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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나쁜 꿈

나쁜 꿈 : 5-6

by 격암(강국진) 2018. 8. 25.

나쁜 꿈

 

 

5.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저녁

 

그녀가 영어회화 수업의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예의상 책상을 조금 밀어서 자리를 넓혀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종종 그렇게 하듯이 희미한 미소로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한다. 다행히 그녀도 마찬가지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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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처음 만날 무렵에는 유달리 나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는데 나는 당시의 기준으로 결혼 적령기에 도달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한국도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많고 실제로 혼자 사는 사람도 많으며 결혼적령기라는 것도 많이 늦어졌다. 하지만 그 즈음에는 한국은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결혼할 상대가 없다고 하면 계속 질문받고 변명하며 살아야 했다. 결혼하지 못한 인간은 아직 제대로 살기 시작한 인간이 아닌 느낌이었달까? 부모들도 자식을 결혼시키는 것까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결혼 적령기에 가까이 다다갈 무렵이면 학교 후배나 알고 지내던 이웃 아주머니나 무엇보다 어머니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내게 적당하다 싶은 여자들 혹은 나같은 남자를 찾을 지도 모르는 여자들에 대한 소개가 들어 오기 쉬웠다. 우리 어머니만 해도 내 박사학위가 늦어질까봐 자제하고 있었을 뿐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리 저리 고려해 본 아가씨들이 꽤 많았던 것같다. 나에게 자신의 딸을 보여주겠다는 친구들의 부탁을 아직 연애나 결혼은 이르다면서 한동안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는 그런 소개가 쏟아지기 전에 아내와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만남의 장소에 많이 나가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한 소개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두번 그런 소개의 자리에 나가 본 결과 내가 가졌던 생각이 옳다는 느낌만 받게 되었다. 

 

그런 소개의 가장 큰 문제는 소개 받은 사람이 좋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소개의 가장 큰 문제는 소개의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미 알게 된다는데에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을 소개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가 끼어 든다. 이런 것들은 서로 합쳐지고 화학반응을 일으켜서는 소개 받는 사람들의 사이에 벽을 만든다.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을 미리 죽여 버린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소개받은 만남은 일종의 게임과 같다. 우리가 축구를 할 때 우리는 축구의 규칙을 따른다. 우리가 야구를 할때면 우리는 야구의 규칙을 따를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를 소개를 받아서 만난다라는 사실이 그 만남을 이미 어떤 규칙이 정해진 게임으로 만든다. 물론 그 게임은 언제나 같지는 않다. 소개한 사람이 부모님이냐 직장동료나 후배냐에 따라 다를 것이고 서로 만나는 두 사람이 이미 결혼 적령기에 이른 성인 남녀냐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어리거나 나이가 많냐에 따라서 또 어디서 만나는가에 따라서 만남의 규칙은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만남들에는 그런 차이를 덮고도 남을 공통점이 있는데 그 만남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가 연애의 가능성 심지어 결혼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평가하도록 짜여진 만남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런 만남의 장소에서 우리는 대학원에 새로 들어온 여자 후배를 만난다던가, 편의점에서 계산을 할 때 점원인 아가씨를 만날 때와 똑같은 자세로 이야기를 하게는 되지 않는다. 일단 말하는 쪽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지만 만약 어느 한 쪽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십중팔구 반대편 사람은 불쾌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만남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자세가 내가 이미 상대방에게 실망했다고 느끼게 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한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런 만남은 어떻게 해도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 만남이 된다. 그리고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면 평가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것에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성을 소개받는 자리에 가서는 적어도 처음에는 꽤 정중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이 피할 수 없는 정중함은 바로 게임의 규칙의 일부이며 이미 진짜 연애를 시작하기 어렵게 만드는 벽일 수 있다. 물론 그 벽은 넘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벽을 쌓아 놓고 사람을 만나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그 벽을 넘자면 두 사람은 그 예의를 언젠가는 발로 차버려야 한다. 두 사람은 비지니스 만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건 대성공이 될 수도 있지만 매우 큰 불쾌감을 남기는 대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이런 소개의 만남들이 진짜 연애로 발전하는 빈도는 상상 이상으로 낮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남을 여행에 비교한다면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고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만남이란 미리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리조트 같은 곳에 가는 여행과 같다. 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고 리조트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여행은 종종 실망스럽다. 밥을 먹으면 전에 다른 곳에서 더 맛있는 것을 먹어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보면 이 침대보다 더 좋은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에 대해 이런 저런 조건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언제나 더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거나 앞으로 볼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어느 조건으로 따져도 하나도 흠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상대가 당신에게 소개되고 더구나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게까지 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복권당첨만이 삶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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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둘이서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은 생각해 보면 가장 어려운 난관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그 말을 했는지 나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그녀가 허락했고 나는 매우 기뻤다는 것이다. 내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이런 대화가 아니었을까?

