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대 과학의 두가지 특징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 우리가 현재 빠져 있는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가를 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서로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다른 패러다임과 자기 패러다임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를 한국안에서 열심히 생각해서는 알기 어렵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 가서 한국과 외국을 비교할 때 우리는 한국의 문화적 특징을 이해하고 아 이게 한국식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저자들이 현대과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은 현대과학적인 패러다임이 널리 퍼지기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과거의 패러다임을 살피고 사람들의 사고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특히 과학사에 대한 책이므로 당연히 이런 태도를 취한다. 또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나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같은 책들도 예외없이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관점을 서로 자세히 비교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전부가 아니라도 대부분 서양에서 발전된 것이다. 한국과 같은 동양은 주체적으로 현대과학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서구로부터 수입해서 발전시켰고 따라서 사고의 비약과 단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개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고찰이란 서구의 종교와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 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나의 부족한 서구의 역사와 문화, 철학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건을 나열함으로서 어떤 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나름의 문제점도 있다. 그것은 또하나의 인과론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시대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과 현대의 상황을 일일히 인과론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그럴 듯하게 들리는 이야기 일 수는 있지만 정말 그 인과적인 관계가 증명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렇게 사건의 전개를 설명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혼돈이론에서 배우는 교훈중의 하나다. 따라서 나는 보다 직관적으로 접근해서 나에게 중요해 보이는 과학문화의 두가지 특징들을 제시하고 그들의 의미를 말해보겠다.
“기에는 형질의 기와 운화의 기가 있다. 지구 달 태양 별과 만물의 형체는 형질의 것이고 우양풍운과 한서조습은 운화의 기이다. 형질의 기는 운화의 기로 말미암아 모여 이뤄진 것이니 큰 것은 장구하고 작은 것은 곧 흩어지는 것이 운화의 기가 스스로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다.”
(최한기, 기학)
위의 문장은 19세기 조선의 최한기가 쓴 우주론인 기학의 한 부분을 소개한 것이다. 내 의도는 기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기학이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하는게 아니다. 단지 나는 한가지를 제의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과학자나 공학자를 머리속에 그려보고 위의 문장을 읽어보라. 이해는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느낌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 문장의 뜻 이전에 그 형식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자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위 문장을 읽으면 훈장님이 서탁 뒤에 앉아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눈을 지긋이 감고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는 식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과학자의 방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책이 널려져 있는 책상이 있고 그 뒤로는 보통 칠판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뭐가 있는가. 그 위에는 수식들이 씌여져 있다. 과학자는 그 위에 열심히 수식을 풀고 있다.
맞다.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기학과 현대 과학의 차이는 수학을 쓰는가 아닌가 하는 것에 있다. 오늘날에는 우주론을 이야기하면서 정의도 불분명한 기나 도를 말하는 사람은 대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수학을 쓰는가 쓰지 않는가 하는 것은 사고의 엄밀성의 차이를 가져오며 그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 엄밀성을 제외하고도 그와 관련되어 혹은 그것 이전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부분이 있다. 나는 우선 그 부분에 집중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은 열심히 사물을 이름 붙이고 크니 작니 하고 분류 하고 있는 반면 현대 과학자나 공학자는 대개 속도는 얼마니 온도는 얼마니 하면서 측정된 값들간의 관계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현대우주론은 무거운건 내려가고 가벼운건 올라간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빅뱅이후 몇초후에는 온도가 몇도였다는 식이다.
관찰된 사실에 집중하라.
수식을 쓴다는 것은 대개 물체는 왼쪽에 있다던가 북동쪽에 있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 물체는 x축선상에서 -11.3 미터의 좌표에 위치한다거나 XY좌표계에서 X축기준으로 43도의 방향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게 되면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어떤 중요한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현대사회와 우리의 일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한국의 나이를 세는 방법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도록 해보자. 한국은 전세계에서 보기 드문 나이를 세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 몽고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다른 어떤 나라도 사용하고 있지 않은 방법이다. 다른 나라들은 나이를 셀 때 생일기준으로 나이를 구분하는데 한국의 나이 세는 방법은 새해 첫날을 기준으로 나이를 바꾼다.
