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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작전세력없는 인터넷과 문화권력

by 격암(강국진) 2018. 9. 5.

소통의 도구로서 인터넷은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뭐가 획기적인가라고 하면 그것은 시간에 따라 변해 왔다. 처음에는 인터넷이라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하지만 이 인터넷이 만들어 낸 소통의 공간은 차차 그 위에 여러가지 소통의 플랫폼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웹브라우저가 그렇고 포털 사이트의 등장이 그러하며 구글이나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같은 서비스들이 그렇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10년정도 동안에는 또한 스마트 폰이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면서 인터넷은 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카카오톡같은 메신저 프로그램을 빼놓고 우리는 인터넷 소통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고 요즘은 팟캐스트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소통의 방식이 존재하는 가운데 우리는 좀 더 많고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되었는가? 언뜻 생각하면 이 대답은 분명이 긍정이어야 할 것같지만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사실 정보는 곧 돈이고 권력이다. 그래서 정보의 왜곡과 독점은 시대와 상관없이, 인터넷의 등장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과연 인터넷 작전세력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 여러번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예를 들어 드루킹 논란의 핵심도 결국은 매크로라는 프로그램을 써서 인터넷 게시판 위에 나타나는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이재명 비판 세력은 과연 작전세력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논란의 대상이다. 왜냐면 인터넷 게시판만 보면 그들은 엄청난 세력인 것처럼 보이는데 당내 경선, 지역 선거 그리고 당대표 선거에 이르기 까지 선거 결과로 나타난 민심을 보면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즉 여론을 여러 게시판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할 때 이 차이는 인위적인 왜곡이 있었던 증거처럼 보인다. 


작전세력이 존재하냐 하지 않냐의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다. 작전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국정원이나 경찰에서도 기무사에서도 인터넷 댓글부대를 운영했었다는 증거는 계속 나오고 있다. 과연 대기업에서는 없었을까? 작전세력은 있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의 행사가 있는 곳에 정보의 왜곡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권력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작전은 언제나 있는 셈이다. 우리는 세상을 그냥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우리가 뭘 볼까를 결정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러니까 지금이 절대 독재 시대라면 그 독재권력은 우리가 무엇을 볼까를 결정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도 지배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절대독재국가가 아니라 민주국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결국 독재권력이 아닐 뿐 모든 권력은 정보를 선택하고 정리한다. 이러한 조작은 물론 사실이 아닌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을 포함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것은 단순한 날조로 구분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주관적 의견의 차이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드루킹에 대해서 특검이 이뤄지고 있으며 많은 언론사들이 그에대해 보도해 왔다. 하지만 이 드루킹 사건의 수사방향은 옳은가? 애초에 이 드루킹 사건이 이정도의 집중을 할 가치가 있는가? 더 중요한 문제들은 없었던가? 삼성문제며 남북문제며 대법원문제며 국방부문제며 여러 다른 문제들이 있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중에서 뭐가 더 중요한지를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고 믿음의 문제다. 그러니까 그런 선택과 집중을 날조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행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드루킹 사건은 지금처럼 다뤄지고 있는 것이고 노회찬 의원은 자살을 해야 했지만 강원랜드 비리의혹을 받았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아주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짓을 모든 국회의원이 하고 있어도 여당계열 국회의원이나 내각인사가 끼면 그것은 관행이 아니고 자유한국당 의원이 하면 그건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 된다. 


나는 몇천원을 횡령했다고 버스기사에서 해고된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엄격해 져야 몇천억을 횡령한 재벌총수를 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현실은 결국 항상 몇천원 횡령한 사람, 침 한번 뱉은 사람, 욱해서 주먹한 번 날린 블랙리스트 인물이 당하는데서 끝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몇천억짜리 몇조짜리 횡령범이 잘먹고 잘사는 도구가 되고 만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은데 걸리면 죽는다는 식이면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큰 도둑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큰 도둑부터 잡아야 한다. 크건 작건 다 도둑이다라는 말은 잘못된 문맥에서 흔히 쓰인다. 살인범을 잡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경범죄를 무시해야 한다. 몇십조씩 국고가 새는데 다른데 가서 전기 아껴라, 재활용품 쓰자 같은 소리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큰 도둑은 대개 권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관심을 주로 작은 도둑들에게 집중시킨다. 카드값이나 월세 못내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는 나라에서 상속세 몇조원 안내는 사람도 무사 통과다. 그게 권력이다. 그게 잘못된 권력의 분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는 작전세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질문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올바른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관점이라고 믿는 정보가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이걸 위한 적당한 플랫폼이나 소통의 형식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이 바로 작전처럼 보일 것이다. 