 

밥한번 먹으러 갑시다.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도 같이 밥 먹을 수 있는거 아닌가?

 

나는 말해놓고서 괜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덧붙힌 어리석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쓸데없는 말은 해가지고는.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말한다.

 

그래요. 가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끼리 하는 식사. 

 

당당하고 씩씩했던건 언제나 그녀 쪽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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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만남은 그것이 미리 계획되고 설계될 때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나온 통조림들 중의 하나같은 성질을 가지게 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통조림 통안에 든 것이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단 한 명의 사람을 만나지만 사실은 계획과 설계의 차이에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대신에 그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를 만나거나 언니나 여동생을 만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실 나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준 여자 후배가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소개 받는 대신 그 여자 후배와 데이트를 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론 가능한 모든 만남을 실제로 다 해볼 수는 없지만 그걸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단 한명의 사람을 보면서도 우리는 잠재적으로 수백명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나에게 이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통조림을 뽑아 들었을까? 아닐 것같다. 아무리 이 사람이 괜찮아 보여도 이 사람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 중에 최고의 상대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심리학자 베리 슈월츠는 현대인은 지나치게 많은 선택의 가능성때문에 고통받는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청바지는 그렇게 많은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몇개중의 하나의 청바지를 고르는 대신에 수백가지 이상의 종류에서 한가지를 고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보통 우리는 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선택의 자유가 폭팔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선택을 하는 일에 쓰게 되고 그래봐야 결국 골라든 하나의 청바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그냥 던져버렸던 다른 청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청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어떤 청바지를 골랐던 우리는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것도 있다.  그것은 이제 선택에는 어떤 의식적인 기준이 등장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청바지가 너무 많으니까 그냥 이게 좋다는 느낌만으로는 아무래도 답이 안 나온다. 자꾸 비교하다보면 점점 확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식적 기준을 정해놓고 이 청바지는 이래서 좋고 저 청바지는 저래서 틀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 하나의 후보 청바지들을 제외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한 끝에 우리는 드디어 청바지를 하나 골라드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런 과정은 종종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든다. 

 

