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꿈
21. 교사의 메시지.
우리가 한 방향으로 똑바로 간다고 하자. 그래서 누군가를 만났다. 그럼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었던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그 사람을 지나 똑바로 다시 갔더니 그 사람과 똑같아 보이는 사람이 또 나오는 거야.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이미 지나쳤으니 이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일 리가 없지. 따라서 설사 두 번째 만난 사람이 아까 그 사람이 자기라고 말해도 그건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인 거지. 이건 논리적으로 확실한가?
이것 봐. 그건 좀 이상한데. 우리가 지구 같은 둥근 공위에 있다면 곧장 앞으로 가서 한 바퀴를 돌면 다시 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바로 그거야. 논리라는 건 말이야. 항상 그 배경이 되는 것이 있고 나서야 존재하는 거라고. 우리가 같은 세계에 있고 나서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것이지. 나는 평면 위에 있는데 너는 둥근 공위에 있으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지.
문제는 말이야 세계야 세계. 나의 세계 그리고 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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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과학의 세계는 실질적으로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연금술이나 마법 혹은 음양오행설 같은 것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건 아주 소수의 사람이고 오늘날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모두 한 가지 과학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는 자기들만의 개념들을 써서 자기들만의 과학을 만들어 나가는 그런 장소는 이미 세상에 없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하나의 국제공용어 혹은 과학이라는 공통의 종교를 가진 셈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전 세계에서 각각 흩어져서 일하면서도 과학지식의 최전선에서, 각자 자신이 전공한 특정한 분야에서 지식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증가하는 지식들은 어디까지나 단일한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과학의 일부분으로서 과학을 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업화하여 누적시킨 과학적 지식의 양은 실로 방대하여 오늘날에는 누구도 과학을 모두 알 수가 없습니다. 박사학위가 있다고 해도 다들 점점 작아지는 분야 안에서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과학은 단일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지식이나 문제풀이는 특정한 전문가에게 의존하면 됩니다. 내가 풀지 못하고 내 동료가 그것을 풀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 과학자가 궁극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비과학적 논리를 사용해서 그것을 풀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1+1=2라고 푸는데 내 동료는 특별한 지적도 없이 1+1=3이라고 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푼 게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내 동료의 논문에서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하면 나는 내 동료의 과학적 설명을 반드시 그리고 미련 없이 포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설명이 제공하는 세계 혹은 물질적 세계는 우리를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누구도 과학 자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물질세계에 던져집니다. 우리는 뉴튼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어진 물질세계를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걸 관찰할 뿐입니다. 우리들 중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도 그것을 그저 약간 확장할 뿐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던져진 물질적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탐험해서 조금씩 더 알아나갑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되어질뿐이며 적어도 아직은 우리의 삶의 일부에 혹은 우리가 우리의 정신세계라고 부르는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교에서 예술 문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과학은 보조적인 역할만을 합니다. 과학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컴퓨터가 자동적으로 만들어 내는 그림이나 음악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누군가가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랑스러운 음악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정확히 정의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소설을 과학적으로 만들고 있지도 않습니다. 컴퓨터가 인간 없이 법정이나 정부를 대신해야 하고 대신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 지를 인간없이 컴퓨터가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 없는 자동 시스템 안에 아이를 집어넣어서 아이를 키울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 잘못을 종종 저지릅니다. 그것은 과학을 할 때처럼 우리가 다른 활동을 할 때도 우리가 같은 세상에 있다고, 우리가 단일한 시스템 안에 있다고 믿는 착각입니다. 과학을 포함하는 정신의 세계는 과학의 세계처럼 일관성 있게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신의 세계가 두 개로 되어 있다거나 세 개로 나뉘어있다고 구체적으로 숫자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만 정신의 세계는 마치 세상에 여러 개의 종교가 있는 것처럼 여러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세상이 여러 개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일관된 논리로 인식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철학적 야심가들이 그걸 시도했습니다만 세상은 오히려 점점 더 하나인 것과는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한 인간이 수용하기에는 그것은 점점 더 지나치게 복잡하고 거대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세상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할 때 그리고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과학분야에서 과학자가 그렇게 하듯이 정신적인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 새로운 묘사와 관찰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농민 문학은 농민의 삶을 그리고 노동자 문학은 노동자의 삶을 그리며 여성 문학은 여성의 삶을 그리겠지요. 