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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9-10

by 격암(강국진) 2018. 9. 2.

나쁜 꿈 

 

 

9. 실연은 왜 아플까?

 

그녀가 멀어져 간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텅 빈 집에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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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은 아프다. 그런데 왜 아플까? 우리는 종종 애인과 헤어진 사람이나 이혼한 사람에게 세상에 남자나 여자는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연한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정말로 소중하고 하나뿐인 것을 잃은 사람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에 아이가 죽은 부모에게 가서 세상에 애들은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이런 말은 지극히 위로에 서툴고 상황에 무감각한 사람이나 던지는 이야기다. 함부로 부주의하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오랜 친구를 잃어버릴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말했을 때 세상에 남자나 여자가 많다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그저 애인이거나 배우자 였던 사람 하나를 잃은 것이다. 세상에 사람은 많고 다들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실연 때문에 죽지만 않는다면 또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산다. 새로운 사람이 생기고 옛날의 상처는 아주 작아지거나 없어진다. 그러니까 실연의 상처는 대개 팔이나 다리가 잘라지는 것처럼 치유 불가능한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실연은 왜 그렇게 아플까? 실연이 아픈 이유는 주로 두가지다. 첫 번째는 우리가 단순히 사람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고 싶고, 같이 하고 싶은 어떤 것과 분리되고 그곳으로부터 거절된 것이다. 그것은 내 집이나 고향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장소로부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상징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에게 다리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절망을 준다. 없어진 것은 그저 다리 하나가 아니다. 다리와 함께 꿈도 사라졌다. 실연을 했을 때 없어진 것은 그저 사람 하나가 아니다. 그 사람 하나와 함께 꿈도 사라졌다. 때로 우리는 사람을 잃지 않았는데도 우리의 꿈이 벌써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실연을 당한 것처럼 쓸쓸해진다. 

 

실연이 아픈 이유에는 두번째 이유도 있다. 그것은 나를 거부하고 버린 그 사람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거부함으로써 나는 관계를 이어갈 만큼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실연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무가치한 사람이고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었던 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평상시에도 언제나 찬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우리 자신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경험을 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쉬운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참 바보 같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우리는 여러 가지 변명들과 위로의 방법들을 쓸 수가 있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던가, 이번에는 재수가 없었다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 금방 좋아질 거라던가 하는 희망의 말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꼭 우리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힘을 내고 부정적인 생각을 비교적 쉽게 떨쳐버린다. 

 

그런데 애정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고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바로 그 사람이 너는 남자로서 가치가 없다거나 당신은 내 배우자가 될 자격이 없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물론 그 사람이야 말로 바보이며 눈이 잘못된 사람이며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연을 하는 경우 대개 이러한 반박은 공허하게 들린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을 굉장히 가깝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남들도 모르는 나의 깊은 속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들여다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연을 할 때 우리는 일종의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된다. 실연은 우리에게 너는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꽤 강력한 증거를 내민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다시 믿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가 힘든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나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만나 새로운 관계를 가진 다면 아니 심지어 별 관계가 있었던 적도 없는 짝사랑의 상대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 쉽다. 

 

그 사람은 되는데 나는 왜 안되지?

 

