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역에 정이 든다는 것은 워낙 여러가지 일들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성향과 그 지역의 궁합이 맞아들어가는가 아닌가에도 영향이 크다. 하지만 나는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자면 한국은 정말 정이 들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한국이 좋다. 그래서 외국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여행을 갈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다. 나는 한국에 애정이 있고 자부심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모순이 되는 것같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한국을 보면 특히 그것을 하나 하나의 도시나 동네 수준으로 좁게 보면 지금의 한국만큼 정이 안 생기는 곳도 드문 것같다. 지금의 한국은 내가 살아본 일본, 미국, 이스라엘 어느 곳보다도 더 그렇지 않을까?
왜 그럴까? 지역에 정이 가지 않는 한가지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이 워낙 빨리 변하는 곳이라서 그렇다. 즉 한국에는 진짜로 손때뭍은 역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가 느껴지는 곳도 대개는 뭐랄까 유물을 모아다가 박물관을 깨끗하게 만들어 놓은 느낌이랄까? 지금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강한 연관성이 별로 느껴지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모두가 실향민같고 모두가 떠돌이 같다.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을 것이다. 대개 어느 지역의 정체성이란 반세기나 백년쯤 된 건물이나 가게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게 드물고 약하다. 3백년이나 5백년이 된 유적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유물은 나와의 연관성이 피부로 강하게 느껴지질 않고 10년전에 지은 건물은 너무 새 것이라서 연륜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50년이나 100년쯤 된 것들은 지금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이 깊숙히 있다.
조선시대의 남자
예를 들어 전에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가 히트를 친적이 있다. 그 드라마들은 2-30년쯤 전의 세계를 그린다. 한국은 워낙 빨리 변하는 곳이라서 그쯤 전만 드라마로 만들어도 지금과는 참 다르다. 나뿐 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그 과거의 세계를 보면서 향수에 젖었다. 또 60-70년 전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일제 시대의 서울 모습이 드라마에 나온다. 그 모습에서도 우리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뭔가를 느낀다. 하지만 아예 조선시대 사극쯤이 되고 나면 나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느끼면서도 그 고리가 상당히 약하다. 조선 말엽의 조선사람들 모습은 현대 한국인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응답하라 1987
그런데 한국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과거에 너무 가난했던 탓인지 바로 그 100년간의 역사가 거의 남아있지 못한 느낌이다. 40년정도 인기를 누리며 장사를 하는 가게는 한국에 얼마나 되는가? 반세기 정도 어느 지역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해온 뭔가가 지금도 활발한 곳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서너해가 지나고 나면 내가 사는 골목의 가게들이 거의 다 사라질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내가 사는 전주의 한옥마을에는 내가 좋아하던 치즈빵을 팔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망하고 사라졌다. 얼마전에는 내가 자주 가던 외할머니 솜씨라는 찻집도 새 장소로 이사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새 장소로 이전한 것이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했지만 그래도 나는 몇개의 가게는 시간에 상관없이 탁자며 의자가 세월을 쌓아가면서 그자리에 있어줬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나는 아쉬움이 크다. 종로의 피맛골 가게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서 유지 하면 그게 피맛골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인간관계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한국인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가진다. 일단 누군가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무척 큰 부담을 느끼고 느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좀 극단적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좀 알았다 싶으면 마치 운명공동체처럼 그 인연을 외면하기 힘든 분위기다. 우리는 쉽게 남의 일에 간섭한다. 남이 뭘 먹고 뭘 입고 뭘 말하는지를 가지고 그런가보다 하고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비교하고 평가하여 좋고 나쁘고 높고 낮고 비싸고 싼 것을 꼭 말하고야 만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모르고 지낸다 싶으면 이렇게 주변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한국의 아파트는 그런 현실을 잘 표현한다. 단독주택으로 이뤄진 골목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로 가고 싶었던 이유중 아마도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이것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에게 간섭하기 좋아하지만 그런 간섭하는 문화때문에 피곤했던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아파트로 가서는 세상 편하고 좋다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지역문화라는 게 없다. 이웃들끼리 별로 이야기도 안하고 사는데 무슨 지역문화가 있겠는가. 지역 공동체라는 것은 같이 사는 것을 실감해야 생기는 법이다.
한국의 이런 현실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왜냐면 삶의 연속성이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노인과 중장년층 그리고 젊은이와 아이가 같이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아이는 자신의 삶을 간접체험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커서 청년이 되고 중장년이 될 것이며 노인이 되면 이러저러하게 살 거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에서 요즘 청년이나 어린아이들이 그런 걸 느낄 수 있을까? 어른들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은 도대체 10년이나 20년쯤 뒤에는 자기가 어디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지 전혀 상상도 못한다. 한국은 뿌리없는 삶, 연속성이 없는 삶으로 채워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의 감정은 패거리를 만들거나 재산을 쌓거나 학벌을 좋게하려는 욕망을 들쑤실 것이다. 뭔가를 소유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느끼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여러번 지적되어지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은 이런 불안이 만들어내는 증상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제까지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앞으로 돌격해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한국은 사실상 이미 선진국이다. 여러 지표에서 한국이 세계 10대 국가를 뽑으면 그 안에는 들어갈 거라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전같으면 그저 우러러만 봤을 미국이며 프랑스며 영국이며 일본이며 독일같은 나라와 비교할 때도 무조건 고개를 숙일 입장에 있지 않다. 때로는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미국이래 봐야 트럼프같은 대통령을 뽑는 나라이고 우리도 삼성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있으며 방탄소년단에 열광하는 유럽인들을 보면 우리가 남들보다 무조건 더 뛰어나다고 거만하게 구는 것은 아닐지라도 선진국이라면 우리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배워야 한다는 식의 자세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한국은 세계로부터 선진국으로 행동하기를 요구받고 있고 이미 스스로가 선진국이라는 자각이 필요한 단계에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약하고 작고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뿌리를 내리는 일일 것이다. 이제 과거를 지우고 발전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렇게 불안하고 뿌리없이 사는 일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이제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출산율은 지금 어마어마하게 낮다. 이걸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겠지만 그 중 중요한 한가지는 바로 내가 말했듯이 한국에서는 삶의 연속성이 파괴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래가 보이질 않으니 오랜간 책임을 져야 하는 일 그러니까 결혼을 한다던가 아이를 가진다던가 하는 일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유있는 삶이란 기본적으로 이미 내가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가 빼앗아 가기 어려운 것들만으로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느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세계 여행을 하거나 비싼 차나 집을 사지 않아도 그저 우리 동네에서 장보고 밥사먹고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행복이 달성가능하다는 그런 느낌이 우리에게 여유를 준다. 단골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쓰고 골목 어귀에 있는 튀김집에서 튀김이나 하나 먹고 저녁에는 티비 보면서 군고구마나 먹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느낌 말이다. 혹은 공부하고 싶은 책들이 잔뜩 있기는 하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되새기면서 그저 나로서만 살아도 그다지 불만은 없다는 느낌말이다. 그럴 때 우리가 삶에서 이루려고 하는 것은 여분의 일이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면 좋지만 없어도 죽을 것같지는 않다는 여유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니 여유니 지속가능한 삶이니 하는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정이 가는 마을을 키우고 지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런 것들이 커져 갈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꼭 필요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우리 모두에게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마치 한두해만 살고 죽을 것처럼 살고 있다. 허겁지겁 더 많이 소유하려고만 들고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이래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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