저는 여기서 문학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사실 우리 개인 한 명 한 명의 삶과 관찰은 그 자체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정보고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전국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종종 우리가 과학자가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러한 무수한 관찰들과 설명들을, 우리 각각의 이야기들을 모두 끌어 모으면 그것이 과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체계가 되고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정보는 무조건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더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정신의 세계와 우리의 삶은 어떤 주어진 동굴을 더듬어 탐험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동굴의 오른편은 이렇게 생겼고 왼편은 이렇게 생겼으니 동굴의 전체적 모습은 이렇다는 식으로 종합될 수 없습니다. 과학자가 그렇게 하듯이 오른편은 내가 보고 왼편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본 것을 합칠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가정하고 혹은 어떤 세계의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우리가 뭘 보게 되는가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제한적인 정신적 활동입니다. 그 결과 그것은 체계를 세우기 쉽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과학을 모르면서도 과학의 일부를 발전시키는데 참여하고 그렇게 발전한 과학의 혜택을 입을 수 있습니다. 배터리를 만들거나 자동차를 만드는 법을 내가 몰라도 나는 그것이 과학적 논리에 따라서 실험되고 제작되었을 것을 믿습니다. 그 안에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괴물이 들어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포함하는 정신의 세계 전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일한 체계가 아닙니다. 이미 단일한 체계가 아닌데도 오늘날의 인류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쏟아내며 그것을 더 복잡하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에서처럼 어떤 한 개인은 그걸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는커녕 개인의 능력의 한계로 인해서 우리는 점점 더 세상의 작은 구석에 갇히게 됩니다. 축구선수나 요리사나 과학자가 될 때 우리는 사실 축구밖에는 모르고 요리밖에는 모르고 과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 분야만 해도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단기간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는커녕 요즘은 학부모로서 아이를 키우는 일만 해도 너무나 복잡합니다. 대학입시나 유치원 교육에 대해서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에게 물어보면 그분들이 그 분야를 이해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즘은 뭐든지 공부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계란도 골라먹고 바지도 공부해서 사 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갇힙니다.
하지만 종종 착각되는 것과 달리 삶과 정신세계는 단일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문가에게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전문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세계에 있지 않을 때 전문가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도 없고 따라서 전문가의 말을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일식이 언제 일어날 까에 대해서는 그 원리를 이해 못 해도 과학자의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이며 정치며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어떻게 떠들든 결국 끝에 가서는 그 답을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도 스스로 자신들의 말의 끝에서 판단은 스스로 하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그들도 책임을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에 부딪힙니다. 아주 흔한 한 가지 대응은 우리가 아주 작은 세계 속에 틀어박히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몸의 주변과 자기 내부만 보는 것입니다.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저 교육층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종종 이런 작은 개인주의적 삶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기댑니다. 우리가 각자 자기의 작은 삶을 살면 저절로 이 세상이 최적화된 답을 찾는다는 자유주의적 생각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지 않기 때문이죠. 같이 살려면 우리는 같은 세계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남과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된다면 우리는 예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고 법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뒤에서 칼을 든 살인범이 쫓아오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해달라고 조언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1년에 10억 엔을 버는 사람이 자기보다 1000분의 1을 버는 사람에게 탐욕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비극은 사실 여기서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같은 장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늙어 죽으며 부모가 했던 일을 자식도 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섞입니다. 우리는 낯선 공간으로 가야 하고 그곳의 낯선 규칙 아래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현대의 도시에 던져진 원시인 같은 입장에 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며 따라서 냉혹하고 바보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이 경우에 과학에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전문가에게 의존하고 맡기는 것은 가능한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가 좁은 세계에 머물면서 모르는 것을 전문가에게 묻는다면 그 전문가가 주는 답은 그 안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괴물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집속의 전구가 고장 났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전문가라는 사람이 포클레인을 끌고 와서 여기저기 건드리더니 결국은 그 집을 철거해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회에게 자식의 교육에 대해 상담했더니 사회가 그 