실연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실연은 이렇게 아프다. 실연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힘을 빼앗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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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딸이 사라진 후 나는 빈 집에서 혼자 지냈다. 나는 몇번인가 그들과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또 한 번 나를 외면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는 것은 한 번도 많다.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혹 그렇게 해서 진실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그 진실은 더욱 더 두려운 것일 수도 있었다. 확실히 나는 진실을 끄집어낼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실의 문이 열렸을 때 그 안에서는 말할 수 없이 무서운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하루 이틀 시간은 흘렀다. 나는 현실을 계속 외면했고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항상 그다음 날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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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실연이 왜 이렇게 아픈가를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의 전부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실연이 아픈 것이 위의 두가지 이유 때문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다 위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아픔은 일종의 실연의 아픔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긴 애초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왜 아픔을 겪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인에게 행하는 일 중에서 가장 심한 짓은 아마도 그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실연을 겪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실망하고 싶어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그렇게 하거나 심지어 그 사람이 우리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타인에게 실망하기를 피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나를 실망시킨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라. 우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느꼈을 때 얼마나 괴로웠던가.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폭력이나 경멸보다, 우리가 겪었던 어떤 역경보다, 우리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의 실망 어린 시선에 깊이 상처 입는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포기했다는 생각에 깊이 상처 입는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그것을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일로 좌절하는 것은 대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의심하게까지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고 연결되고 싶어하며,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실망 어린 시선을 받게 되면 그것은 정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예를 들어 한 대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이 학생이 정말로 존경하는 교수로부터 자네는 틀렸어라는 시선을 받게 되거나 나는 너에게는 흥미가 없다는 태도를 경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여기 한 소설가 지망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쓰레기는 처음 봤다는 평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나 그녀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아직 어리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에게 정말 충분한 재능이 있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아니 사실 소수의 정신병자를 제외하면 젊건 나이가 많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재능을 의심하게 된다. 인간의 기대치와 야망은 금세 부풀어 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국가대표가 되기 전에는 일류의 선수가 될 재능이 없을 것을 걱정하지만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당연해지면 이제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지 못하는 것에 좌절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이 재능이 충분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며 자신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노력해도 안 될 것을 걱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불량품 판정을 받는 것보다 치명적인 일은 없다. 옛말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는데 이것도 결국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길은 하나 뿐이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해 왔던 그 사람이 사실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그 길을 택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대신에 스스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 비난과 실망의 시선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르면 나는 구제 불능이다. 희망이 없다. 실망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같이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과의 연결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같이 놀고 싶은 친구들과 더 이상 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뒤에 남겨지고 버려진다는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이 있을까. 

 

존경하는 작가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짝사랑이 깨지는 실연과 비슷한 것이다. 또는 믿었던 친구가 사소한 일상속에서 나를 무가치하게 취급한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에게 실연과 같은 아픔을 주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던가 나와의 약속을 깼다던가 혹은 친구가 내가 부끄럽다는 듯이 나를 모른 척했다던가 하는 사건들은 어찌 보면 별거 아니지만 실은 꽤 아프다. 우리의 자존심에 꽤 깊은 상처를 남긴다. 친구들과 노는 것에 관심이 없어도 같이 가자고 제안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니 그런 일들은 가급적이면 없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실망과 거절의 시선을 보내는 남들을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를 생각해 보면 이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남들에게 쉽게 실망하고 있는가? 사소한 외면 때문에 깊게 상처를 받는 사람도 자신이 남을 외면 할 때는 그것이 그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때는 오히려 억울해하기도 하다. 그건 그저 작은 거짓말이고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뭔가. 나는 나를 그렇게 존경해 달라거나 사랑해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주목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에게 가볍게 던진 말이 그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된다면 그걸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기준이라고? 나는 그런 책임을 떠맡겠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는 냉정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 그들도 냉정하게 우리에게 실망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아픔이 드문 일이 될 수가 없다. 

 

 

10. 극진제세교

 

내 온몸은 부서지는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그건 폭발할 것처럼 붉어져 있을 것이다. 내 앞에서는 의미 없고 흐릿한 영상들이 지나갔다. 그 장면들은 아주 가끔씩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한 번은 피로 물든 손이 보였고 다시 영상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영상은 다시 굉장히 흥분한 사람의 시각을 보여줬다. 그 사람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마치 금방 미칠 것처럼. 나는 그 사람이 말하는 한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죽인 거야.

