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하면서 법원은 피고인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할 경우 그 양심이 깊고 확실한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며 그것은 검사에 의해서 증명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판사들은 검사에 의해 증명되어 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법정의 최종결정권자는 법관이므로 법관 스스로가 누가 진실된 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을 볼 때 이런 판결은 법의 오만이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종종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를 가치와 윤리의 문제로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가의 문제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응당 법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 이상으로 하려고 하면 법이 오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이 문제를 시작해야 한다.
왜냐면 모든 사람과 모든 시스템이 그러하듯이 현실에 존재하는 한국의 법시스템도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률만능주의에 빠지거나 법적인 판단을 어떤 한 개인의 소신을 피력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법은 사회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규칙일 뿐이다. 그 힘은 보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원칙적으로 반드시 정의로운 것과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유명한 미국 복서 알리가 베트남전에 대해 병역거부를 한 사실은 유명하다. 나는 베트남전쟁이 불의한 전쟁이었다고 믿고 따라서 알리의 병역거부는 옳은 신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의 사법제도가 그의 병역거부를 합법적인 것으로 선언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또다른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한국의 정부가 불의한 짓을 하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인 납세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경우에 따라 올바른 신념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사법부가 양심적 납세거부를 합법으로 선언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뭐가 옳은 일인가를 사안마다 판단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법을 단순히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우리는 법관을 신적인 위치에 놓게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판결을 통해 법관들은 스스로를 그런 위치로 끌어올리려고 한다. 최근의 양승태 사법파동만 생각해도 이런 행동은 정말 오만의 극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법이 단순히 올바른 일을 하는 거라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친구끼리 싸워도 법정에 가서 다투고 법관에게 물어봐야 하고, 선거도 할 필요없다. 어떤 선거결과가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법정에서 다투면 올바른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법은 그런게 아니다. 법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을 적어놓은 사회적인 도구다. 세상은 법말고도 끝없는 소통과 합의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연은 모두가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를 위해 진정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칙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두가 살기 위해서 거꾸로 인간이 법에 적응한다. 때로는 좀 억울해도 참는다.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다.
오만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100킬로그램짜리 역기라도 충분한 체력이 있는 사람이 들면 그것은 오만한 것이 아니고 힘없는 어린애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것은 오만한 것이다. 한계를 가지는 시스템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겠다고 할 때 그 시스템은 지금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복지혜택을 생각해 보자. 사람마다 사연이 다르니 모든 가정을 전부 조사해서 각 가정에 합당한 아동 복지금을 지불하고 얼마를 지불할지는 법관이 법정에서 결정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정말 더 합리적인 세상에 살게 될까?
우리는 몇가지의 사안을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도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는게 있다. 사법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불법으로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아니다. 불법과 합법 사이에는 상징적으로 엄청난 간격이 있다. 그러나 불법을 인정해도 시스템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지금 논의되고 있는 대체복무제가 한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형량을 결정하는 법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자율권을 가진다. 군대의 지휘관도 자기 판단에 따라 자율권을 가지며, 교도소장도 자기 판단에 따라 자율권을 가진다. 불법을 인정한 시스템 내부의 방법이 없지 않다.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런 배려가 전혀 충분하지 않으며 나는 합법을 선고받고 싶다고 하겠지만 양심적 병역거부를 어떤 식으로 건 합법으로 선언하는 일에 다른 문제는 없을까?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질까? 그들이 모두 삐뚤어 져서?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럴 때 그런 현실을 국민들이 무지하고 비진보적이라서 그렇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오만이 아닌가?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이라고 해버리는 것은 사실상 시스템내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판단과 자율권의 주체들을 무력화 시키고 자신이 병역혜택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로 지적할 것은 이 문제는 매우 힘겨운 일이라서 판사가 그렇게 오만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일단 지금 세상에서 병역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한가지 심리적 실험을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일정금액을 기부하면 병역을 면제하는 제도를 만든다고 하자. 예를 들어 10억을 나라에 기부하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이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마다 의견은 다를 테지만 절대 10억보다 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유명 연예인과 재벌집 자식들은 모두 합법적으로 병역면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이 수백억씩 되는 사람들이 몇년을 위해서 10억을 안낼 것같은가?
이 실험을 제안한 이유는 법관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진실된 것임을 판정해 줬을 때 그것이 어느 정도의 금전적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다. 진짜와 가짜 신념에 대한 판정 하나로 10억이나 100억을 개인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지금 인기있는 방탄소년단이 군대를 안가면 몇년간 얼마를 벌까? 세상에는 개인적인 이유로 군대에 가기 힘든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힘드니까 종교적 이유로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도 봐줘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과 평등 수준을 봤을 때 법관이 개인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도 되는지 아닌지 판단해 주는 것이 옳은가? 우리 사회의 법 시스템이 그걸 감당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양승태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신념을 검증해 주는 사회를 우리는 원하나? 만약 어떤 방법이 있어서 군대를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을 제대로 판정하고 국민 모두가 그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다면 그런게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법원이 과연 그정도의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는가? 내가 느끼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법관들은 스스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판결로 보여줬다. 자신들이 누가 병역면제를 받을지를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판사들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높다. 사법농단이 있다고 다수의 사람들이 믿는데 자신들만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원은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를 더 높이는 판정을 해버린다. 이건 법원의 폭주고 사회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된 접근을 통해서 무능한 판사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주는 잘못을 해서는 안된다. 옳고 그른 것을 다 제대로 판정할 수 있는 법정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재판만능주의에 빠져서 잘못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소크라테스는 판결에 승복하고 죽었다. 그 비극의 핵심은 결과는 둘째치고 애초에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판결할 수 있다는 오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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