자식을 빼앗아 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떤 사람에게 부탁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대개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만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우리의 삶이 펼쳐지는 세계는 앞에서 말한 물리적 세계와는 달리 능동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칙에 대한 지식보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냥 당연하고 유일하게 주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수동적으로 세상을 보고 정보를 끌어모으면 저절로 알게 되고 확장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 가야 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까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우연히 주어진 대로 혹은 남이 우리에게 정해준 대로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걸 자기 생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뿐 이미 주어져 있어서 우리가 탐험하여 알아가는 동굴 같은 곳이 아니라 우리가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 집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그의 책 무지한 스승에서 이것을 해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런 믿음 없이는 이성도 없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두 번째 결론도 첫 번째 결론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두번째 결론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더욱 더 우리는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리고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관심과 애정의 망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은 오늘날 지극히 취약합니다. 말그대로 대도시에 갑자기 떨어진 원시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날이 더 복잡해져가지만 인간은 천년이나 만년전과 유전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결국 점점 무능해져가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첫번째 결론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그저 유한한 인간인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사용도 서툰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해야 하며 자기의 세계를 확장하라고 조언하는 것만으로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안간힘을 다한다고 해도 혼자서는 시대에 점점 뒤처지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또한 이 복잡한 세상에 어린아이들 보고 알아서 자기의 삶을 만들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비현실적입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잔소리나 이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하는 비정한 곳이라는 현실론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관심의 망입니다. 기성세대는 가장 먼저 우리가 그것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사는 건 본래 힘든 거라는 말 따위를 젊은 세대에게 하기 전에 말입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외로워지면 오늘날 그들의 삶은 너무 위험하고 힘들어집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작디작은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는 다시는 그곳을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인의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외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성세대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공동체 따위는 잊어버리고 경쟁에 이기는 것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고통은 참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외로워진 아이가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은 둘째로 치고 능력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통능력이나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는 아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게 됩니다. 물론 아이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노인들로 채워져 가고 노인들의 자살률은 더 높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믿어야 합니다. 연결되어야 합니다. 폭발적으로 복잡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신뢰의 망은 절체절명의 생명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것이 끊어지면 그들은 이용당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인 가족이 파괴될 때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공동체가 파괴된 동네는 건설자본의 먹이가 됩니다. 공동체가 파괴된 사회는 국제자본의 먹이가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의 손을 놓지 말고 그 인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그것 없이는 살아가기 더욱 어려워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대 자본은 거꾸로 그런 것은 거추장스럽다고 선전합니다. 많은 직장들은 가족 따위는 귀찮을 뿐이라고 암시합니다. 건설회사는 이웃 따위는 귀찮다고 말합니다. 국제자본은 국가에 대한 애정, 역사와 전통에 대한 애정 따위는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런 세상이 그들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는 시공을 초월하는 법칙들을 찾아서 그걸로 세상을 보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도 거대 규모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도 구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구하는 것은 결국 애정 어린 어른의 관심과 손길이지 무슨 무슨 주의자의 범세계적 일반론에 기초한 교육정책이나 호화로운 교육시설이 아닙니다.
22. 자명한 해답
긴자의 고급 바 블루 문은 겉으로 보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게 평범하게 생겼다. 블루 문이라는 이름도 손바닥만 한 명판에 새겨져서 붙어 있을 뿐이다. 바깥으로 난 창이 없는 벽에는 그저 문이 있을 뿐이며 딱히 크게 번쩍이는 조명도 없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은 거기에 가게가 있는 줄도 모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 바는 길가는 사람들을 마구 불러서 영업하는 가게가 아니었다. 사토에 따르면 이곳은 멤버나 멤버에게 소개받은 사람만 오는 클럽하우스 같은 가게였다.