 

그러고 나서는 눈앞이 차츰 밝아지는 것 같더니 갑자기 엄청 밝아졌다. 눈은 차츰 빛에 적응했다. 이제 세상이 분명히 보인다. 나는 지나치게 오래 잠을 잤던 사람처럼 머리가 맑지 못했다. 상황이 잘 파악이 안 된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푹신한 1인용 가죽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호두나무 협탁이 있었고 옆쪽으로는 4인용 소파가 놓여있다. 오른쪽에는 큰 텔레비전이 있었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고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에서는 호텔 로비 같은 곳에서 틀어줄 것 같은 음악도 나오고 있었다. 이건 큰 사무실처럼도 보이고 아파트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실내를 보면 누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거실 같은데 왼쪽으로는 큰 문이 하나 있었다. 아파트의 입구라고는 보이지 않는 두 짝 문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것일까? 조금 전만 해도 나는 와코 시에 있었는데? 문득 머릿속에 순간이동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이제 나는 못하는 게 없어진 걸까? 

 

하지만 순간이동이란 게 내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왠지 순간적으로 여길 왔다기보다는 밀림을 헤치고 온 느낌이었다. 몸이 여기저기 쑤셨다. 게다가 그러고 보니 내 옷도 달라졌다. 나는 동네 쇼핑몰에서 파는 싸구려 재킷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건 굉장히 비싸 보이는 정장이고 신발도 고급 구두다. 

 

천천히 내 눈은 주위의 벽을 따라 달렸다. 모퉁이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서 있었고 그 옆쪽으로 극진제세라는 글자가 새겨진 나무 간판이 보인다. 거실의 한쪽 벽에는 비싸 보이는 오래된 오디오와 스피커가 있다. 다시 내 눈은 바닥을 향한다. 마찬가지로 비싸 보이지만 촌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카펫이다. 전반적으로 이 방의 분위기는 고급이지만 90대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눈이 바닥을 지나 다시 내 앞에 있는 협탁으로 돌아왔다. 쟁반 위에는 얼음 박스와 크리스털 잔 그리고 코냑병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결재할 때 쓰는 서류철 같은 것이 보였다. 협탁의 한쪽 끝에는 오늘의 날짜를 보여주는 기계가 있었는데 10월 15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10월 15일?

 

나는 깜짝 놀라서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와코 시에서 수업을 했던 것은 1주일 전이었다. 나는 순간이동 같은 것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1주일을 건너뛰었다. 여기는 어디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쟁반에서 코냑병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그러자 큰 문의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그 문 바깥에도 책상이 있었다. 여기는 분명 사무실 같은 곳인가 보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교사님?

 

흰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는 바닥을 재빨리 치우더니 질문을 한다. 

 

교사? 젊은 여자의 머리에서는 여러 가지 마음의 소리들이 들렸다. 하지만 워낙 상황이 말이 안 돼서 나는 그게 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들은 것은 이 여자는 나를 교사라는 신분으로 알고 있으며 내가 어떤 명령을 내려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보건대 이 여자는 나도 모르는 내 비서 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좀 한가한데 말이야. 지금 이야기 상대가 돼줄 만한 사람이 없을까?

 

한가할 때의 이야기 상대 말이십니까?

 

그렇지.

 

한 사람이면 되겠습니까? 

 

아. 그렇지. 

 

네. 곧 준비하겠습니다. 

 

비서인 듯한 여자가 나가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문에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들어오라는 내 말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쏟아진 코냑을 대체하려는 듯이 술이 든 크리스털 병을 쟁반에 받치고 들어왔다. 일단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은 여자는 입고 있던 얇은 코트를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 안쪽에는 속이 다 비쳐 보이는 망사옷밖에는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엄청난 가슴을 가진 여자였다. 

 

방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뭔가 한가할 때의 이야기 상대라는 것에 대해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방의 인테리어도 그렇고 지금 들어온 아가씨의 복장도 그렇고 고약하기 짝이 없다. 뭔가 다 할아버지 취향 같았다. 

 

하지만 나는 놀랐다고 표시 낼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게 잘된 건지도 몰랐다. 상황을 너무 잘 아는 사람에게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 옆에 아가씨를 앉히고 이름을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사였다. 

 

아리사.

 

네. 교사님.

 

눈을 감고 내 말을 잘 들어봐. 그리고 내가 말을 하면 그것에 집중하는 거야. 다른 생각 말고 말이지. 말은 할 필요가 없어. 그냥 그 말에 대해서 집중해서 떠오르는 것들을 생각하는 거야. 내가 다른 단어를 말할 때까지 말이야. 

