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야기만들기로서의 과학
직업으로서의 과학이란 다른 많은 직업이 그렇듯이 돈을 버는 일이고 경쟁도 해야하는 일이며 논문쓰기와 데이터 분석과 계산, 프로그래밍, 서류작업같은 지루한 과정들로 채워져 있는 일이다. 그래서 별로 낭만적인 곳이 없다. 더구나 과학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대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공동작업이라 자기앞의 일들에 매달려서 전체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과학도들은 아주 좁은 분야의 특정한 주제에 전문화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그런 지루한 부분을 모두 날려버리고 고개를 좀 높이 들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과학이란 결국 소설을 쓰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과학과 문학의 차이는 관점에 따라서 매우 좁아진다.
다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과학은 객관적으로 관찰된 사실들을 조립해서 만드는 이야기이며 시공간에 걸쳐서 누적되고 여러 사람에의해 공동으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혼자서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전체 이야기에 덧붙일 수는 없다. 따라서 혼자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소설가처럼 신적인 자유를 느끼기는 커녕 때로는 과학자 개인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없으며 스스로가 그저 로보트처럼 주어진 일을 주어진 방식으로 처리하고 확인하는 존재에 불과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 물론 그렇지 않다. 과학은 인간들의 집단 지성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창의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엄청나게 큰 이야기가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도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야기는 다시 과학의 경계를 넘어 더 커다란 이야기에 연결되고 조립된다. 아니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말하면 과학자들은 영원히 끝나지 않고 그 폭을 다 둘러볼 수 없을 만큼 큰, 가장 감동스러운 신화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 기억되어져야 한다. 과학을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에 실패하면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이 문맥에 상관없이 사용 되어진다. 이래서는 과학의 본래적 가치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나는 중학교때 물리학은 좋아했지만 화학은 싫어했다. 생물은 더욱 싫었다. 가장 싫은 과목은 영어였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나는 어떤 간결한 시작에서 논리적 관계를 가지고 펼쳐지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을 한 반면 논리적 관계를 볼 수 없는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자면 왜 사과는 애플이어야 하고 칠판은 블랙보드여야 하는지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해 했다. 태어나서 한번도 외국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는 내가 아무런 상호관련성을 찾을 수 없는 단어들을 하나씩 외우고 있는 것은 지겹기만한 일이었다.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이 식물은 이렇고 저 동물은 이렇고 하는 지식이 그저 지겹게 나열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몸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면 몰라도 도대체 개구리나 지렁이 녹조류가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계속 배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나와는 반대인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내게는 아무 의미없는 사실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개구리가 많이 있는 동네에 사시는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거나 영어를 쓰는 어떤 유명 해외배우를 좋아해서 영어는 단순히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좋아하는 누군가가 쓰는 말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뭔가에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뭔가가 포함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반대로 어디나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의자라도 그것이 음악가 모짜르트의 의자라던가 미국대통령 링컨의 의자라면 특별하게 보이고 기억된다. 과학은 때때로 그렇게 보일 때도 있지만 결코 단순히 모든 관찰사실들을 무작위적으로 하염없이 쌓아올린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이라면 사실들은 무한히 많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를 결정할 수가 없다. 뭔가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 관찰의 기록은 누구도 다시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깊숙한 정보의 바다 속에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과학은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밝혀서 그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일이다.