하지만 그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안쪽은 생각보다 크고 매우 화려했다. 스타일은 100년 전쯤 스타일이다. 테이블이며 소파며 조명들이 모두 일제시대나 19세기의 유럽을 연상시킨다. 그러면서도 매우 깨끗해서 마치 타임머쉰을 타고 어느 화려한 궁전에 간 것 같다. 이것은 일본이 미국에 전쟁에 지기 전을 그리워하기 때문일지도 몰랐고 아니면 일본이 유럽에서 수입한 고급 취향이라는 것이 보수적으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일본에서는 역사와 전통이 없으면서 고급 행세를 하기는 어렵다.
나는 오늘 극진제세교에 큰 자금을 대주고 있다는 한 사람을 만나러 왔다. 사토에 따르면 아주 중요한 말을 할 것이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도 이렇게 교에 돈을 대주는 사람들을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세부적인 이야기는 다 사토와 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만나는 것은 그저 확인용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들은 당연히 교의 지도자가 바뀌었다는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사토가 건재하며 사토가 실질적인 교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놀라움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중하게 부탁하기는 했지만 꼭 교의 사무실이 아니라 이 긴자의 바에서 만나자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나의 실종사건 이후 나에 대한 경호는 크게 증가했다. 나도 이런 일정은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그는 이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블루 문을 하루 동안 세를 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토는 설명했다.
사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통상은 불가능한 일인데요. 일본 총리가 하려고 해도 안될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토는 나를 데리고 블루문 앞으로 차를 몰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차에 기다리겠다면서 나만 블루문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요즘 꽤 피곤하게 살고 있었지만 나는 알았어야 했다. 사실 사토 정도의 남자를 차에서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은 블루문을 통째로 빌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내 경호에 호들갑을 떨던 사토가 나를 긴자로 끌고 온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의 핵심은 바로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블루문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의 능력자를 발견했다. 게다가 전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나보다 엄청나게 능력이 뛰어나거나 깨어있는 능력자라는 뜻이었다.
블루문을 통째로 임대하는 불가능한 설득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리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극진제세교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 보호는 능력자들에게는 그다지 뚫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 바에 총을 든 사람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바텐더에게 어떤 술이든 좋으니 코냑을 온 더 락으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양주를 잘 몰라서 그렇게 밖에는 주문할 수가 없다. 자리에 앉기 전부터 패배감을 느꼈던 나는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를 생각 중이었다. 이미 이 상황에 놀랐기 때문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건 더 놀랄 것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나는 4번이네. 아마 9번에게 내 소개를 들었겠지?
이 남자의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바로 그 스탠드 옆에 서있던 얼굴 없는 남자다. 나는 크게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오늘은 어째 처음부터 반말이시군요.
그야. 구면이니까. 게다가 이제 자네는 상황도 조금 더 파악했고. 동료가 아닌가.
동료라. 4번은 마치 내가 병원에서 허가를 받고 퇴원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피 흘리고 쓰러진 9번이며 그를 두고 탈출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럼 미리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아니 몰랐지. 사실 난 9번 그 친구를 아주 좋아했거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대비했겠지. 설마 9번이 목숨을 걸 줄은 몰랐네. 그거 아나? 우리 조직에서 그렇게 오래 9번처럼 병원에 내버려 둔 사람이 없어. 그렇게 오래 버틴 사람도 없지만. 사실 나 말고도 9번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 친구가 죽었다는 말에 다들 슬퍼했다네. 다들 그 친구를 좋아하고 존경했지. 그래서 그런 일이 가능했어.
죽었다. 결국 9번은 살아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가면서도 나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던 9번이 생각났다.
그래서 불렀네. 자네는 9번이 남긴 유산 같은 사람이니까. 직접 얼굴도 보면서 술도 같이 한잔하고 싶었어. 어쩌면 머지않아 자네가 9번이라고 불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면서 4번은 나를 살피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직은 좀 먼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 남자에게 뛰어 들어서 목을 졸라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9번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있기도 곤란했다.