 

네. 교사님.

 

우선. 이 방이 아리사에게는 어떤 이미지지?

 

생각대로 그녀가 이 방에 대해서 집중하자. 그녀로부터 이 방에 대한 정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가 어딘가요 같은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는 대신에 내 특기를 써먹기로 한 것이다. 단어를 던지고 마음을 읽는 것이다. 잘되면 그것만으로 나는 어떤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않고도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았어. 그다음에는 극진제세교는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리사는 극진제세교라는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사색이 되더니 울면서 바닥에 꿇어앉는다. 아리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교사님. 

 

그녀가 너무 흥분해서 나는 오히려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겨우 아리사를 달래서 이것은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좋았어. 그럼 교사는 어떤 느낌이지. 

 

아리사는 움찔하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그 단어에 집중했다. 

 

나는 이렇게 한 시간을 아리사와 스무고개 놀이를 했다. 그리고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주고는 아리사를 내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비서를 불러서 태블릿 컴퓨터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컴퓨터로 내가 알아낸 말들을 검색해 보았다.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나는 내가 알아낸 것에 대해 좀 더 많은 증거가 필요했고 내가 무슨 일을 했던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옆에 서있는 텔레비전을 보자 아리사가 강연 영상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동영상을 선택해서 가장 최근의 강연을 골랐다. 플레이 스위치를 누르자 강연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한 강연자를 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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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진제세교는 본래 교주가 다카키 시게노부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60년대에 일본 학생운동 단체인 전 일본 학생 자치회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가 내부적으로 안보투쟁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하자 시게노부는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교회로 피신했다. 그의 명분은 교회의 이념화를 통해서 일본을 구하는 길에 기여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대로 안보투쟁에 남아 있을 경우 후일 강성 테러리스트가 되는 적군파 친구들에게 끌려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으로는 강성파였지만 속으로는 겁쟁이 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총알받이로 쓰이는 것은 좋아했지만 그 반대는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안보투쟁 속에 남아있을 경우 자신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교회로 피신한 시게노부는 형식적으로 활동을 계속했는데 문제는 그가 교회 사람들의 이념화에 지나치게 성공했다는 점에 있었다. 본래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 사상에 익숙했던 다카키 시게노부는 구세주 신앙과 메이지 유신 음모론을 합쳐서 설파하여 자신을 세상을 구할 구세주로 만든다. 

 

그 시작은 메이지 유신 세력을 절대악으로 비판하고 일본 민족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것에서부터였다. 본래 주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구원할 민족으로 선택된 일본 민족은 패전이라는 아픔을 겪을 수 없는 민족이었다. 패전이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메이지 유신 세력들이 알고 보면 조선에서부터 건너온 태생이 잘못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메이지 유신 이래로 대를 물려가며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고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에도 일본의 지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을 응징하고 일본을 정화하면 혼탁한 세계는 드디어 일본 민족에 의해서 구원되게 될 것이다. 

 

다카키 시게노부는 기도를 하는 도중에 신으로부터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명은 충실한 신앙인들을 모아서 이와같은 성스런 작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전쟁의 아픔 속에서 일본 정부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았다. 즉 일본 정부에 대한 미움이 절대적이었고 민족의식에 대한 상처로 괴로워하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만으로 다카키 시게노부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믿어졌다. 구체적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절대악이 존재하고 질문이 멈추는 곳에는 믿음이 있었다. 모든 의혹과 다른 의무들은 그 절대악과 싸우는 것의 뒤로 미뤄졌다. 

 

시게노부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능력이 있었고 일본 정부를 적으로 천명했으며 일본을 피로 씻어 내리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느새 극진제세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신앙 집단에는 똑똑한 사람들도 하나 둘 늘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세뇌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게노부가 일본 적군파는 사실은 자신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도 극진제세교의 신도들은 그것을 믿으며 자신들의 차례가 오면 용감히 나가서 싸우다 죽으리라는 결의를 다졌다. 