한 심리학 실험에서 있었던 일이다. 실험자는 피실험자들에게 몇개의 포스터중의 하나를 선물로 가져갈수 있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 그런데 한무리의 사람들은 그냥 선택을 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나는 이게 왜 좋은가 나는 이게 왜 싫은가를 이야기한 후에 선택을 하게 했다. 즉 한쪽 사람들은 고의로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한 후에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주가 지난후 실험자는 피실험자들에게 다시 자기가 선택한 그 포스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가를 물어보았다. 이런 실험을 해본 결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포스터를 선택한 사람들쪽은 평균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즉 이리저리 이유를 따지고 고른 사람들보다 그냥 마음에 끌리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나중에도 계속 그 포스터에 만족을 표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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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은 무척 쑥쓰러웠다. 하지만 일단 둘이 탁자에 앉게 되자 어색한 것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화제는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장래에 대한 이야기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 혹은 어디선가 들은 썰렁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내 어설픈 이야기에 집중해 주는 여자, 그리고 내 농담에도 크게 잘 웃어주는 여자가 그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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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를 고르는 일과 포스터를 고르는 일쯤은 한두번 실패해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연인이나 결혼할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 이르면 이것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한번의 연애의 실패, 한번의 결혼의 실패가 우리의 삶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된다. 문제는 오늘날 연인이나 결혼할 대상을 고르는 일은 정확히 청바지나 포스터를 고를 때 생기는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너무 많아서 고민을 하게 된다. 요즘은 집안에서 누군가와 결혼하라고 하면 그냥 결혼하거나 어쩌다 누군가와 연애를 좀 하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전에 여러번 연애를 한다. 지금 연애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연애일거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몇번 만났다고 해서 뭐가 결정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지나갈 버스처럼 취급할 수 있고 또 그런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누군가와 연애감정으로 만나는 것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어갈 수록 그것은 마치 골라야할 청바지의 갯수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과 비슷해 진다. 이 사람이 괜찮은데 이 사람과 잘해볼까. 저 사람은 어떨까. 이 사람은 이런 건 싫지만 나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건 좋은게 아닐까.

 

이 끝도 없이 미묘한 사교생활은 종종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때로 비참하게까지 한다. 게임은 끝도 없이 계속되고 그 사람이 보여준 저 미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도리가 없다. 세상에는 자신은 4-500명의 사람을 어장관리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오빠거나 동생이거나 선배거나 아는 사람이다.

 

사태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 복잡한 인간고르기의 문제를 좀더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스터 심리학 실험에서 하는 일과 똑같은 것을 현실에서 한다. 우리는 스스로 이러니 저러니 의식적 기준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들의 기준도 빌려 온다. 그것도 대부분은 별로 인생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들어야 할 것같지 않은 사람들로 부터 그렇게 한다. 남자는 본래 이렇다. 여자는 이걸 봐야 한다. 너는 전체로 보아 B플러스 등급인데 네가 C마이너스 등급의 남자와 만날 이유가 뭔가. 어느새 우리의 머릿속은 온갖 객관적 잣대 혹은 근거없는 편견으로 가득 찬다. BMW 자동차 키하나면 여자들을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바람둥이는 이렇게 탄생한다. 기준이 객관적인 것이 되면 속이기는 더 쉽다. 

 

남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다보면 연애는 어느새 내 손을 떠나서 이런 저런 사회적 편견에 따라 저절로 조립되는 상품처럼 된다. 예를 들어 키작은 남자와 연애하는 것은 챙피스런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객관적인 조건에 따라 사람들은 표준화된다. 그래서 이 볼트는 크기가 이만하니까 저 볼트에만 끼울수 있다는 식으로 결합이 일어난다. 남자나 여자의 몸매는 이러저러한 것이 매력적인 것이라고 정해져 있다. 그래서 여배우나 가수 한명 한명을 볼때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지만 여자 연예인을 무더기로 모아놓고 사진을 찍으면 그건 마치 똑같은 마네킹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성품처럼 생긴 사람들이 기성품처럼 생긴 사람들을 서로 고르고 기성품처럼 시간과 돈을 쓴 후에 기성품처럼 선택을 내린다. 물론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 일이 흘러가는 것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내적으로 느낀다. 사람들은 그때 선택하지 못했던 청바지, 그때 눈길을 잠깐 끌었던 포스터처럼 그때 지나갔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만약 조선시대처럼 결혼은 그저 집안의 소개따라 하는 것이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해봐야 지금과는 비할수 없이 적었던 시대의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결혼은 만족스럽냐고 설문조사를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청바지와 포스터 고르기의 예를 따른다면 조선시대의 사람들이 결혼에 더 큰 만족도를 표했을 것이라고 예측 할 수 있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낭만적 사랑이란 대개 그 배경을 과거의 시대로 해서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19세기라던가 1960년대라던가 말이다. 연애가 흔한 현대로 올수록 그런 배경으로는 오히려 낭만적 사랑이야기를 펼치기 어렵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폭팔하는 시대, 남들의 영향력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눈도 믿을수가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눈도 어디선가 빌려 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렵사리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연인을 구해서 자랑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트로피 부인이고 트로피 남편이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행복하지가 않다면 그것은 일단 내 눈이 내 눈이 아니라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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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몇번 밥을 먹었고 또 몇번 술을 마셨으며 몇번은 찻집에서 만났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같이 뭘 하자고 따로 부탁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 약속이나 함께 할 것에 대한 계획이 없어도 그 다음날에도 만나는 것이 당연한 사이랄까. 다른 약속이 있을 때만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워낙 매일 만나다보니 아직 졸업이전이었던 나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이 경제적인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돈을 최대한 들이지 않고 만났다. 만나고 바래다 주는 것이 시간적인 압박을 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시간을 절약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둘이서 돈을 절약해서 데이트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거나 시간을 절약할 방법을 같이 따져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문득 이렇게 느꼈다. 