그거 아나. 난 자네가 좋아. 자네는 재능이 있어 보이고 나를 많이 닮았지. 9번이 아마 말해줬을 텐데 대부분의 각성자는 10대나 20대에 각성하지. 나도 자네처럼 이공계였지. 엔지니어였네 그리고 딱 40살에 각성했지. 나중에는 친구가 되었지만 내가 각성했을 무렵에 만났던 9번은 이미 정말 대단했어. 나와는 아주 격차가 아주 컸지. 그래도 나를 높이 평가하고 나를 이끌어 준 것이 그 9번이었네. 덕분에 내 인생은 단기간에 아주 크게 바뀌었지. 나랑은 동갑이었고 9번이 겸손해서 그렇지 사실 처음에는 내 스승이자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어.
4번은 9번과 친구라고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20살은 젊어 보였다. 염색을 한 거겠지만 머리에는 흰머리도 하나 없었고 전체적으로 몸에는 아직도 근육이 있어 보였다. 이마가 약간 넓어 보였지만 테니스나 수영이 내 취미라고 말할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왜 그런데 가뒀습니까? 은인이라면서. 9번은 거기서 쥐처럼 사는 것이 비참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질문을 던졌다. 4번은 내 말을 듣더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죽이기는 싫었으니까. 자네도 오늘 나와 대화를 끝마칠 때쯤이면 알게 될 걸세.
그럼 이제 저는 다시 그 병원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냐. 병원을 나간 뒤에 어쩌나 봤는데 일을 잘하고 있더군. 자네가 성급하게 교를 움직여서 우리 조직에 대해서 캐려고 했거나 이번 거사를 막으려고 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자네는 죽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네는 그렇지 않더군. 흐름에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않았어. 주변에 사람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 것 같더군.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거야. 자네가 합리적이고 무모하지 않다는 증거지. 그러면 되네. 자네는 지금으로서는 병원에 돌아갈 필요가 없어. 우리도 말이야. 극진제세교의 지도자를 두 번이나 납치하는 일은 안 하고 싶다네. 죽이는 일도 말이지. 일이 번거로워지니까.
나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얄밉게 침착했다.
그럼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자네를 내가 좋아해서가 하나고 자네 같은 인재는 쉽게 버리기 아깝다는 것도 있고 내가 9번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고. 가장 큰 이유는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네에게 자네가 좋아하는 진실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지.
내가 좋아하는 진실?
내가 말해주고 싶은 것은 두 가지 일세. 그걸 듣고 생각을 잘해 보길 바라네. 우선 나를 한 번 보게. 자네는 내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가?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사실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제는 자네도 알겠지. 이 경우에 가능한 답은 둘 중의 하나뿐일 세. 하나는 내가 각성상태에서 다시 잠들어 버린 능력자가 아니라는 거야. 자네처럼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거지. 또 하나는 내가 자네보다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지. 자네는 이 중의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저보다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나시겠죠. 저야 이제 각성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사람인데요.
나는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뭐야 겨우 능력자랑을 해보겠다는 건가?
시간이 있으면 능력이 커지는 것은 맞아. 하지만 재능의 문제도 있고 경험의 문제도 있으며 각오의 문제도 있네. 자네는 나처럼 능력이 빨리 자라는 사람이지. 게다가 최근에 신도들을 만나고 다니지 않나. 그러면서 자네 능력은 빠르게 커졌을 걸세. 그러니까 나 만큼은 아니라도 자네도 이미 병원에 있을 때와는 다를 걸세. 그런데도 내 마음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질 않지. 그렇지 않나?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4번이 이끄는 조직은 고사하고 4번 한 명과 비교해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능력이 떨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며칠을 꽤 각오하고 고통을 참았는데도 나는 마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자기 주제를 알고 자제하라는 것이 첫 번째 진실입니까?