 

극진제세교는 일본의 버블 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난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호텔이며 리조트, 주차빌딩과 사무빌딩을 가진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지금 내가 있는 사무실도 교에 속하는 한 리조트 건물의 맨윗층을 통째로 리모델링해서 만든 곳이었다. 극진제세교는 그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 내부에 스파이 조직을 운영했다. 그 일부는 자위대에도 침입했다. 극진제세교의 교도는 어디에나 있었다. 

 

시게노부는 구원의 사상을 설파했다. 즉 훌륭한 신앙인으로 남으면 언젠가는 세상을 구원하여 의미있는 삶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리라는 것이고 극진제세교가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상이다. 훌룡한 신앙인이 되는 첫번째 조건은 물론 다카키 시게노부를 믿는 것이었다. 아무리 의심이 드는 이상한 점을 보게 되어도 시게노부를 의심하는 것은 중죄였다. 그런 죄는 엄청난 재산을 헌납하거나 믿음을 배신한 다른 교도를 처벌하고 감옥에 가는 명령따위를 수행하는 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속죄되어 질 수 없었다.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조건은 그밖에도 많이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는 사실 시게노부 밖에 몰랐다. 예를 들어 왜 젊고 아름다운 여성 교도들이 시게노부에게 쾌락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훌룡한 신앙인의 길인지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게노부에게 의심을 가지는 것은 죽음으로 보상해야 하는 중죄였다. 뭐든지 시게노부가 말하면 그것이 바로 훌룡한 신앙인의 자세요 의무가 되었다. 그리고 시게노부처럼 기존의 교도들은 새로이 포섭된 신입교도들에게 자신들에게 모든 면에서 복종하는 것이 훌룡한 신앙인이 되는 기본 조건이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층층의 계급구조가 만들어지고 그 계급의 피라미드 안에서 절대적 복종은 구원을 위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도들의 삶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극진제세교의 교도들은 교의 재산을 늘리고 사회 내부의 영향력을 증진시키는 교도로서의 의무를 행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는 일상 속에서 그들은 성취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심지어 아직 구원받지 못했지만 이미 행복하다고도 느꼈다. 매일 매일의 일상속에서 교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교에 의해서 쓸모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만족감을 주었던 것이다. 교세가 워낙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의 조직에 기대어 살고 있었고 따라서 극진제세교와 그 교주를 자신을 구원해 준 고마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교의 가르침은 워낙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금지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신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하나는 속죄의 길이었다. 그들은 죄를 짓지만 속죄를 함으로써 다시 구원의 길로 돌아갈 수 있었다. 때문에 솟아오른 질문은 다시 억눌러졌다. 죄는 저질러졌지만 속죄를 통해 다시 성실한 교도로,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속죄의 길이란 극진제세교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 주는 일이었고 시게노부에게 더욱더 충성하며 그의 쾌락을 위해 더욱 더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이 모든 어려움이 구원과 함께 끝난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복종하는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면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계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지와 억압의 시간에는 끝이 있었다. 사람들이 마음에서 솟아나는 의혹을 꾹 눌러 참으며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속죄를 하면 즉 좋은 교도로 계속 남으면 결국 구원의 때가 올 것이었다. 구원의 시기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희망은 교도들로 하여금 현실을 견뎌내게 했다. 시게노부는 그 구원의 때는 임박했다고 강연을 통해 매주마다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게노부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가 극진제세교에는 있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시게노부는 웬만한 거짓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 철면피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미 한 말을 뒤집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구원이 오리라는 것 그리고 메이지 유신 세력에게 지배당한 이 땅을 폭력으로 정화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극진제세교가 부자가 되고 테러의 준비가 완벽해 질 수록 겁쟁이 시게노부는 궁지에 몰렸다. 교의 교리상 교도들은 점점 더 맹목적으로 폭력적이 되어갔다. 사실 아무리 한 종교집단이 준비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들이 테러를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그동안 말해 왔던 행동의 때가 실제로 오면 극진제세교와 시게노부는 끝장이 날 것이었다. 시게노부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는 극진제세교가 신의 축복을 받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양심과 윤리 때문이 아니라 테러의 실행이 가져올 뻔한 파국 때문에 시게노부는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거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는 그저 몇 사람을 벌하는 사소한 것을 위해 이렇게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극진 제세교는 운이 좋았고 돈이 많았다. 시게노부가 아무리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를 세워도 그것을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시게노부는 생각했을 것이다.

