. 아내는 대답 없이 엉엉 울기만 한다. 나는 사실 답을 알고 있다. 나를 이렇게 다치게 했던 자동차사고에서 두리는 죽었다. 두리가 죽었다. 나는 정신을 잃기 전에 내 옆에 앉아있던 그 아이가 살아나기 힘든 상태가 되는 것을 이미 목격했다. 그것은 부모로서는 차마 다시 떠올릴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억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내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나쁜 꿈속에서 내가 우물밑으로 던져 버린 건 바로 나의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기억하고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었다. 두리의 기억이 있는데 정작 두리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두리가 없는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나도 죽고 싶었다. 그 우물은 바로 내 숨겨진 기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물론 나는 변명을 할 수가 있다. 그건 우발적 사고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두리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 수 있는가? 나는 절대로 그런 기억을 가지고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워버린 세상에서 시시한 삶을 살고 있었다. 

 

두리를 생각하자 눈물이 나왔다. 그렇다. 내 아들 두리는 이제 없다. 그런 말을 속으로라도 한다는 사실이 내 몸을 마구 떨리게 한다. 나는 다시 어두운 문을 열어 그 안으로 기억을 던져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다시 눈을 감고 두리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붕대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다. 내가 본 것을 어떻게 해서든 지워버리고 싶다. 나는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도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참는다. 나는 두리를 사랑한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문다. 나는 두리를 지우지 않는다. 나는 두리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니까. 아이를 기억해 주지 않는 아빠처럼 불공평한 아빠는 없으니까. 그리고 두리가 없는데도 빌어먹을 삶은 계속될 것이다. 악다문 내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비명인지 울음소리인지가 스며 나왔다. 두리가 없다. 두리가 없는데도 이 삶은 계속된다! 나는 결국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말았다. 

 

우리는 스스로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죽이기 위해 가짜 세상을 만든다. 원했던 것을 원한 적이 없다고 하고, 한 때 가졌던 것을 그런 것은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사람사는게 다 그렇지 않냐고 한다. 그 세계는 우리 스스로가 희망을 추방시킨 세상이며 희망이 없기에 시시해진 세상이다. 우리는 희망과 정열을 던져버린 어두운 우물 위로 문을 닫아건다. 그리고 그 우물을 숨기기 위해 그 위로 온갖 것을 던져 올린다. 우리에게는 이론이 있고 우리에게는 단어들이 있다. 이론과 말들이 그 어두운 우물 위로 거대하게 쌓여감에 따라 우리는 어느새 그 우물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 우물은 있었던 적이 없고 우리는 애초에 희망과 열정을 가졌던 적이 없다. 세상은 본래 이렇다. 우리는 무엇도 잃어버린 적이 없고 누구도 죽인 적이 없다. 세상은 뻔한 곳이다. 

 

그 세계는 덜 고통스러운 세계지만 무의미한 세상이고 대개는 좁고 초라한 세계였다. 그건 진짜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론이란건 대개 초라하고 뻔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좁고 초라하며 뻔하다고 믿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피하기 위해 사방에 무지의 벽을 쌓아 올린다. 열지 않는 방문을 만든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피하는데 아주 능숙해진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사소한 거라고 말하고 보는데 익숙해진다. 그리고는 희망을 뭔가 대단하고 화려한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찾는 물건을 스스로 작은 방에 던져놓고 그 작은 방을 계속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실을 찾아온 세상을 다 뒤지지만 답이 있는 곳만은 뒤지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실패해도 우리에게는 싸구려 오락과 집착할 것과 분노할 것과 술이 있으며 동료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만든 가상 세계 속에 있으면 그 세계는 매우 튼튼해진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어 보일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잘못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치료를 받는다. 그것은 망각의 치료다. 

 

숨을 고르고 눈을 떳다. 아내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방을 둘러본다. 아내는 울고 있다. 나를 위한 것도 있지만 두리를 위한 울음이다. 이 세계는 두리를 기억하는 세계다. 아내는 나를 이 세계로 불러오고 이 세계에 머물게 하는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아내와 딸이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계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이 연결이 나를 이 세계에 계속 머물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연결이 나로 하여금 이 세계에 더 큰 의미를 주게 만든다. 모든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은 하나의 세계에 머무를 수가 없다.  

 

의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친절한 얼굴로 말한다. 

 

송병철씨, 세상에 다시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렇게 나는 이 세계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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