 

아 내가 이 여자와 아주 오래 만나겠구나.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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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하다보면 역설적인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연애에서는 종종 특별한 것이 흔하디 흔한 것처럼 느껴지고 아주 흔한 것이 특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특별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지만 동시에 그 한계가 분명하다. 특별하다는 기준이 결국 객관적인 기준이고 그저 유명한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속에 나오는 낭만적인 데이트 장소에 가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곳은 아름답고 예쁘지만 가보면 다른 연인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진정으로 두 사람에게만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최고로 인기가 있어서 국민들 중의 절반은 입는 옷을 입고 이 옷은 우리들만의 특별한 옷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미리 잘 준비한 태도와 내용을 가진 데이트를 하는 것도 같은 문제가 있다. 그런 것도 때로 필요는 하겠고 때로 그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진짜로 특별한 순간이란 두 사람이 우연히 혹은 운명처럼 만드는 것이다. 미리 계획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다 찾아들어간 민속 주점이 뜻밖에 훌룡했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곳이 가장 훌룡한 가게는 아닐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가게가 좋다고 흥분해서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곳은 별다를 것이 없는 그저 흔한 가게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우연히 그 가게를 찾아냈다는 사실은 그 가게를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가장 유명한 집보다 흔한 가게 하나가 가장 특별한 가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생에 딱 한번 있는 순간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을 만들려면 너무 미리 계산을 하면 안된다. 미리 예정된 계획에서 벗어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연애를 기성복같이, 누군가의 사랑의 복제품같이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있는 이 골짜기는 세상에 있는 아주 많은 골짜기 중의 하나이고 아주 흔한 골짜기지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좋고 희귀한 골짜기를 찾을 필요는 없다. 가장 특별한 골짜기는 우리가 참여해서 직접 찾아낸 흔하디 흔한 이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6. 마음을 읽는 남자.

 

자신이 곧 죽을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역시 내가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 들었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변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림그리기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학교때 한번 그림 동아리에 들어가 그림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도무지 내가 그린 그림은 아무런 세부사항도 그림속에서 반영하지 못해서 언제나 무슨 추상화같은 그림이 되곤 했다. 그런데 문득 데생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펜으로 손을 그려보고는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내 그림은 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상세히 손의 구석구석을 그림에 그려넣을 수가 있었고 마침내 완성된 그림은 너무나도 사실적인 그림이어서 내가 그린 그림같지가 않았다. 

 

또 집중력이 전혀 달랐다. 한번은 소파에 앉았다가 좌선을 하는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한없이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거의 완벽히 바깥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 앉아있다는 현실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사라지고 나는 공기중이나 물속에서 떠있는 느낌이었다. 숨은 한없이 느려지고 나는 끝없는 심연으로 내려가 뭔가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존재와 만나려고 했다. 나는 내가 곧 어떤 선을 넘을 것이며 그 선을 넘고나면 다시 되돌아올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 낼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는 뭔가 거대하고 시커먼 뭔가가 있었다. 무섭기도 하지만 왠지 매우 그립고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뭔가였다. 일단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영원히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끝장날 것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겁이 났다. 나는 겨우 눈을 뜨고 현실로 돌아왔고 두려움에 다시는 명상을 시도하지 못했다. 나는 전에도 참선을 흉내내본 적은 있지만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확실히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놀란 나의 심장은 매우 격렬하게 뛰었다. 

