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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특별한가?

by 격암(강국진) 2019. 5. 12.

우리는 인간은 특별하다는 말에 익숙하며 인간중심 사상이니 인본주의니 하는 말을 늘상 듣는다. 그 옛날 전태일이 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인본주의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페미니스트가 말한다면 그 역시 인본주의가 그 근거에 있다. 점점 더 뜨거운 주제가 되고 있는 안락사문제나 낙태문제의 뿌리에도 인간의 생명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핵심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개 인간은 특별하다는 말을 1+1=2라는 말처럼 그저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생각을 멈추고 만다. 인본주의는 현실적으로 지나치게 애매하고 세뇌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이런 말이 나오면 이미 별로 설득력도 없는 근거를 가지고 그저 낡은 전통이나 종교 교리처럼 인간은 특별하다, 인간은 고귀하다같은 말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인본주의는 이전에도 한번도 완벽히 실행된 적이 없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인구가 폭발해서 인간이 너무 흔해졌고 빈부격차가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증가해서 인간은 죽어가는데 고양이는 호사스럽게 사는 시대다. 부자나라의 노인들이 무의미해 보이는 삶을 그저 조금 더 연장하는데 쓰는 돈이라면 가난한 나라의 수없는 아이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안락사나 낙태문제도 인간의 타고난 권리와 생명의 의미에 대한 논의를 더 뜨겁게 만들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구 환경문제가 점점 피할 수 없는 긴박한 문제가 되어가는 가운데 인본주의는 이제 인간 이기주의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인본주의를 그저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이나 역사적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험하고 신성모독적인 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관습이 만들어 지던 과거와는 이미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우리가 설사 같은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우리는 인간이 특별하다는 생각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날의 인본주의에 대해서 세가지를 지적하고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첫째로는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공동체라는 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던 사람들과 비슷한 것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인간이 왜 특별한가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증거를 끌어 모으려고 하며 인간과 동물사이에 선명한 선을 그으려고 한다. 인간이 특별하다는 객관적인 증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만이 의식을 가졌다고 믿거나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인간만이 이성을 가졌고 인간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공감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설득력이 있고 울림이 있는 논증일까? 탁자와 의자가 서로 다르듯 물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이 가진 특별한 지위에 대한 충분한 논증일까?


결국 인본주의란 우리는 다른 인간을 우리와 운명적으로 얽힌 소중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이 공동체란 어떤 공동체인가에 생각을 집중해야 인본주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인본주의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나머지 두가지는 바로 이 점들 즉 우리의 상식과 관습은 어떤 공동체를 가정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인본주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두번째는 인본주의란 인간이 인간공동체나 인간사회의 힘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된 이성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적 존재들의 집합이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간공동체의 중요한 특징이다. 인간사회는 종교적이거나 이성적인 성격을 띄는데 종교적 사회는 인간의 질문들에 답하는 존재가 신적 존재다. 우리는 종교적 지도자의 가르침이나 성스러운 문서 혹은 종교적 직관에 의해서 우리가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이 찾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이성적 혹은 과학적 사회에서 인간들은 축적된 지식을 통해 즉 이성적 분석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이성 내지 인간사회의 이성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그 결과 마치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한국인으로 뭐 하나 한 것이 없어도 한국인의 권리를 주장하고 누릴 수 있듯이 인간공동체 안에서는 그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특권을 주장하고 누릴 수 있다. 오늘날의 인본주의는 신적인 공동체 즉 신의 자식들로서의 공동체에서 이성적 인간의 공동체로 관점을 돌리면서 생겨난 것이거나 크게 강화된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은 사회적이다.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보의 누적과 분석을 사회적으로 해내고 그 결과 확실히 다른 동물들은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해낸다. 따라서 쓰고 읽을 수 있고 다른 동물보다 더 발달된 언어를 가진 인간은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거의 정보가 없을 때 우리는 종교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어나 문자의 발달로 정보의 소통과 누적이 크게 발달했을 때 우리는 소위 이성적 존재로 인간을 재발견했다. 인간만이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는 인본주의는 이 과정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계의 발전으로 데이터의 수집과 이해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시대에 세상은 마법으로 가득차 보였을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대는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고 있다. 초고밀도 정보사회에서 세상은 마치 바둑세계최고수를 이기는 알파고같아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성적으로, 언어의 형태로 어떤 일이 왜 이런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이미 마법으로 채워진 것같이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넘어 시스템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해진다. 시스템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겠거니 하고 믿는 것이다. 그것없이는 오늘날 안정적 삶은 가능하지 않다. 이성주의는 도전받거나 그 의미가 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문맹과 문자를 아는 사람을 구분했던 역사가 있듯이 앞으로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인간집단의 초지능과 시스템으로부터 동떨어진 인간의 지능은 차별받게 될 수 있다. 기계의 도움으로 개나 돌고래가 타고난 한계를 넘어 인간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까? 이런 시대에 인본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인본주의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세계를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구의 사상이며 따라서 우리가 인본주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상당히 서구적인 생각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의 역사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본주의라는 개념은 중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것이 문제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은 이미 과거와 다르기 때문이다. 