이야기의 시작
내가 그 장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여기에다가 전부 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필요도 없다. 과학이 해주는 이야기는 우리주변에 가득하다. 티브이 다큐멘터리들은 과학이 만들어 낸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으며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과학이 만들어 낸 이야기 혹은 그것을 뒤틀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다.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모든 이야기들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시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단군신화를 생각해보자. 단군신화는 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인은 전에 뭘 했는가, 환인은 누구인가를 물을 수 있다. 누군가가 그럴듯한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그렇다면 그 전에는 뭐가 있었는가를 물을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란 것은 반드시 시간적인 것만도 아니다. 관계적인 설명을 위한 시작점일 수도 있다. 모든 이야기는 아무튼 어딘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실은 이것은 오래 전부터 고민되어져온 문제다. 예를 들어 서양사람들은 거꾸로 이런 곤란함을 이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A가 B때문이고 B는 C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따지다보면 인과관계는 무한히 소급되어 올라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끝에는 제1원인으로서 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한 소급은 곤란하니까 신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는 확실한 지식을 쌓아올리려고 하는 사람 혹은 하나의 멋진 이야기를 써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한가지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이야기의 시작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허공에 뜬 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확실한 것으로만 이뤄진 것 같은 과학도 결국은 어딘가에서 독단적으로 시작하는 출발점이 필요하다. 무한히 바닥으로 바닥으로 그 원인을 따지고 있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끝없이 왜 왜를 묻고 있으면 우리는 한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재의 자질
사실 과학의 발전역사를 보면 천재의 자질이란 바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불확실한 것에 선을 긋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즉 끝없이 바닥으로 가는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선을 탁 긋고 이 밑에는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하거나 이건 그냥 이렇다고 하자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과학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갈릴레이나 뉴튼이 그랬고 아인쉬타인이 그랬다. 갈릴레이 이전의 물리학은 사물이 이러저러하게 존재하거나 움직이는 것은 왜 그럴까 왜 그럴까하고 끝없이 물었다. 이건 저런 이유때문이라면 그럼 이건 무엇때문일까. 질문은 끝이없고 답은 애매모호하다. 이렇게 되면 천사가 바늘끝위에 몇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 같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질문속에 빠져들기 쉽다. 바닥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즉 정확히 아는게 뭐고 모르는게 뭔지를 모르기때문에 그 위에 뭔가를 쌓아올리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오와 뉴튼이 무엇을 했는가를 모리스 클라인은 그가 쓴 책 수학의 확실성에서 논하고 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할수 있는 일에 선을 긋는다. 그것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집중하는 것이다. 즉 사물이 왜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는가를 묻지 않고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수학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학자들은 실험이나 관찰보다는 마음속의 직관이 어떤 원리를 가르쳐주는가에 집중한 반면 갈릴레오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많은 관찰을 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되도록 간결한 수학적 묘사로 정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릴레이의 태도는 왜를 묻지 않는 이론은 가치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갈릴레오와 같은 태도를 유지했고 그러한 태도가 과학의 확실한 주류가 되도록 한 사람은 바로 뉴튼이다. 뉴튼은 중력의 법칙을 말할 때 중력은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라고 썼을뿐 도대체 어떻게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가 서로를 잡아당길 수 있는지 왜 잡아당겨지는지는 논하지 않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왜 물체들이 서로 당겨질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뉴튼은 중력은 이러저러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수학적으로 연구해서 그전에 케플러에 의해 밝혀진 천체의 타원운동은 중력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뉴튼이 별들의 움직임이나 땅위의 사과의 움직임이나 모두 하나의 원리아래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인것은 매우 아름다운 발견으로 많은 사람을 매혹시켰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왜가 없는 이론에 불만을 표했다.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라이프니쯔는 죽을 때까지 뉴튼의 이론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인쉬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도 이런 점을 가지고 있다. 진공속에서 전파되어지는 빛은 가만히 서있는 사람에게나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 모두 같은 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에 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은 큰 미스테리였다. 자전거를 누가 타고 가고 있다고 하자. 그 자전거를 서있는 사람이 볼 때와 자전거를 차를 타고 쫒아가면서 볼 때 자전거의 속력은 달라보인다. 그런데 빛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특수상대성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왜 그런가를 말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연은 그렇게 되어있다고 받아들이고 그 결과를 추구한다. 아인쉬타인이 말한 것은 일정한 속력으로 멀어지는 두개의 시스템, 즉 두개의 관성계에서는 역학과 전자기학의 모든 물리적 법칙이 똑같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었다. 즉 관찰을 통해서 누가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내 친구가 서있고 내가 동쪽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인지 내가 서있고 내 친구가 서쪽으로 멀어져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에게 물리법칙은 똑같이 성립한다. 이러한 것은 처음부터 빛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속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빛의 속력은 물리법칙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이론은 흔히 자명한 원리에서부터 풀려나온다는 말을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뭔가에 독단적으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자명하니까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직관과 창의성이 들어갈 부분은 작아보인다. 자명한 것이니까.