 

하지만 진짜로 놀라웠던 것은 이정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나는 내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감고 나의 내부가 아니라 세상에 정신을 집중하면 다른 사람들이 느껴지고 왠지 그들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이다. 나는 내 머리속에 자라났다는 종양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종양으로 인한 정신적 착란 현상이 분명했다. 나는 책들을 뒤졌고 내 머리 안의 종양이 있다는 장소인 후상부 두정엽에 대해 몇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티베트 명상을 하는 수련자나  기도하는 프란체스코 수녀들을 대상으로 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실험을 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런 종교인들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동안 스스로의 영혼을 느낀다던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낀다고 알려져 있었다. 과학자들은 종교인들이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할 때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연구한 것이다. 뇌의 활동을 분석해 본 결과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소위 영적인 체험동안 뇌의 후상부 두정엽에서 세포들의 활동이 저하된다는 사실이었다. 후상부 두정엽은 물리적 공간에서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세상과 자기 자신을 3차원 공간안의 존재로서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의 활동이 저하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신과 하나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평상시에 느꼈던 물리적 법칙이 무너지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이 실험으로 과학자들은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이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뇌의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이 실험이 그들이 어떤 신을 만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건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증명도 아니다. 관측의 결과를 인정한다고 해도 후상부 두정엽이 우리가 신을 만나기 쉽게 해주는 안테나 같은 것인지 아니면 신이라는 망상을 만들어 내는 망상제조기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신을 느끼는 감각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후상부 두정엽에 종양을 가진 나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체험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의 종양이 어떤 식으로든 내 감각을 흔들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신의 아들이나 행할 것같은 기적을 행하게 된 것일까? 나는 어떻게 읽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알고, 그리지도 못했던 그림을 그리고 이제 심지어 남의 마음까지 읽을수 있게 된 것일까. 

 