그냥 작전세력없는 인터넷을 꿈꾸는 것은 마치 천국이 공짜로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적군의 공격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전쟁에 이길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나 같다.  세상에 편견없고 작전세력없는 인터넷이 생기는 때가 오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우리가 모든 권력을 가진 때다. 박근혜나 이명박같은 사람의 눈에는 지난 10년간의 언론들의 보도가 참으로 올바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커다란 권력의 편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했다. 그 핵심적 증거는 작전세력으로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멈추는 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최근 이재명으로 부터 불거진 여권지지세력의 내부 싸움을 보고 결국 권력은 지금의 여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민주당 지지자나 당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후보가 된 이재명을 뽑느니 차라리 자유한국당을 찍겠다라고 말해도 비판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확실한 권력의 행사다. 이건 결국 여당 내부에서 권력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누가 부추켰던 말이다.



이제 다시 물어보자. 작전세력이 없는 인터넷을 우리는 만들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기술적이거나 법률적인 문제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매크로 사용을 막을 기술을 개발하거나 실명제를 실시하는 것 같은 것이다. 기술은 강력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단기간에 원하는대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터넷 자체가 지금 그것이 사용되는 것처럼 사용되기 위해 개발된 기술이 아니다. 그건 재난이나 전쟁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군사용 통신 기술이었다. 그래서 지진이 나면 핸드폰은 막히는데 인터넷은 된다.


사실 네이버가 매크로를 막지 못해서 안막는 것이 아니다. 실명제따위는 이미 10년 20년전부터 이야기되어져 왔다. 포털은 못막는 것이 아니라 안막는 것이다. 그 이유를 따지자면 결국 다시 권력이다. 만약 문재인이 인터넷 작전부대를 써서 여론조작을 시도한다면 그런 작전은 간단히 방어될 것이고 그걸 빌미로 문재인 대통령은 탄핵될 것이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의 누군가가 지금 그러고 있다거나 삼성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이 밝혀져도 그 일은 그냥 어영부영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권력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아니 개선의 가능성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문화 권력 혹은 문화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힘이 우리를 구할 수 있고 우리가 올바른 문화에 등돌릴 때 우리는 망할 것이다. 


나는 여러 게시판에서 일종의 공성전이 벌어지는 것을 봤다. 그것은 게시판을 차지하려는 권력싸움인데 그 싸움의 핵심에는 언어 문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속어의 사용과 극단적 행동양태를 통해 게시판의 주도권을 잠식하고 문화를 변질시킨다. 비속어의 사용이란 욕도 있지만 무슨 빠라던가 뭐가 묻었다던가 하는 조롱을 반복해서 쓰는 것도 포함한다. 극단적 행동양태란 쉽사리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원한을 쉽사리 표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특정인물을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망할 때까지 쫒아다니면서 비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누가 시비가 붙으면 다른 게시판 사용자에게도 그렇게 한다. 


비속어의 사용과 원한의 표출은 사실은 인터넷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것이다. 바로 오프라인의 빨갱이 잡기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자, 간첩 따위의 의혹을 받으면 우리나라에서는 극단적인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걸핏하면 빨갱이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누가 마음에 안들면 이 빨갱이새끼가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이재명 이야기 지겹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너 손가락이구나라던가 찢묻었다같은 말을 던지면 된다. 


게시판 공성전에서 벌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속어와 원한 표출로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 게시판을 망하게 한다. 사람들은 시시비비가리기로 이걸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지만 이런 판에서는 증거고 논리고 소용이 없다. 그저 승자가 패자를 몰아내는 것이다. 이런 흙탕물 싸움에 대한 또다른 잘못된 반응은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욕을 하면 우리도 한다. 그들이 극단적 정서를 표출하면 나는 참고 사는 사람인줄 아냐고 죽든 살든 해보자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정치가나 어떤 정당을 위해서 흙탕물싸움을 계속하지 못한다. 고작 게시판 싸움에 인생을 건 것처럼 흥분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이 흙탕물 싸움에서 점차로 약화된다. 결국 게시판에 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단 한번 이런 식으로 어떤 게시판이 약화되고 나서 그곳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한번 망가진 관행과 예의는 회복이 잘 안된다. 게시판을 망하게 하는데 100명이 필요했다면 망한 채로 유지하는데는 한두명이면 족하다. 이미 그런 관행과 문화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 반대되는 예도 있다. 인터넷에서 대단해 보이는 일베의 용자도 경찰서에 오면 그렇게 얌전하다고 한다. 그들은 이제 비속어를 남발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비아냥거릴 수가 없다. 강력한 악의를 들어내 보일 수도 없다. 왜냐면 게시판에 있는게 아니라 경찰서에 있으니까 그렇다. 그들은 오프라인에서는 게시판에서 하던 것처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히 무력해 진다. 