이런 태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는 이야기가 있다. 소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출현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어떤 삼각형이 있을때 그보다 항상 더 큰 삼각형이 존재한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이 옳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말은 가정처럼 들리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그러니 비유클리드기하학같은 것은 존재할 리가 없는 것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있다. 즉 어떤 삼각형이 있을때 그보다 항상 더 큰 삼각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현대우주론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렇게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것도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많은 것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출발점을 잘 찾아내는 것이 천재의 재능이다. 우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하고 그것은 대개 자명한 출발점이다. 더구나 과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사람,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최대한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어지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자명하다는게 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학은 기껏해야 전체 이야기의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뉴튼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시간에 따라 불변하는 간결한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신의 존재를 느끼고 그 권위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과학은 신학의 연장이었다. 그가 단순히 수학놀이를 좋아했거나 지루한 계산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연구를 한 것이 아니다. 신의 위대함을 보고자 하던 뉴턴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서 가난이나 질병에 신음하는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변하지 않는 별과 순결한 질점으로 이뤄진 세상이 흔들리지 않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뉴튼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원래 그가 보고 싶어했던 것, 즉 세상의 확실성과 질서를 특히 잘 보여주고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렇지 못하다.
21세기에서도 우리는 과학을 통해 우리는 뭘보고 싶어하는가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완전히 가치적으로 중립인 시점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뭔가의 이유로 이것보다 저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 어떤 출발점이 선택되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더 잘 설명해주는 출발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 좋은 이야기를 찾는 여행
좋은 이야기는 우연한 사건들을 남발하며 진행되지 않는다. 일단 처음에 어떤 하나의 상황을 이야기하고나면, 예를 들어 옛날 중국의 어느 마을에 남자아이 하나를 키우는 아름답고 젊은 미혼모가 있었다라고 하나의 상황을 가지고 시작하면 나머지 이야기들은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흘러 나온다. 반면에 엉터리 이야기꾼이 만들어 낸 이야기는 자꾸 부가적으로 우연한 사건이 남발된다. 알고보면 출생의 비밀이 있고, 불치병에 걸린다던가, 복권에 당첨된다던가, 누군가를 도와주었는데 알고보니 그사람이 왕자라던가 하는 식으로, 자꾸 있을 것같지 않은 요소들이 이야기에 더해지면서 흘러간다.
뉴튼과 아인쉬타인은 말하자면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유능했던 이야기꾼이다. 뉴튼의 법칙들은 뉴튼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존중되는 위치에 올랐다. 조수간만의 차에서 별의 움직임, 시계추의 움직임과 포탄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거의 대부분의 자연의 변화는 뉴튼의 법칙들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널리 읽히는 고전역학의 교과서들을 보면 대개 그렇게 두껍지도 않다. 그 책들을 단순히 수학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저 지루한 책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책에서 소개하는 몇 가지의 원리에서 시작되는 상상할 수도 없이 엄청나게 길고 큰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전역학의 책만큼 감동을 주는 책도 있기 힘들 것이다.
