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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숭고한 가치를 가진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18. 9. 7.

얼마전에 문화일보에서 요즘 인기있는 인문학 작가들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그 기사의 제목은 '유시민은 게으르고 채사장은 단순하다'라는 것이었는데 내 트위터에 나타난 이에 대한 반응들은 뭐가 어찌되었건 비판하는 기사는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도 그 기사에서 비판당한 유시민과 채사장도 이런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여기에 대해 뭔가 마음의 찌거기가 남는다. 그것도 중요해 보이는 찌거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비판의 가치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판이상으로 생산과 긍정에 값어치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특히 인문 분야에서는 말이다. 


비판의 자유는 오늘날 대개 숭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판단의 기본에는 진화론적인 사고가 있다. 즉 하나의 아이디어는 많은 비판들 속에서 개선되어지면서 진화하고 따라서 우리는 남들의 사고에 대해서 비판할 자유, 심지어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비판은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며 그것없이는 발전은 있을 수 없으므로 아주 소중한 것이다. 


이같은 사고는 오늘날 널리 퍼져있으며 특히 과학적 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과학에 있어서 비판을 거부하는 이론이란 가치가 없다. 그래서 이공계 사람들 특히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순수 이론 계열의 사람들의 마음은 꼼꼼하기가 이루 말할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천페이지의 계산이 있다고 할 때 그 중의 한 줄만 틀려도 전체 계산은 의미가 없다. 부품 하나만 빠져도 거대한 기계는 멈춰선다. 그래서 전체 이론이나 논증의 모든 부분은 굉장히 엄격한 내구성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마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 날개를 종이나 나무조각으로 만든다면 비참한 결과만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예술이나 인문은 이런게 아니다. 작곡을 하면서 음표가 많냐 적냐로 그 음악의 가치를 따질 수 없고 글자수가 많은 소설은 시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으며 복잡하게 생긴 조각상이 단순하게 생긴 조각상보다 더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들을 조각조각 나눠서 그 조각들을 평가하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다. 


예술에서는 우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명한 물리학자인 디랙은 그림을 감상하면서 우연히 찍힌 듯한 점에 대해서 이것은 허용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예술가들은 예술작품이 본인의 계산과 힘에 의해서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우연의 산물이라고 느낀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소설을 쓴다면 계산에 의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영감에 의해서 내 안에 있는 것을 꺼집어 내듯이 쓰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내가 쓴다기 보다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기억해 내듯이 쓰는 것이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썼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작품이 되었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술이나 인문을 논할 때는 과학자의 태도와는 달라야 한다. 수학계산에 90% 맞는 계산이란 없다. 맞거나 틀린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는 틀린 예술이란 없다. 다른 예술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는 비판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술에 있어서 비판이나 평론이란 사족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일단 그게 뭐든 생산해야 한다. 생산도 안하면서 미리 예술작품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니 이것들은 틀렸다고 하는 식으로 생산을 억압해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특히 21세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한번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오늘날 비판이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비판의 시대를 살고 있는게 아니라 생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부정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뭐든 생산하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세상이 복잡해서 그렇다. 예전에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정치가는 스티브 잡스같은 기업가를 교육해서 키워내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스티브 잡스같은 기업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며 우리가 그를 키워 낼 능력도 있다고 믿는다. 마치 공장에서 통조림을 만들듯 스티브 잡스 제작 공장을 만들어서 스티브 잡스만을 양산하자는 것이다. 


이건 헛소리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나름의 형태로 성장해 나갈 때 그 안에는 훗날 큰 사회적 업적을 남기는 사람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즉 비판적 사고에 의해서 완성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엄청나게 각자 자기를 생산하여 그 안에서 좋은 것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때문이다. 엄청나게 복잡한 자동차를 만들려고 하면서 이게 나쁘네 저게 나쁘네 하면 아무 것도 안된다. 우리는 우선 엉성해도 자동차를 만들어야 하고 그걸 나름대로 각자 개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으로 남의 자동차 욕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 자동차나 만드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는 말이다.  