이번 출장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왠지 세상에서 흘러나가버린다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대한 연결점들이 사라지고 있달까. 세상과 내가 서로 겉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 삶을 다시 거머쥐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종양을 발견하고 그 책속의 포스트 잇을 발견한 순간 이후부터는 나는 기괴하게 세상에 연결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이 훨씬 생생하게 느껴졌고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같았다. 아니 이젠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가 직접 들렸다. 그 감각은 뭐라 말하기 힘들다. 마치 허공을 잡을 수 있는 것 같은 감각. 온세상이 나라는 거미에서 뻣어나간 거미줄에 달려있어서 보지 않아도 정보가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남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에 혼란이 생겼다. 내가 그들같고 그들이 나 같았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을 나의 뇌종양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정말로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까페에 앉아서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해 보았다. 처음에 내가 한 일은 까페의 손님들이 일어날때 마다 그들이 화장실에 가는지 밖으로 나가는지 아니면 셀프서비스로 주는 물을 가져오기 위한 것인지를 맞춰 보는 것이었다. 나는 실험대상자들의 마음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맞출 수가 있었다. 스물 두번을 시도해서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확히 그들의 행동을 예측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곰곰히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다. 내 앞에는 두 개의 극단적인 답이 있었다. 첫번째 답은 말 그대로 내가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답은 내가 과대망상증세를 앓는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이 두개의 답들은 다 논리적 일관성이 있었다. 나는 실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내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라디오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능력을 확인까지 해보았으니 분명 내 능력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미쳤다는 가능성을 제외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미쳤다면 나는 세상을 제대로 볼 리가 없다. 나는 심지어 나의 기억도 믿을 수가 없다. 애초에 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제대로 예측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일어난 일은 그와는 반대 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행동을 본 이후에 내가 이전에 그렇게 예측했었다고 거꾸로 내 기억을 바꿔버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누군가 전문가를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첫째로 나는 시간이 없다. 병원에서 테스트를 하느라 남은 여생을 보내는 것은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둘째로 내가 정말로 미쳤다면 누군가가 당신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라고 진단해 준다고 해서 그걸 믿을 리가 없을 것같다. 그건 오히려 더 커다란 망상과 긴장을 낳지 않을까. 병원전체가 어떤 음모를 꾸며서 나를 잡아가둔다던가 나아가 이 세계 전체가 나에 대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게 될런지 모른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일들에 휘말리고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살다보면 언제나 이런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어떤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여러 개의 가능한 답들이 존재한다. 그 답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는 답들이다. 만약 시간이 무한히 주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판단들에서 그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생각해 보면 판단이란 대개 이런 것이다. 맹수가 먹이를 향해 다가가서 그 먹이에게 뛰어들때 핵심적인 부분은 그 먹이가 그 맹수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먹이가 되는 짐승은 작은 소리를 듣거나 숲속의 애매한 얼룩을 본다. 위험에 처한 그 짐승에게 시간이 무한정 있다면 그는 계속 그 소리를 듣거나 그 얼룩을 계속 쳐다봐서 그게 맹수인지 아닌지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맹수가 있다는 답과 없다는 답중의 한 쪽을 확신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끌면 결국 맹수가 습격해오게 된다. 따라서 연약한 짐승은 대개 불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이건 맹수인지 혹은 맹수가 아닌지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결정들도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우리도 늘상 불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확실한 증거나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 한발 한발 앞으로 전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 착각이다. 그런 것은 있다고 해도 매우 예외적인 경우들이다. 우리의 삶은 얇팍한 믿음에 기반한 비약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맹신을 경계해야 하지만 믿음에 기반한 비약을 철저하게 회피하는 회의론자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자기가 객관적인 사람이며 확실한 지식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내린 판단의 옳고 그름을 대개 알 수가 없다. 많은 경우 하나의 결정은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고 이 결정의 연쇄는 쉴새 없이 계속된다. 인생의 갈림길은 그저 흘러가고 말며 우리는 결코 뒤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결정의 옳고 그름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고립되어져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맥, 어떤 흐름안에서만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인식과 결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서 다르게 판단해 볼 수 없고 과거의 판단이 어떤 것이었나는 심지어 지금 이순간에도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새옹지마라는 옛날 이야기에 다 나와 있는 것이다. 오늘 다리를 부러뜨린 실수는 내일을 위한 최선의 판단일 수도 있다. 도둑이 많다는 소문때문에 어떤 집을 포기했지만 사실은 그 집에 살았어도 도둑은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집에 살았었다면 넓은 주차공간을 가졌을 것이고 그 집 대신에 선택했던 집이 가진 좁은 주차공간에 주차하다가 내가 낸 사고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고 때문에 생긴 부부싸움이 없었을 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 싸움의 끝에서 서로에게 결코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실제로 우리가 포기한 집에 살았더라면 도둑이 들었을지 안들었을지, 도둑이 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믿음에따라 바뀌게 되고 그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선택하는 것과 경험한 것에 따라 바뀌게 된다. 삶이란 이런 순환의 무한반복이고 현실이란 이 순환이 만들어 낸 결과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어떤 것이 객관적 현실이고 어떤 것이 우리의 믿음이 만들어 낸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다. 언뜻 생각하면 집처럼 벽돌로 된 것은 물리적이고 객관적 현실인 것같지만 내가 그 집에 살게 된 것은 대부분 내 믿음때문이며 그 집이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가지는 것도 내 믿음때문이다. 사실 자동차도 도시도 아니 문명 전체가 어떤 의미로 인간의 믿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느 날 되돌아보면 그것들은 그저 행복한 꿈의 한조각에 불과했던 것일 수 있다. 그것이 나쁜 꿈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이제 죽음이라는 맹수가 나를 쫒아오고 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이 기괴한 사건들의 의미를 충분히 시간을 두고 알아 낼수는 없었다. 나는 어느 쪽이든 믿어야하고 선택해야 하고 그에 따라 내게 남은 시간의 의미도 달라질터였다. 