아인쉬타인을 포함한 뉴튼의 후계자들은 이 세상의 더 많은 것들을 더 간략한 원리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이론을 만드는데 노력해 왔다. 오늘날에도 소위 통일장이론을 만들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야기 만들기는 계속 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의 이야기에 감동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어떤 물리 이론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라고 하는 것에는 과장이 있다. 예를 들어 뉴튼 역학을 가지고 연애에 성공하고 주식투자에 성공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세상에는 뉴튼 방정식이 무력해 지는 주제들이 무한정으로 많다. 사랑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역사적 변화도 그러하며 생명의 진화도 그렇다. 뉴튼방정식이 풀어내는 이야기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돈의 흐름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며 민주주의라던가 사회적 변화에 둔감할 것이고 생명의 신비에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알고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또 다른 출발점을 가진 다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많은 이야기란 적어도 부분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이리저리 자르고 그 다른 분야에서 서로 다른 원리 혹은 출발점을 내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더 많은 가정, 더 많은 '자명한' 원리가 이야기에 들어올수록 전체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약화 될 수 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오해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가 있다. 이쪽분야에서 옳은 결과를 다른 분야에서도 옳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과학의 발전은 보다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만드는 노력의 역사다. 전에 존재하던 경계선은 허물어져 왔다. 양자역학의 등장은 화학을 물리학과 통합하게 만들었고 유전자의 발견은 생물학과 화학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렇게 해서 과학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분명 전보다 훨씬 간결하고 좋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 만들기의 능력의 중요성
그러나 물리학에 비하면 다른 분야는 분명히 큰 차이가 있다. 생물학이나 뇌과학, 경제학, 사회과학같은 곳으로 오면 물리학에서 하듯이 한두개의 기본적 원리에서부터 모든 결과들을 연역적으로 풀어내는 연구는 불가능하다. 생물학에서 수학이나 물리학같은 엄밀함을 가지고 공리 몇개에서 풀어나가는 식으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연구는 존재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가설들 혹은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작은 원리들을 도입해야 하는데 이런 원리들은 손쉽게 부정되거나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뇌과학의 연구는 많은 연구가 상관관계의 연구다. 즉 A가 있는 곳에 B도 있더라 혹은 A가 일어나면 B도 일어나더라는 관찰들이다. 이와 같은 것은 물론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물리학에서처럼 뭔가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지하는 가설의 좋은 예가 되는 증거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물론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언제나 피해지는 상황도 아니다.
예를 들어 뇌에 존재하는 감마파가 뇌기능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있다고 하자. 사람들은 인간실험이나 동물실험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뇌안의 감마파와 뇌기능간에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 지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험을 통한 관찰을 통해 연구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뇌안의 진동을 억눌렀더니 개구리의 회피 행동이 변했다던가 고양이에게 물체를 보여주면 뇌안에서 진동이 커진다던가 하는 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뇌활동에 있어서의 감마파가 뇌기능에 얼마나 핵심적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은 그저 정상적 뇌활동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지금 뇌과학의 수준에서 이런 질문은 끝없이 계속된다.
프로이드는 초자아 같은 개념을 가지고 인간정신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뇌 안의 신경세포들의 활동으로 인간정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신경과학의 시야로 보면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인다. 한때 인간의 행동은 단순한 외부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일뿐이라는 가설이 많은 주목을 받았고 스키너는 동물실험을 통해 보상과 강화가 행동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많은 증거가 있다고 해서 이런 가설이 완전히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몇 개의 예로 부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외부적 자극에 상관없이 내적인 자기 자극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고 반대가 되는 가설을 세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패러다임은 쉽사리 부정되지 않고 부정되지 않는 한에서는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말해진다.
이런 문제의 근본에는 뇌과학이나 생물학에는 아직 물리학에 있는 쉬뢰딩거 방정식이나 뉴튼 방정식같은 근본원리가 없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왜 뇌는 하필이면 이렇게 생겼는지, 왜 사람들의 행동은 하필이면 이러한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잠정적 가설과 원리가 추가로 첨부되어야 하며 전체적 규모에서 과학을 둘러보면 그것은 마치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여러가지 출발점들을 가지는 이야기처럼 보이게 된다. 결국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오늘날 늘어만 가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들을 보고 있으면 원리적인 차원에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데이터가 많아질 수록 오히려 이야기는 지저분해지고 있다. 더 발달된 기술로 더 자세한 관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원리찾기에 도움을 줄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할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생물학자의 꿈 같은 미래란 고전역학 교과서 수준의 짧은 책안에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한 수많은 경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야기를 농축해 넣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물은 이러저러해야 하므로 이러저러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생물학의 통일원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을 우리가 곧 알게 될 수 있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뇌과학과 같은 분야의 연구에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학을 풀어내리거나 세심하게 실험을 설계하거나 정해진 관점에 따라 데이터를 정리하는 능력도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뇌과학자들은 여러가지 관측된 사실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 철학분야와의 관련성을 이해하면서 훌룡한 언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유리한 위치에 선다. 어떤 실험이나 이론적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크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에 있어서 근본원리와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진화론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것을 유전자를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지난 수십년간의 연구를 통해 유전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크게 크게 확대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뉴튼방정식이 입자들의 미래를 결정하듯이 단일 유전자가 결정론적으로 생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물의 변화와 원인을 설명 할 수 있는 힘의 수준은 전혀 다르다.
