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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교육과 한국 교육의 공백

by 격암(강국진) 2019. 5. 23.

오늘날 한국의 교육에는 하나의 큰 공백이 있다. 그리고 그 공백은 여러가지 사회적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한가지 증상은 학생들이 공동체와 사회에 대해 무지해 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다음 세대를 가르쳐서 그 공동체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 발전되어질 수 있도록 이런 것을 교육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현대 한국의 교육은 아쉽게도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길러내기 보다는 이기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인간들을 양산해 내는 쪽에 더 가까운 것같다. 


또다른 증상은 대학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데 인문학교실같은 행사는 오히려 늘어만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현대의 학교는 거의 무한한 양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쏟아부으면서 실은 이걸 어디에다 쓰는지, 뭐가 중요하고 가치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 백과사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학 교육을 받았는데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서 오히려 더 큰 혼돈을 느낀다. 


이러한 증상의 원인이 되는 교육의 공백은 우리가 지금의 교육과는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 교육시스템을 개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면 그 원인이 구조적이기 때문에 즉,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그 기반에 가지고 있는 철학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서 교사의 노력이나 작은 개선으로 좋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가진 교육의 공백은 무엇이고 교육의 구조적인 원인이란 무엇이고 또 새로운 교육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작가의 교육을 이야기함으로써 지금 교육이 가진 공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새로운 교육이란 작가를 키우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먼저 왜 우리가 교육 시스템의 구조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가진 기본구조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볍게 검토해 보자.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경험에서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접촉과 저술활동을 통해서도 교육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교육은 사회적으로는 한계가 있다. 


많은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사람, 예를 들어 유시민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의 저술활동과 방송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수많은 제2의 유시민을 만들어 낼 것인가?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교육 시스템의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통해서 다음 세대를 교육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 쪽에서는 기성의 교육시스템이 뭔가를 결여한 사람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는 겨우 몇몇 운좋은 사람만 구제되어지는 구조 행위를 개인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교육의 구조적 변화없이는 효율성 측면에서 희망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새로운 철학에 기반한 새로운 구조를 가진 교육 시스템에 의해서만 가르쳐 질 수 있다. 이때문에 조선의 유학교육 시스템도 서구적 학교 시스템으로 개편되어질 필요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이 서구적 학교 시스템 혹은 지금의 학교 시스템은 더 많은 지식을 퍼뜨리고 교육 시키는 것이 사회적 진보를 만들어 낸다는 계몽주의적 사고 방식의 결과이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전문화를 통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교육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그 구조가 공장처럼 설계되었다.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존경받는 인간형은 기본적으로 박학다식한 인간 즉 뭐든지 알고 있는 인간이 된다. 지식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철학으로 세상을 보면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쓸모 있고 존경스러워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시스템의 권위가 떨어지고 선생과 교수에 대한 존경이 떨어지게 된 것은 이러한 기본가정들이 더이상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생산되고 보관 처리되는 정보의 양이 폭증하고 있다. 결국 단순한 지식의 가치는 떨어지고 있으며 누구나 이 세상에 대한 아주 작은 정보만을 기억할 수 있는 시대다. 인공지능 왓슨이 퀴즈대회에서 인간챔피언을 이긴 것도 벌써 몇해 전의 일이다. 컴퓨터와 통신의 발달로 단순히 많은 양의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이제 그 한계가 분명한 일이며 기계와 경쟁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 학교 시스템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들은 각자의 전문화된 영역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부품같은 역할만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달해야 할 지식이 늘어날 수록 그들이 전인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더욱 더 줄어든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가장 좋은 강의를 인터넷 유튜브 검색에서 찾을 수 있고 가장 최신의 정보를 구글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물론 앞으로는 훨씬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지금의 학교 시스템은 선생과 교수에 대한 존경을 유지시키는 것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교사에 대한 존경이 없다는 것은 교육이 실패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우리는 이 문제가 구조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의 구조를 유지시키는 한 그것은 개선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은 더 나빠진다. 교육의 목적은 더욱 더 순수히 취업이나 돈을 버는 것이 되고 말고 교육 시스템의 권위는 추락하기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학교시스템에서 창의력을 길러준다는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함으로써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인간이 존경받으며 그런 인간을 키우는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모두가 책쓰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선 작가의 교육을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 시대의 교육이 가진 공백을 분명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과연 지금의 교육과 작가가 되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더 많은 교육을 받는 것. 그러니까 대학교육을 받고 심지어 박사교육을 받는 것이 창의적인 작가가 되는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미학을 공부하는 것과 화가가 되는 것이 다르듯이 학교를 더 많이 다니는 것이 더 많은 지식을 보장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더 훌룡한 작가가 될 것을 보장할 수는 없으며 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교육 시스템이 개인이 가진 개성과 창의성을 눌러버려서 교육이 없었다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 교육의 결과 작가로서 글을 쓰는 능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는 어떤 인간을 요구하고 있는가. 직업의 종말을 쓴 테일러 피터슨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해서 취직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생계획은 오늘날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면 세계의 수없이 많은 대학에서 대학졸업자들이 양산되어지므로 대학졸업장의 희소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치가 있는 것은 창업가 정신이라고 피터슨은 말한다. 즉 스스로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지식을 습득하고 누군가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직업을 미래로 생각해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작가의 교육이란게 있다면 그것은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일관성이 있는 비전을 가진 인간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지금의 학교 시스템이 박학다식한 인간을 존경받는 인간형으로 내세운다면 작가의 교육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창의적인 관점을 가진 인간을 존경받는 인간형으로 내세운다. 이런 인간은 책을 쓰는 작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창의적 과학자나 발명가, 예술가와 기업가를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시대가 새로운 교육시스템을 요구한다는 것은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이런 사람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학교교육은 그 구조가 본래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졌지 더 창의적 인간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시스템이 키우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로봇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로 지금은 그런 직업들이 여전히 가치가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직업들은 인공지능의 발달에 의해서 의미가 줄어들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이라는 것은 시대역행적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르게 과학의 시대에 성경이나 불경이나 사서삼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를 키우는 교육은 어떤 것일까? 기본적으로 작가를 키우는 교육이란 지금의 교육적 관점에서 보면 즉 누군가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관계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작가를 키우는 교육이란 결국 그 핵심이 창작을 독려하고 그 결과가 널리 사회적으로 유통되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로그나 인터넷 게시판이 없던 시절에 어떤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려면 대개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를 하는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심사단체가 그 글을 통과시켜줘야 그 글은 대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순수문학 분야에서는 이것을 아직도 등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작가로 등단하기 위한 기초관문은 좁았고 따라서 그렇게 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글쓰는 의미가 별로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창작을 발표하고 그것을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 평가와 격려가 더 많은 사람들을 창의적인 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좋은 예는 웹튠이나 유튜브일 것이다. 웹에서 만화가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더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유튜브에서 컨텐츠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것도 이전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창의적 일에 종사할 기회를 주고 있다. 


정리하자면 창작커뮤니티를 후원하고 사람들이 이런 창작커뮤니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금의 학교중심의 교육에 대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사람에게 뭔가를 배운다기 보다는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통해서 사람들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도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교육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작가의 교육의 중요성은 더 커져서 나중에는 이쪽이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오면 학교 졸업장은 지극히 제한적인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 성장의 중심에는 창의성이 있고 주체성이 있으며 자기의 내적 일관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파편화된 지식의 홍수속에서 지금의 교육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며 현대가 요구하고 있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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