 

나는 결국 내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걸 의심하는 쪽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령이나 사라져버린 가족들이 나타난다면 나는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죽기전에 남은 시간동안 아버지와 혹은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것이 진짜건 망상이건 간에 말이다. 

 

일단 내가 듣는 소리들이 진짜로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라는 것을 믿게 되자 그 소리들은 점차로 더 또렷해 졌다. 나는 한동안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계속 충격을 받았다. 나를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학생은 나를 속물로 여기고 있었다. 꽤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여직원은 내가 자신을 좋아해서 추근거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나를 깊이 좋아하는 여직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굉장히 솔직한 사람들에게 둘러쌓였다. 그들은 나에 대한 말도 안되는 증오와 비난을 그리고 근거없는 사랑과 존경을 나에게 퍼부어 대고 있었다. 물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점차로 내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즉 마음을 읽는 소리를 꺼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다면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부터 확인할 것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100%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친하다고 생각한 동료가 나를 마음속으로 조금이라도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나 그녀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다지 가깝지 않은 누군가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를 더 높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때문에 내가 느끼는 기쁨은 그렇게 크지 않다. 우리는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대개 100% 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거기에는 항상 약간의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있기에 우리는 각자 자기를 지키고 살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서로를 누드로 만나는 것이 더 좋았다면 인간은 옷을 입고 살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읽는 것도 그렇다. 일정량의 무지와 예의와 위선과 거리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나는 금새 대부분의 소리를 꺼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때로 유혹을 이기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직원이 나와의 불륜을 꿈꾸며 야한 상상을 했고 내가 지난 밤의 꿈속에서 그녀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마음의 소리를 꺼버리는 것에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달라진 나를 확인하느라 바쁘게 시간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좋은 것도 있었다. 나는 나에게 생긴 이런 저런 변화를 확인해 보느라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었다. 헤어진 가족이며 내게 임박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다시 내게 생긴 새로운 능력에 대해 생각하고는 했다. 현실은 재미없다. 꿈이 더 재미가 있었다. 떠나간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제 시간이 없는 나에게 있어서는 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온 것도 한 주일쯤이 되었다. 내 능력내지 망상은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역전의 카페에 앉아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을때 나는 또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어딘가 아주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작지만 계속 반복되는 소리,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오히려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듣던 어떤 목소리와도 달랐다. 마치 신의 목소리같았다. 

 

‘죽. 어. 라., 죽. 어. 라. . . .’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어떤 보통의 한 개인이 내는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소리가 너무 거대했다. 그 소리는 작지만 거대한 느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약간이지만 물결치듯 크기를 바꿔가면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 카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거대하게 세상을 진동시키던 그 목소리가 갑자기 공진을 일으킨 것처럼 카페를 흔드는 것같았다. 그 때 갑자기 카페의 한 구석에 앉아있던 청년 하나가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일어 선다. 주인은 엠블란스를 부르고 쓰러진 청년을 보다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눕혔다. 하지만 자리에 놉혀진 청년의 손은 가슴에서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만다. 죽은 것이다. 또 다른 괴질의 희생자가 생겼다. 

 

나는 몇몇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같았다. 저 청년의 죽음은 분명히 내 귀에 들려오는 저 낮은 목소리와 관련이 있었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죽음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요 근래에 세계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재앙들도 저 목소리가 일으키고 있는지는 모른다. 충분히 그럴 것도 같았다. 나는 단조로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어붙었다. 한번 들리기 시작하자 세계를 죽이는 목소리는 낮아질 때는 있어도 결코 완전히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죽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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