홉스는 1651년에 리바이어던을 쓰면서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불행한 현실은 카톨릭교회라는 종교집단이 사회적 권력을 가지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국가는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후 로크나 루소는 조금 다른 사회계약설을 주장했지만 사회계약설의 핵심은 결국 종교공동체에서 인간공동체로의 전환내지 분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사회계약설은 인간은 특별하다는 생각의 기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권리라는 말을 대개 법체계안에서 이해하며 법이란 국가같은 사회적 구조물의 특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특별하다는 말의 현실적 대부분은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권리를 가진 존재이므로 합법적 권리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사회의 계약당사자로서 주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에 나오는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구절도 결국 사회계약설이다. 


그런데 서구에서 있었던 이 종교공동체에서 인간공동체로의 전환내지 분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불완전한 것이었거나 시대에 뒤진 억지같아 보인다. 사회계약설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종교와 사회의 분리이며 자연과 국가의 분리다. 이 분리는 지금 점점 더 뼈아픈 것이 되고 있다. 이 분리는 가치와 윤리를 포함한 너무나 많은 것을 인간공동체로부터 분리해 냈다. 그리고 우리는 잊혀진 부분들에 대해 점점 무책임해지고 있다. 국가가 계약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인간공동체가 응당 지녀야 할 상당부분을 망각한 계약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설은 자연세계속의 인간을 다루기 보다 사회속의 인간만을 말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연은 망각된다. 자연은 그저 소유하고 소비해 버릴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가가 얼마나 광범위한 힘을 가졌는가를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종교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 않고 과학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할 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세계적 환경문제의 뿌리다. 인간의 눈에는 인간사회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숲의 신성함을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돈의 신성함을 믿는 것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계약설이 보여주는 가치와 사회의 분리는 윤리적 문제들을 만든다. 삶의 의미라던가 행복따위의 측면도 망각된다. 그것은 '그저 개인이 책임질' 일이다. 인간공동체의 목표나 의미가 아니며 기본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가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그에 따라 세상의 윤리적 공백은 커져가는 것같다. 백년전에는 고등교육기관이란 다른 무엇보다 삶의 가치를 교육하는 전인교육을 그 목표로 뒀지만 이제 교육기관은 대개 돈벌고 출세하는 방법을 가르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계약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면서도 반인간적이다. 형이상학적이고 가치관적인 부분과 인간공동체를 분리하는 것은 애초에 불완전한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억지로 분리하면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이고 기계적인 단순한 인간이 모든 것을 압살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그저 개인의 책임인 동시에 권한이고 자유인데 작아만 져가는 현대인이 정말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 현대인에게 가장 큰 문제들은 외로움이거나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고 빠진 허무가 아닌가?


사회계약설은 개인주의적이며 탈역사적이라 문화도 망각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한국어는 당연히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사회계약설의 관점에서는 자연과 문화와 역사는 모두 활용할 자원같은 역할을 하고 존재감이 약하다. 거기서 존재할 권리가 없는 것은 호랑이나 거북이뿐만 아니라 피라미드나 한국어도 그렇다.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모든 권리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너무 비대해진 인본주의는 모든 것을 깔아뭉개버린다. 다시 말해서 한국어는 그 자체로 존재할 권리가 없다. 이 세상은 개인의 총합이고 사회는 어디까지나 이 개인들이 임시로 만든 시스템일 뿐이다. 