그런 비판은 도움도 안된다. 시각이 낡아 있다, 시각이 단순하다? 그런 비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새로운 시각이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더 복잡한 시각이 있다는 것을 기본적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 새로운게 뭐고, 더 복잡한게 뭘까? 나는 그런게 있지 않다거나 유시민이나 채사장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적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이런 발상은 흔히 사상적 식민지 상태에서 자주 발생한다. 즉 누군가 어디 해외에 있는 분이 말씀하신 권위있는 이론이 더 잘 되어 있으니 우리는 그걸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더 낡았고 더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상이 정말 한국의 현실에 더 잘 맞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걸 소개하고 설명하는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유시민은 낡아 빠진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왜 아직도 사람들은 유시민을 읽고 있을까? 혹시 유시민을 비판하는 사람은 폐렴환자에게 폐렴약을 주는 사람에게 더 좋은 항암제가 있는데 왜 항암제를 쓰지 않냐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사회와 한국 사람에 대한 시선은 사라지고 어떤 절대적 진리를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채사장의 글이 단순하다지만 아마 채사장의 글은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복잡할 것이 뻔하다. 우리 모두는 정말 그의 책이 논하는 인문학적 지식이라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그의 책이 단순하다는 비판은 한국 사람들의 정신에 대한 어떤 진단을 전제로 한다. 그게 아니면 한국인의 정신과는 동떨어져 시공을 초월한 어떤 인문학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언뜻 보면 그저 생산적인 듯 보이는 비판이 실은 생산을 억압하는 쓸데없는 시도라는 것에 있다. 채사장과 유시민을 비판하는 대신에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그들의 장점을 칭찬하고 더 높게 평가해 보라. 그러면 오히려 그들을 극복하는 작가들이 더 빨리 나타날 것이며 사람들은 과연 채사장은 단순했고 유시민은 낡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생산하는 사람들의 뒤에 앉아서 몇마디 단순한 말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그저 독이 될 뿐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전성기에 올라 있다면 그것도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서구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인문학적 저작문들을 생산해 왔고 그걸 정리해 왔기 때문에 서구에서 생산만 강조했다가는 정말 쓸모없는 이야기들이 양산되기 쉬울 것이다. 그들은 생산의 여건이 훌룡하게 발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정신, 서구 철학은 오랜간 정리되어져 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평론의 기본 시각이 잘 정리되어져 있다는 점도 있다. 


반면에 한국은 학문과 문화의 변방이다. 안그래도 우리는 정의란 무엇인지를 하버드 대학교 교수에게 배워야 하는 처지다. 사회는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어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융합력이 약하다. 그렇다고 남의 글, 남의 책에만 의지하다가는 우리는 정신적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작가가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받는 사회적 보상이 얼마나 되나. 해리포터의 예를 들지 않아도 한국에서 좋은 책을 쓴다는 것은 정말 개인적 이득이상으로 공공근로에 가깝다. 순전히 돈만 보고 쓴다고 해도 책으로 부자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그나마 성공한 작가들에 대한 후원과 격려다. 부족하고 어설픈 것이 있어도 그걸 긍정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이 나라는 계속 자기 생각이 있다기 보다는 그저 남의 것을 달달 외워서 그걸 말하는 것으로 지식인이 되는 사람들만 가득할 것이다. 


나는 도올 김용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앞에서 말한 유시민이나 채사장이 받는 비판을 무수히 받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정말 김용옥도 유시민도 채사장도 능가하는 진정한 고전이 될 작품을 쓸 사람을 원한다면 그들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그들을 칭찬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가로 막는 것이 바로 맨앞에서 말한 비판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비판이란게 일반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언제 어떤 때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비판의 역할과 가치가 뭔지를 다시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생산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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