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9일에 방송된 알쓸신잡3에서 유시민은 우리나라는 관계가 너무 많은 나라이며 그래서 광장을 찾지 않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김영하를 비롯한 출연진들과 이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 한동안 대화가 진행되었는데요. 이영하는 개인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문화를 비판했고 유시민은 게이지수를 말하면서 개인이 자유롭게 사는 사회가 창의성도 올라간다는 말을 했으며 도시계획박사인 김진애는 그래도 사람들을 이어주는 광장의 소중함을 덧붙이는 형태였습니다.
우연히 본 이 방송에서 이 부분은 제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이 완전히 새로워서가 아니고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시민이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광장을 찾지 않는다라고 말한 부분이 제 맘에 계속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맘에 걸림을 해소할까하여 몇자 적습니다.
우선 저는 광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적어도 유시민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냥 그 문장만 잘못 말한 것일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누군가가 다 맞는 말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대화가 필요없지요.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으로서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이 개인 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개인이 개인일 수 있도록 공공의 기반시설을 제공해 줘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공시설 중의 하나가 바로 다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부족해서 한국 사람이 광장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광장과 같은 시설이 부족해서 한국 사람들은 개인이 되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에 더욱 강하게 얽매이게 되는 것이죠.
개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개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 하나가 개인이라는 말은 마치 저기 사과 한개가 있다는 말처럼 과학적이고 기초적인 사실로 자명한 말로만 들리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은 최소한 권리의 주체 특히 소유의 주체이고 의지의 주체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이 무슨 말인지를 생각해 보고 나서야 개인주의같은 것에 대해 의미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개인이 권리의 주체 특히 소유의 주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뭔가를 소유할 때 그 소유권이 어떤 한 개인에게 속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우리가 결혼을 할 때 어떤 여성이나 남성같은 개인과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손해배상의 책임도 어떤 것의 소유권의 주장도 하나의 인간이 가진다는 것이죠. 뒤집어 말하면 이런 개인소유 개념이 약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즉 마을의 물은 마을 공동체 공동의 것이고 뒷산은 우리 가문의 것이며 결혼은 가족과 가족이 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고할 때 거기에는 실질적으로 개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라는 말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에다가 권리와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부과되기 어려운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개인이라는 말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아이는 개인이 아닙니다. 권리도 독립성도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의지의 주체라는 말은 실질적으로는 권리의 주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개인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판단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럼 어떤 때 개인이 의지의 주체가 아니냐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의지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말을 설명할 수 있을 텐데요. 그건 어떤 사람의 삶을 사회적 자연적 환경의 결과로 볼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서 우연히 금을 찾거나 복권에 당첨되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이 부자로 사는 것은 그저 우연이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풍년이 드는게 아니라 그저 하늘이 도와서 비가 잘 오고 그래서 풍년이 든다면 그럴 때도 그 농부의 삶은 자기 행동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것, 자연적인 것 혹은 신적인 것에 자신의 삶이 주로 결정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개인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운명이죠.
인간이 스스로를 개인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이렇게 복잡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에게서 소유권을 빼앗고 자유로이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관점을 빼앗아 버린다면 그 인간이 한명의 개인이라는 말은 거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이 개인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도 자동적인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강력한 권력자가 하나 밖에 없는 우물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럴 때 그 지역의 사람들은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을 구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요. 어떤 사람이 어떤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면 먹고 살 기가 불가능하다면 그 사람도 개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쫒겨나면 어디서도 친구를 구할 수 없고 완전히 외톨이가 되어 삶의 질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그 사람도 개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친구라는 소중한 삶의 일부를 구하기 위해 교회에 구속되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개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종의 역설적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가 강해야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강하다는 것은 많은 것들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공의 소유라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앞에서 한 말대로라면 많은 것들이 공공의 소유이며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으니 개인의 의미가 퇴색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개인의 관점이 분명해 지는 것은 이때입니다. 앞에서 거론한 물의 독점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렇죠.
한국 사람들은 조선 말엽부터 적어도 백년내지 이백년 이상 계속된 궁핍속에서 사회적 공공 자산이 부족한 생태로 살았습니다. 즉 집단에서 떨어져서 개인이 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산 겁니다. 자기 패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친구를 구할 수도 없고 직장을 구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 목숨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외톨이는 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 쉬운 겁니다. 결혼도 안하고 친구도 없는 사람, 개인으로 혼자이고자 하는 사람은 안정성이 없는 위험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이죠. 한국은 이미 반세기전의 가난한 국가가 아닌데 말입니다.
사회가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필요를 모두에게 제공해 준다면 즉 그런 기본적인 것을 어떤 개인이 독점할 수 없게 한다면 사람들은 관계의 감옥에서 보다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도시에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원이 있고 광장이 있는 것이 그런 좋은 예입니다. 돈한푼 없어도 공원을 즐기고 광장을 즐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관계가 끊어지면 삶이 곧장 지옥이 될거라는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으니 언제 쓸지 모르는 재산이라도 잔뜩 모아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공포에서 벗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짜 개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공포에 기반하지 않은 진짜 관계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게 가능한 것은 크게 보면 결국 공동체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죠. 국가는 제약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유를 주는 국가가 없이 무정부상태가 되면 모두가 자유롭게 사는 시대가 오는게 아니라 지역마다 동네깡패가 지배하여 모두가 지옥에 사는 것처럼 되는 부자유한 시대가 됩니다.
인간은 개인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개인은 사회적으로 발명된 것이며 과거에 발명되어 고정된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재발명되고 있습니다. 좋은 예가 법인의 등장입니다. 국제무역이 발달하자 회사의 소유권자가 무제한 책임을 지는 소유권으로는 경제발전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유한한 책임을 지고 소유와 경영도 분리되는 주식회사같은 법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는 인터넷 속에서 계정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새롭게 개인을 재정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즉 하나의 인간이 다수의 아이디를 가지고 제한된 권리와 소유권을 주장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개인은 우리가 발명하며 재정의해야 하는 것이고 소중히 지켜나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개나 사과가 한개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여러 사람들이 그런 고립적 의미에서 개인을 파악하기 때문에 종종 개인주의란 말이 엉망으로 이해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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