 

맙소사. 다들 미친 거 아냐. 왜 이렇게 능력이 좋은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왜 결단의 때가 오지 않는가에 대한 시게노부의 변명은 옹색해져 갔고 그러면 그럴수록 늙고 추한 시게노부는 술과 여자에 빠져들었다. 아리사에 따르면 그는 많은 여자 교도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나였다. 나는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보안을 뚫고 시게노부의 강연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시게노부에게 신과 하나 된 내가 신의 의지를 전하려 왔다고 선언했다. 신은 구원을 준비했는데 시게노부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기성세대는 더욱더 큰 죄를 짓게 되어 세상이 감당해야 할 아픔은 크게 증가했다고 시게노부는 죄인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나는 교도들에게 단호하게 외쳤다. 

 

더 많은 어른들이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이 세상을 오염시킨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이 썩어빠진 세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극진제세교의 교도들이 단순히 이런 말에 넘어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 앞에서 굴복했다.

 

매주 행하는 교주의 강연은 생방송으로 교도들에게 배포되고 있었다. 아리사도 교도로서 생방송으로 이 상황을 봤다. 이 아리사가 이 일들을 떠올릴 때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을 읽는 능력을 써서 다른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들을 말했을 것이고 그런 이적을 보이는 것이 교도들에게는 내가 신의 사자라는 것의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늙고 쾌락으로 머리가 둔해진 시게노부에게 조차도 말이다. 시게노부야 말로 자신이 신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 마음속의 말을 척척 끄집어내는 내가 신의 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클라이맥스는 시게노부의 죽음이었다. 교도들 앞에서 신의 사자를 자처한 내 앞에서 시게노부는 쓰러져 죽었다. 괴질에 의한 죽음이었을 테지만 교도들은 그것을 신의 처형으로 생각했다. 시게노부의 자리를 차지한 나는 교도들에 의해 교의 스승 즉 교사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는 구원은 정말로 멀지 않았으며 그것은 몇 년이 아니고 몇 달도 아니며 불과 몇 주일이 남았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런 나에게 극진제세교의 강성 집단들은 환호했다. 대기하는데 지쳐있었던 그들에게 나는 정말로 신의 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최종 점검하고 내가 실행 명령을 내리면 그간 수십 년간 준비해 왔던 테러를 한꺼 번에 실시해서 일본을 정화하겠다는 계획이 즉각 세워졌다. 나에 대한 교내의 의구심은 그런 전망 때문에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은 그게 누구든 누군가가 스위치를 눌러줄 사람을 기다라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 나타난 것에 만족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 테러 계획은 일본, 나아가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내 탁자 앞에 있던 서류철의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세 가지 테러 계획이 나열되어 있었다. 

 

1. 도쿄 스카이트리 폭파. 항공기 2대를 동시에 탈취하고 이를 스카이 트리와 충돌시켜서 무너 뜨린다. 

2. 일본의 모든 중의원들을 암살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구금 후 살해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모든 중의원들에게 한 팀씩의 타격 조들이 배당되어진다. 

3.  일본의 총리 아베 신조는 특별히 전국에 생방송이 이뤄지는 중에 암살한다. 

 

서류철의 뒤에는 이 모든 계획들이 이미 20년 전부터 계속 변형되어 가며 준비되어 왔기 때문에 최종 점검이 필요할 뿐 준비가 완벽하다고 보고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걸 한날한시에 동시에 실행해서 일본을 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일본이 신의 국가 즉 신국임을 선포한다고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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