진화론과 오해
진화론은 과학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 그리고 과학의 잘못된 이해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리는 진화론을 가지게 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들을 단순히 각자 존재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진화과정의 다른 가지로 이해하게 되었다. 진화론의 관점으로 보면 이제 생명으로 가득 찬 자연은 단순히 물건으로 가득 찬 백화점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점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속에서 장대하게 펼쳐지는 하나의 드라마로 보이게 된다. 20세기 초반에 개량되어 공감대가 만들어진 그 이야기는 현대적 진화론의 종합이라고 불린다.
그 드라마에서는 먼 옛날의 바닷속에서 부글거리던 화학물질이나 파충류와 포유류의 경계에 있는 오리너구리 같은 동물이 특별한 역할을 맡고 우리 인간도 자기의 배역을 가지고 출연한다. 침팬지는 인간의 중요한 친척으로 나오는 드라마다. 인간의 배역에 불만을 품은 몇몇 사람들은 신이 하루아침에 특별한 존재로 창조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이야기에서 인간이 맡은 배역이 더 좋았다고 말하지만 존재하는 많은 관측된 사실들에 대해 기괴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간은 왜 이러저러한 성질을 가지게 되었나에 대해 더 명쾌한 설명을 준다는 점에서, 그럭저럭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 새로운 이야기가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성공적인 탓이었는지 우리는 진화론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생물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많이 듣는다. 사회적인 경쟁을 적자생존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고 자유로운 경쟁이 전체적인 발전을 가져온다는 자유주의의 원리, 자유시장의 원리를 말하는 사람도 많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적자생존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서 발전해온 진화라는 드라마의 최고 절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비록 신에 의해 특별하게 창조되고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은 존재는 아니지만 진화를 통해 점점 더 훌룡한 존재가 되어온 진보의 역사에서 생명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단계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는 불확실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날씨도 예측 못하고 내년의 경제가 얼마나 잘 돌아갈지도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가 비교적 작은 오차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가까운 미래, 모든 것들이 천천히 선형적으로 변해간다고 말할 수 있는 제한 된 경우들 뿐이다.
적자생존의 과정이 더 잘 환경에 적응해서 생존률을 높이는 더 좋은 유전자가 살아남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좋다는 것은 그 생명을 둘러싼 환경이 거대해서 거의 변하지 않을 때에나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암세포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몸에서 암세포는 특별한 치료를 하지 않는 한 마구 번져나간다. 그런데 이 암세포가 과연 좋은 세포일까? 결국은 그 암세포는 자신들이 번성하는 환경에 해당하는 인간을 죽이고 말며 따라서 암세포도 몰살당한다. 번성하는 세포가 좋은 세포일까. 자살하는 세포가 아닌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진화가 만들어 낸 걸작품,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한 가장 훌룡한 특징으로 생각하지만 만약 인간이 만든 핵폭탄이나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모두를 죽이는 일을 저지른다면 인간은 핵폭탄이나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치명적 능력을 잘못 발달시켜서 죽음에 이르른 존재가 될 것이며 인간의 이성은 가장 치명적인 질병적 특성으로 평가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통상 좋은 유전자, 혹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라는 생각을 한다. 리처드 도킨스도 그의 책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이기적 행위란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는 불분명한데가 있다. 만약 좋다라고 하는게, 이기적이라고 하는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서 이겼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좋은 유전자가 혹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는 이음동의어의 반복에 불과하다. 경기에서 이기는 사람을 위너라고 부르기로 하고 위너는 항상 경기에서 이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별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이긴 사람은 전부 위너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성질이 좋다 나쁘다라는 것을 미리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결과론적으로만 말하면 하나마나한 이음동의어의 반복이 된다. 그것은 경쟁의 승자를 찬미해 주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이미 경쟁에 이긴 사람에게 본래 이길 이유가 있었다고, 이제와 나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한마디 더 해주는 일이 된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려면 근사적으로라도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어떤 문맥, 어떤 공동체, 어떤 환경을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환경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게 아니다. 바다는 하나의 생명체에 비하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바다라는 환경에 더 잘 적응하는 생물이 번성한다는 말은 분명 어떤 문맥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큰 시간 간격을 가지고 보면 환경과 그 생물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고 정의하는 되먹임의 관계로 얽혀있다. 하나의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듯이 그 환경도 그 생물에 적응한다.
