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우선적으로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게다가 괜찮은 남편, 괜찮은 여자, 괜찮은 직원, 괜찮은 학생, 괜찮은 형, 괜찮은 부모등 아주 여러가지 상황에서 괜찮은 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단순히 쓰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누군가가 괜찮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그 사람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사회적 의무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도 많다. 괜찮은 아내가 못되는 아내, 괜찮은 이웃이 못되는 이웃, 괜찮은 동료가 못되는 동료는 주변에서 이리저리 말이 많다.
그런데 괜찮다는게 뭔가. 누가 괜찮은 사람인가? 괜찮다라는 말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통상 어떤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요즘같은 다원화사회에서 그 기준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괜찮지 않다고 분노하고 짜증을 내지만 실상은 어떤 기준에서보면 자신이야 말로 안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누구보다 훌룡한 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은 괴물부모일 수도 있고, 자신이 누구보다 훌룡한 아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짐만 되고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문이나 회사나 동창같은 조직의 논리를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그 관점에 따르면 그 문제의 조직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다. 문제는 그런 관점은 자연스레 그 조직의 바깥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나 알바 아니라는 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동창이나 가족이라고 해서 특혜를 베푸는 것을 의리라고 주장한다면 빽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차별당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의리있는 사람으로 판단하게 만드는게 이 애매하게 쓰이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집한채씩은 물려주려고 뼈빠지게 일한다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다. 언뜻 들으면 이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대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별다른 노력을 안해도 재산이 생기는 부자나 반대로 최소한의 생활비와 교육비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현실은 그 스스로가 돈을 원하는 출세지향주의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로 자기 자신의 영달뿐만 아니라 자식의 미래까지 거는 것이다. 즉 나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무리해서라도 돈을 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자식을 위해서 돈을 번다는 이야기는 어느 수준이 넘어서면 대개는 자신의 돈 욕심에 대한 핑계고 자식에게 나는 너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논리가 되고 만다. 나는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정도의 돈을 욕심내지만 괜찮은 사람이다. 왜냐면 그 돈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식, 내 가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리해서라도 돈을 번다. 자연히 거기에는 남의 아픔에 눈을 감고, 돈벌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절박함이 있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게 다 자식과 가족과 가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평균적인 소비를 하면서 살자면 이미 죽을 때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할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위험한 투자를 하고 불법과 합법의 사이를 오고가고 누군가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다. 그러다가 돈을 버는게 아니라 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핑계를 댄다. 이게 다 나 하나 잘되자고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도 괜찮은 사람이고 악덕 기업주도 괜찮은 사람이며 폭력남편도 괜찮은 사람이다. 사실 이런 리스트에는 끝이 없다. 이 세상 사람중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악인들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자기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핑계와 관점을 아주 쉽게 만들어 낸다.
그래서 현실적이지 않기는 하지만 나는 아예 이 괜찮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훌룡한 가문주의자라던가 나는 훌룡한 여성 차별주의자라던가 나는 훌룡한 공화시민이라던가 하고 말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저 괜찮다라는 단어로 너무나 복잡한 기준들을 뒤섞는다.
그 혼동속에서 세상을 우울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바로 양심없는 인간들, 생각없는 바보들이다. 확실히 우리는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안 괜찮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는 옳고 누군가는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양심있고 생각있는 사람들이나 이것을 기억한다는게 문제다. 양심있고 생각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다원주의적 성격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를 지키는 일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런 저런 마찰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누군가가 나때문에 기분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사람들이 다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양보도 하고 인정도 하면서 세상을 산다.
양심없고 생각없는 바보들은 첫째로 일관성이 없다. 그냥 그때 그때 자기 하고 싶은 일에다가 다른 기준을 가져다 대고는 그걸 괜찮은 행동이라고 말한다. 둘째로 어떤 한 기준을 절대적 기준으로 말하면서 그 기준에 따르면 안괜찮은 사람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남의 인생을 책임질 능력도 의도도 없으면서도 남의 인생을 필요이상으로 간섭하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끝없이 관대하면서 남의 흠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절대 관용이 없다.
물론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때로 모순되고 생각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주 섬세한 조각을 망치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괜찮다같은 단어를 남용하면서 여러 사람이 뭉쳐서 이일 저일을 패거리 논리로 처리할 때 이 세상은 '괜찮은' 세상이 될 수가 없다.
요즘은 부모도 자식의 인생을 전과 비교하여 훨씬 간섭할 수 없다. 30년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료나 친구나 이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뭘 알아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겠는가. 그 사람이 공감하면 그런가보다 할 뿐이고 아니면 말뿐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각없이 괜찮다는 말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 사람은 괜찮고 나는 괜찮으며 저 사람은 괜찮지 않다. 괜찮은게 뭔지, 왜 그게 괜찮은 건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이 그저 그걸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때로는 몇명의 동조자를 모아서 괜찮음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관철하려고도 한다. 많은 비극과 아픔들이 이 것때문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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