맞네. 하지만 아직 나는 첫번째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어. 내가 왜 4번일 것 같나? 4번은 우리 조직에서 능력이 4번째라는 뜻이네. 그리고 말해주겠지만 내 위의 3번은 깨어있는 자가 아니네. 그래도 나는 그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가 없지. 내 능력은 그와 비교가 안된다는 뜻이야. 나는 그저 일본 조직의 대표일 뿐일세. 전체 조직의 대표가 아니야.
9번도 이걸 알았지. 그는 지금은 결번이 된 9번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자네가 기죽을까 봐 말해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것이 있었어. 그도 내가 3번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몰랐지. 그는 나를 천재처럼 취급했으니까 아마 나와 3번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3번과 나는 지금도 엄청난 차이가 나지. 그리고 나는 벌써 19년째 4번이네. 이게 첫 번째 진실일세.
이제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내가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자네와는 비교할 수 없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4번이 당연히 자기 사명을 잊어버리고 출세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깨어있는 사람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런 사람이라면 이 조직에는 4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3명이나 더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두 번째 진실을 가르쳐 주지. 자네는 정말 극진제세교가 말도 안 되는 거대한 테러를 준비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물론 자네는 여러 보고서를 봤을 것이고 사토가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네.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그런 테러를 수십 년간 준비하고 대놓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조직에 끌어들였는데 그런 정보가 정부에 흘러들지 않았을까? 정부가 그렇게까지 무능할 수가 있을까?
4번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사실 나는 분위기 때문에 일이 벌어진다고만 생각했을 뿐 이런 테러가 정말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잘 알지 못했다. 사실 정보가 새지 않았을까? 진작에 정부가 이런 반정부 세력을 토벌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 지금이라도 정부에 정보를 내보내면 극진제세교는 진압되는 거 아닐까? 왜 내가 진작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4번은 생각에 잠긴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와 비슷하다고 말했지. 그런 말을 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네가 하는 일이 나와 비슷해서 그렇지. 다만 스케일이 다를 뿐이네. 자네는 심리전을 펼치겠다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싸우게 하려고 하더군. 그들은 서로 죽일 것처럼 싸우겠지만 알고 보면 다 극진제세교의 후원을 받는 사람들이지. 후원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싸우는 사람들은 피 흘리며 싸우고 다른 사람들은 그 혼란에 말려드는 거지. 이편이건 저편이건 알고 보면 다 같은 곳에서 후원을 받는데 말이야.
4번의 말을 듣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우리가 곧 일본 정부일세. 아니 일본 정부도 반정부군도 모두 우리 꼭두각시라는 말일세. 우리가 일본 정부를 공격하는 게 아니야. 이미 세상은 우리가 모두 차지하고 있어. 공격하는 사람도 방어하는 사람도 다 우리 편이지. 언론에 폭로하고 싶은가? 언론도 우리 편이야. 경찰도 법원도 학교도 우리 편이네. 다 돈과 인맥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자네가 정부로 들어가서 정부를 지키고 싶다면 정부 편에 넣어 줄 수도 있어. 이건 그런 게임일세. 이게 바로 두 번째 진실이지. 이 대단한 거사도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는 쇼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자네가 우리의 동료가 되기를 거부하고 싸우겠다면 자네는 이런 상대와 싸우겠다고 하는 것일세.
4번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사소한 것을 말해주지. 자네의 능력을 9번이 살렸을 거네. 더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 작은 능력을 가진 사람의 능력을 되살릴 수 있지. 그 말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뜻이네. 나는 약 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자네의 능력을 없애버릴 수도 있네. 자네와 나의 능력의 격차가 크니까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야.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일은 나를 불필요한 위험에 빠지게 하지. 흙탕물 싸움을 하다 보면 흙탕물이 나에게 튀기도 하니까 그런 일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해. 그리고 내가 항상 말했듯이 나는 자네가 좋고 자네의 미래에 기대가 크네.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아.
4번은 자기 할 말을 끝마치고 술잔을 들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그렇게 다 가졌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뭘 위해서 저 불쌍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겁니까?
나도 그걸 생각해 본 적이 있지. 그걸 물어본 적이 있고. 자네가 그걸 묻는 이유가 뭔지도 알아. 자네는 아직 우리의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묻고 있는 거네.