아마도 사회계약설은 십여명의 사람들이 만드는 친목계같은 것에는 비교적 정확한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심지어 그 십여명이 만드는 친목계도 회비를 모아서 공금을 만들면 운영하고 청산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고 개개인들이 어느 순간 합의하면 허공으로 간단히 없어지기 힘든 때가 많다. 하물며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소유한 것이 많은 국가같은 사회는 오랜 역사에 걸쳐서 많은 것이 쌓아 올려져서 만들어 진 것이며 어떤 개인도 국가같이 복잡한 사회의 모든 측면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지 그걸 계약으로 허공에서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지적 소유권같은 것을 통해 유전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발상이나 국가같은 사회가 실체가 없다는 생각은 모두 황당하고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고 현실적인 실체로 국가를 인정하여 국가가 개인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통법규의 사회적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운전사의 자유운전을 주장하는 것이 모든 운전사의 복지와 행복에 도움되지 않는 헛소리이듯 사회를 실체로 인정하는 관점을 지나치게 피하는 것은 개인을 오히려 억압하는 것이다. 내전같은것으로 사회시스템이 망가진 국가의 국민들은 이점을 잘 느끼고 있다. 그들은 국가없이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에 지극히 억압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회계약설로 시작된 국가의 기원은 이렇게 많은 것을 망각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그런 관점은 우리의 관습 우리의 법체계 우리의 상식안에 지금도 깊게 박혀 있다. 그것이 가정하고 있는 인간공동체는 애초에 지극히 기독교적인 힘이 충만한 종교적 사회에서 그 일부를 분리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종교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를 제외한 나라 중 선진국 레벨에 도달한 것은 유교적 전통이 있었던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다. 어쩌면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국가란 애초에 인간공동체에 대해서 보편성이 없는 반쪽짜리 개념만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은 특별한가? 이 대답이 그렇다라면 나는 그것이 신이 인간만 특별하게 창조했다거나 인간만이 지능을 가진 존재라서 특별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는 이유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 더 현실적이고 미래적인 답은 인간은 세상의 수호자라서 그렇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가 소유할 대상으로 보기 보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어떤 것, 우리가 잠시 의지하지만 잘 발전시키고 보존하여 물려줄 어떤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발전이나 소비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생각을 우리의 사고와 윤리의 뿌리에 기초시킬 필요가 있다. 자연은 물론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가고 있는 사회시스템도 우리가 일조일석에 계약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키워가고 관리 할 대상이다. 우리는 이 우주에 인간밖에 없는 것처럼 사고하는 관점에서 인간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 어떤 의미로 인간보다 더 오래 존재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자연은 물론 인공적이고 사회적인 구조물까지 아우르는 생태계속에 인간이 포함되어져 있다는 공동체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이성적 존재겠지만 이성은 점점 더 인간을 떠나 독립적 존재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났다. 한때 인간의 기록이란 어떤 개인이 모두 읽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고 사람은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정도로 분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보의 양이 급증하자 이제 우리는 전문가를 키웠다. 그래서 지렁이의 내장기관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지만 예술이나 경제분야에 있어서는 바보같은 존재들을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이성적인지 아닌지를 말하기 힘들어 진 것이다. 지금도 아무도 도서관 가득한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빅데이터의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이성적인가?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가가 국가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 판단이라고 믿는가? 우리는 결국 점점 더 많은 판단을 가치중립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혹은 통계적 분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내리자고 하게 된다. 그것이 이성적이라고 말하게 된다. 누구도 사회 전체를 다 이해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척 할 뿐이다. 개인은 국가같은 사회적 망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우리는 그 망을 개인이 만들었다고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 망이 그 자체로 현실적 실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관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특별함은 인간 스스로를 위해서도 다시 생각되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을 포기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다. 환경문제는 앞에서 거론했거니와 좀 다른 경제문제만 해도 그렇다. 많은 국가가 말도 안되는 빚을 가지고 있다. 이는 현 세대가 미래세대의 것을 도둑질했기 때문이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은 미래세대고 현세대는 빚내서 그걸 써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현실도 결국 그 뿌리에는 개인의 소유만 강조하는 우리의 사고가 있을 것이다. 국가가 파산할 상황이 되도 사람들은 자기통장만 신경쓰는 것이다. 이게 인간을 위해서는 좋은 사고 방식일까?


인간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 세계의 일부인 동시에 그것을 관리하고 지켜나가는 존재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이런 측면에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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