그러니까 게시판 공성전에서 최선의 방어는 아름다운 문화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예보다 지난번 촛불집회에서 이것의 힘을 봤다. 질서있게 줄을 서는 문화가 총이나 탱크보다 세다. 일단 판을 전쟁터로 만들면 총이 세지만 그것이 즐거운 문화의 밤이라면 총따위는 그저 무거운 작대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의와 문화는 엄청중요하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하는가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서 게임의 법칙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작전세력없는 인터넷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보다 많은 내용이 필요하다. 부동산 투기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결국 투기성 철학을 당연시 하기 마련이고 내가 예전에 17대 1로 싸웠다는 식의 무용담이나 야설에 집중한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철학을 퍼뜨리기 마련이다. 소위 일베 사이트는 내가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곳이 썩어가는 이유는 성을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 강박 수준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남녀관계는 곧 섹스고 이 세상에 그것 이외의 즐거움은 거의 없어서 문화적 빈곤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되면 기괴한 괴물들의 세상이 만들어 진다. 성에 대한 강박뿐만 아니라 어떤 투쟁에 대한 강박도 같은 일을 한다. 문화적 빈곤은 언제나 우리를 정상적 인간보다 못한 어떤 단순한 것이 되게 만든다. 


세상에 다양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외롭지 않은 사람은 작전세력에게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작전세력의 전략적 핵심은 절대악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한가지 요소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처럼 믿게 만들고 따라서 그 요소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질문도 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인터넷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게 아니다. 시시한 남자들은 어깨만 부딪혀도 감정싸움이 벌어진다. 물론 기분은 누구나 나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뒤로 물러나는 것은 내 인생 전부를 걸어도 있을 수 없는 모욕이라는 식으로 행동한다. 일단 열이 받으면 그 옆으로 강간범이 지나가건 테러범이 지나가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어떤 무례한 한마디의 말이나 무례한 하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다라는 본인의 그 믿음에만 집중한다. 누가 옆을 좀 보라고 하면 계속 옳은 건 옳은게 아니냐는 자기 말만 한다. 그러다가 실제로 칼부림을 해서 인생 망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인터넷 공간이건 이런 사람들로 넘쳐나면 작전세력의 먹이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실로 단순하여 잘도 싸우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 건 것처럼 싸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문화적 빈곤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 자체가 문화적으로 빈곤할까? 그렇다. 오랜 세월 군대식 권위주의 문화에 억눌려서 살면서 사람이 단순해 졌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자체가 다양성이 부족하다. 진짜 혁명은 다양성 폭발이다. 누가 작전세력인가. 바로 막장 드라마같은걸 잘 보는 사람이 작전세력의 깃털이고 근육이다. 막장드라마의 논리적 구조가 딱 내가 위에 말한 작전세력의 그것이다. 


한국은 여러가지 적폐를 씻어야 한다.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적폐 청산은 어쩌면 놀이 문화와 여가 문화의 개선일지 모른다. 주거에도 문화가 있고 식생활에도 문화가 있으며 여행에도 문화가 있다. 우리가 낭만과 독서를 즐길 때 우리 삶은 달라진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풍요로운 한국에 맞추질 못했다. 돈과 시간이 있어도 그걸 어떻게 쓸지 모른다. 


우리가 문화적으로 풍요로울 때 작전세력의 효율성은 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생각할 때 6월 항쟁이나 촛불혁명같은 어떤 극적인 순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혁명을 위한 진짜 발걸음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책에서 여행사업에서 벌어지고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발 한발 더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삶으로 다가가는 것이 우리를 보다 더 천박한 작전세력없는 인터넷에 가까이 가게 한다. 이 부분을 기억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작전세력에게 넘어간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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