이러한 되먹임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날씨를 예측할수 없고 주가를 예측할수 없다. 내가 나가서 무슨 무슨 주식을 살거라고 말하는 행위가 길게 봐서 나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될 것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환경과 어떤 객체를 분리해 냈을 때만 좋고 나쁨을 이야기할수 있다. 전체 무리중에서 가장 빠른 놈, 가장 힘이 센 놈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합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 아름다운 그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개의 점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문맥에서 각각의 개체는 분리되어 비교될 수 없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유전자나 이기적인 유전자가 번성한다는 말이 긴 시간간격에서 뭘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떤 문맥에서 좋았다는 말일까?
사회적 역사가 그러한 것처럼 생물학적 진화의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진화는 우리가 이러저러한 과거를 가지고 변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리가 왜 그러한 역사의 흔적을 우리 몸과 사고방식에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번성해 왔다고 해서 우리가 승자가 될 특별한 자질을 키워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앞으로도 우리는 더더욱 번성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은 과학적 예측이 아니라 개인적 믿음에 불과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나 국가가 자기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는 앞으로도 더더욱 훌룡한 것을 만들어 내고 번성할 것이라고 믿고 뭉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번성이 과학적 사실로서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지위를 준다고 하는 생각은 과대망상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일조일석에 창조된 특별한 존재도 아닐뿐더러 인간은 진화라는 개량과정의 정점에 선 특별한 존재도 아니다. 멸종한 동물들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스스로를 적자생존의 결과물로 파악하는 것도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말콤 그래드웰은 그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왜 사람들의 성공담이 믿을 만한 것이 아닌지를 보여주는 많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의 성공담은 대개는 들을 만한 것이 못된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이러저러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성공했다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성공이유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일이 많다. 찬찬히 따져보면 스스로 불리한 환경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성공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고 우리는 종종 깨닫지 못하지만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다는 문화적 지리적 요인이 성공의 결정적 요소가 된다. 물론 인생은 어차피 우연의 결과물이므로 노력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가 이긴 이유를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 덕에 이겼는지에 대해 착각하게 되기 쉽다. 자신은 본래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으므로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한 예다.
칼 폴라니는 그의 책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시장의 신화를 비판한다. 그는 하나의 경제시스템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점점 더 좋은 세상으로 진보해 나간다고 하는 자유시장의 믿음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시장이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시장이란 중앙은행이 통화에 간섭하는 일도 없고 노동자들이 파업해서 기업가를 파산시키거나 기업가가 노동자를 무한정 해고하는 등의 모든 행위를 다 용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자유를 말하면서도 엄청나게 복잡한 규칙들이 도입된다. 그 규칙들은 결국 우리의 윤리적 가치판단이다. 좋은 세상이란게 만들어 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저절로 이상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자연적인 최적화 현상이란 허구다.
사고의 근거
과학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포함한 전체적인 이야기는 너무나 장대하기 때문에 변화없는 일상에 빠져 살면서 우리는 종종 그 이야기의 아주 일부만을 느끼며 살게 되곤 한다. 그래서 과학은 감동이 없고 지루한 일로 파악되거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과학자로 과학에 종사하면서도 그렇게 되기 쉽다. 우리 개인의 능력과 시간은 제한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관찰과 검증과정을 거치는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만 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채워준다. 다만 언제나 세상에는 과학이 가르쳐준 확실한 부분이 있는 가 하면 직관과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좋건 싫건 그 양쪽 세계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고 과학을 알고 믿는 것이 좋은 일이듯이 직관과 믿음에 의존한다는 것도 그렇다. 다만 우리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믿음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가 어디에서 연결되는지에 주목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그저 하나의 신화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철학이나 개인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을 과학으로 여기게 되는 것도 큰 문제다. 어느 한쪽 세계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어디가 어느 쪽인지를 혼동하는 일은 종종 비극을 만들어 낸다. 그런 혼란의 순간 우리 개개인은 가치적인 난파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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