게임?
게임이라는 말이 좀 가볍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건 인생과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가벼운 건 아닐세. 하지만 게임은 게임이지. 이건 권력 게임이야. 규칙이 존재하고 결과가 존재하지. 권력은 생명 같은 것이지 뭘 하기 위해 존재한다기보다는 그냥 존재하니까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려고 할 뿐이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기도 전에 권력게임에 참여하는 셈일세. 그러는 가운데 다른 권력들과 부딪히고 나름의 선택을 하고 살아남거나 혹은 죽어버리는 거지. 이건 그런 게임일세.
내가 자네에게 한 말 때문에 자네는 오해를 했을지도 몰라. 우리가 가장 큰 권력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배후에서 일일이 결정하고 조정한다는 것이지. 심지어 뭐든지 들어줄 수도 있고 말이야. 우리가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건 사실이 아냐.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저 정치나 종교에, 나아가 세상에 기생하고 있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은 민중일세. 사람들이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바다처럼 폭풍우와 큰 파도를 가지고 있지.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그런 자연적인 흐름에 잠시 저항할 수도 있고 그 자연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약간 바꿀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와 세상을 공존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좋아하기도 해.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지. 그걸 일일이 우리가 다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흐름에 계속적으로 저항한다면 우리도 망할 걸세. 다시 말해 자네가 말하는 비극이란 우리가 일으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중이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것일세. 우리가 없다면 아마 더 큰 비극이 있을 걸세. 어떻게 말하면 우리라는 권력을 만들어 낸 것도, 그것이 계속 존재하기를 허락해 주는 것도 민중이야. 이렇게 말할 때의 우리는 사실 작은 존재에 불과하네. 세상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우리는 그저 자기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란 말일세.
생각해 봐. 자네는 정말 자네가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바꾸겠나. 간단한 거라면 되겠지. 그들에게 핸드폰을 요구한다던가 이 블루문 같은 바를 요구한다거나 하는 거라면 될 거야. 하지만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자네와 똑같이 만드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할 걸세. 수십 년 동안 이것저것 마음을 바꿔도 그들은 끝없이 자네와 다르게 생각할 거야. 거북이와 갈매기는 결국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들은 보고 듣는 게 다르니까. 입장이 다르니까.
세상을 남과 다르게 보는 능력이란 사실 저주에 가까워. 자네는 안타깝게 여겨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될 걸세. 자네와 다른 세상에 있는 그들이 안타깝겠지. 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들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을 걸세. 그들이 아무 대책 없이 고통받는 것을 보는 일이 또한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갈매기와 똑같이 살게 된 거북이가 있다고 해도 그 거북이가 그 상태를 불편한 것으로 생각하고 행복하지 않게 여긴다면 어쩌겠나. 날지 않는 거북이가 갈매기에게는 답답해 보이겠지만 거북이는 설사 땅 위를 기어다니다가 갈매기가 볼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그냥 땅위를 기어 다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어. 갈매기는 거북이에게 대개 환영받지 못하네. 그들은 갈매기가 되라고 말하는 갈매기가 아니라 공짜로 거북이에게 먹이를 날라다 주는 갈매기를 원하는 것뿐이야. 한두 번이 아니라 노예처럼 영원히 말이지. 민중은 때로 가장 잔인하네. 게다가 자네가 원하는 것이 그들의 행복이면 설사 그들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답이 없어.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 뿐이네. 우리는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네. 각자 자기의 삶을 사는 거지. 우연히 생긴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우리는 그저 각자의 삶을 사는 거야.
나는 그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권력의 한 가지 특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권력은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네가 나에게 행사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하는 권력행사란 없으며 권력의 본질은 차별과 분리다. 권력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너는 나와 다르고 우리는 각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논리적 결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우리가 결론처럼 본 것은 사실은 시작일 수 있다. 즉 너는 나와 다르고 우리는 각자 살아야 한다라는 관점 자체가 권력이란 것을 존재 가능하게 만들었고 권력 다툼이라는 게임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럴듯하게 들리는 그의 말은 일종의 순환논법이었다. 예를 들어 축구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이 잔디인 게 좋다. 세상이 축구라는 게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잔디가 좋다는 것은 논리적 판단이 만들어 내는 합리적 결론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잔디가 축구라는 게임의 규칙을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격투기 선수에게는 세상이 링처럼 보이고 장사꾼에게는 세상이 시장처럼 보이는 거 아닐까. 나는 이 점을 그에게 지적했다.
아마도 자네가 맞을 걸세.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더 상황은 비극적인게 아닐까? 권력의 본질이 차별과 분리라고?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 차별과 분리없이 민중과 진짜로 하나로 살 수 있는가? 그들은 자네의 간섭을 원하지 않고 자네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며 지금의 삶은 지옥같다고 불평하면서도 동시에 지금의 삶이 그나마 최상이라고 말할 걸세. 그들은 자네와는 다른 세상에 있으니까.
자네는 큰 권력자나 부자만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권력게임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더 권력게임에 빠져 있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으며 그들의 그 작디작은 세계를 지키려고 뭐든지 하지. 부모는 자식과 며느리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교수는 학생들에게, 직장상사는 부하직원들에게 목사는 신도들에게 그렇게 하네. 개혁이란 그런 걸 바꾸는 거야. 그들이 정말 그걸 좋아할까? 자식은 자신의 자식을 가지고, 후배는 자신의 후배를 가지며 부하직원은 자신의 부하직원을 가지는데? 세상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간단히 나눠지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사 그럴 능력이 된다고 해도 사실은 넓은 세상을 보려고 노력도 안 해.
게다가 왜 자네의 세계만 옳은가? 자네가 이 세계가 하나의 객관적 세계이며 그걸 계몽해서 좋은 세계로 만든다는 발상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네. 순진한 아이들은 그런 걸 믿으며 자신이 독재적 사고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독재타도를 외치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의 생각은 독재고 자기의 생각은 당연하다는 거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면서도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는 것이 이런 아이들의 생각이네. 세상을 얼마든지 다시 재조립할 수 있는 레고처럼 생각하지. 하지만 말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복잡해져 가는 시스템은 끝없이 꼬이기만 할 걸세.
그게 아니고 자네가 이 세상이 하나로 통합 가능한 세계로 이뤄져 있지 않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묻게 되지. 왜 자네의 세상만 옳은가? 왜 자네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중요한가? 자네는 그저 그들에게 잘난 척을 하려는 것인가? 결국 돈과 권력들의 주변으로 모여든 집단들이 권력게임을 하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자네가 그들과 하나로 살 수 있는가?
결국 누구도 타인의 비극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결국 내가 말한 대로 각자의 수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권력게임에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겠나. 다시 묻겠지만 자네는 정말 그들과 하나로 살 수 있는가? 한두 명이나 몇 명의 가족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 조직의 소수 엘리트와는 그럴 수도 있을 걸세. 하지만 민중이라면 어쩔 건가. 민중과 하나로 산다는 건 바다에 소금기 없는 물 한 컵 뿌리는 것밖에 되지 않을걸. 그걸로 바닷물의 맛이 변하나? 누구도 구하지 못하고 자네와 자네의 가족만 희생당할 걸세. 자네는 그런 일을 기꺼이 할 생각인가?
나는 쉽게 그러겠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 쉬운 맹세 따위는 부끄러운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들을 잘 생각해 보게. 그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반면에 우리와 함께 하는 길은 얼마나 쉬운 것인지도 생각해 보게. 그럼. 9번을 추억하며.
술잔을 비운 4번은 술잔을 내려놓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나는 반쯤 비운 술잔과 함께 블루문에 남겨졌다. 나는 4번을 반박할 수 없었다. 9번이 생각났다.
너무 하십니다. 너무 하십니다. 이런 걸 저보고 뭘 하라고 하는 겁니까.
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나서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거사는 5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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