이 때문에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나이가 서로 다른 각자의 생일날에 달라진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이면 10살짜리 아이들이 모두 한꺼번에 11살이 된다. 따라서 자연스레 10살과 11살은 각각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생일이 단지 하루의 차이가 나는 두 사람도 이 분류에 따르면 10살과 11살 집단으로 따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 10살이니 11살이니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측정된 값으로 보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그래프상에 각자의 살아온 시간을 기준으로 각각의 사람을 점으로 찍어보았다고 하자.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위의 어느 부분엔가 선을 쭉 그어서 이 왼쪽 사람과 오른쪽 사람은 서로 다르다고 분류하는 일이 합리적으로 보일까? 어디에 선을 그어도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물론 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1학년과 2학년을 구분해서 수업을 해야지 모든 학생들을 다 따로 진도를 나갈 수는 없을 것이며 사회적으로도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를 어딘가에 선을 그어 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로 분류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어도 오직 측정된 값만을 가지고 보았을 때 그 분류는 지극히 인위적인 것이며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몇 개의 다른 집단이 아니라 연속하게 분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이렇게 오직 측정한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인위적으로, 우리가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무너뜨릴 수 있다. 주관적인 것은 그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며 우리가 측정한 것에 집중할 때 이런 불확실한 것들은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뭔가를 주장하고 싶으면 사실에 집중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사실이 중요하다. 더 많은 사실적 증거를 제시하라. 이것은 바로 이러한 과학 발전의 역사가 우리의 일상에 파고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위적이고 주관적으로 들어간 해석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게 과학적 문화다. 관찰된 사실에 집중하라. 관측할 수 있는, 측정할 수 있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주관적으로 만들어 진 우리의 사고와 언어 속의 환상을 제거하라. 이것이 바로 사실에 집중하라는 말의 의미다. 이것은 사실에 집중하는 일을 거의 도덕적 문제로까지 만든다. 그것이 당연하고 옳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사실에 집중하라. 주관적 관념을 배제하고 냉철하게 사고하라.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또 듣는다.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우리는 이 말들을 책 속에서 발견하고 신문 방송 속에서 발견하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발견한다. 책을 쓰는 사람들은 사실들을 끝없이 나열하고 신문기자 역시 사실들을 나열하며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도 우리는 서로 잘 이해가 안되면 일단 사실들에만 집중하자고 한다. 우선 확실한 사실에만 근거해서 사고하자고 한다.
이런 건 당연한 진리가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적 특징이며 물론 좋은 것을 아주 많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문화적 특징이다. 위에서 말한 나이를 세는 한국적 방식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 중에는 그저 몇일 늦게 태어나서 나이 어린 사람으로 대우받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재수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관행에 잠재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관측된 사실에 집중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해방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 공평성을 가진 재판관을 만난 느낌일 것이다. 애매하게 이러니 저러니 싸우지 말고 우리 사실로만 이야기하자. 우리 불확실한 주관적인 시각은 제외하도록 하자. 관측해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자. 사실이 판결을 내려줄 것이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실 서구에서도 수학화된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상황이 위에 소개한 기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구과학은 그런 실험과 측정 없는 중세적 상황에 저항하면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과정을 통해서 사실에 집중해서 근거 없는 관념들을 피하자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신념이 되었고 악과 싸우는 정의로운 자의 태도처럼 믿어지게 되었다.
뉴튼이 뉴튼의 법칙들을 발표하고 그 이후 수많은 관찰사실들이 그 법칙들을 확인해 주었을 때,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거의 도덕적 승리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간결하고 보편적인 물리법칙 앞에서 눈녹듯 사라지는 무수한 근거없고 주관적이며 국소적이고 미신적인 믿음들을 볼 때 사람들은 악마와 싸워이기는 천사의 군대를 연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성공한 문화에도 나름의 한계와 부작용이 있다. 이런 문화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실의 백과사전, 걸어다니는 구글이 되고 싶어 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사소한 사실들을 줄줄 외우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순간에도 현대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키워내고 있다. 아는게 힘이니까. 누군가와 논쟁을 한다고 할 때 이런 저런 사실을 척척 늘어놓으면 논쟁에서 이길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사실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본래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그래서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사실들이 있다. 때문에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머릿속에 이런 저런 지식을 넣어야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시험도 엄청나게 친다. 참고서와 교과서를 외운다. 어른이 되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 방송이며 여러가지 책을 읽어서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을 꽉꽉 채운다. 스스로 생각해서 자기 안에서 진리를 찾으라고 하기 보다는 외우기 쉽게 더 많은 사실들을 더 잘 정리해주는 책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점점 더 빠르고 대충 보게 된다. 머릿속에 넣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멀리 밖에서 봐야 한다. 그럼 이 문화가 주는 메시지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답은 네 안에 있지 않고 저기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답은 부모가 알고 있거나 학교 선생님이 알고 있거나 어떤 전문가가 쓴 책 속에 있거나 어떤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알고 있다. 답은 네 바깥에 있으니 빨리 그 답들을 너의 머릿속에 넣도록 하라. 오늘날의 전체 교육시스템은 이 같은 메시지를 날마다 확성기로 퍼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스템의 지속적 영향력 아래에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이 들리지 않는 메시지를 듣는다. 이 메시지는 너무 당연해서 들리지 않게 된 메세지다.
그러나 진리란 객관적으로 저기 바깥에 있다라고 정리할 수 있는 이 태도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공허하게 만든다. 답은 객관적 사실 속에 있는데 항상 세상에는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우 논리에만 빠진 사람들이 모이면 실은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되기 쉽다. 그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논쟁에 강한 사람들,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 판단을 독점하게 된다. 논리나 사실에 저항하는 것은 부당하고 심지어 사악하기까지 한 행위가 아닌가? 논쟁에 지면 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은 남이 내 판단을 대신해 주는,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지적인 독재가 일어나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만 중요하다는 사고방식은 우리를 어느 한쪽 극단에서 장님으로 만든다. 세상에는 사실들에만 몰두하면, 지극히 논리적으로 사고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들의 잘못은 그들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믿는 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현재의 패러다임에 가장 깊이 중독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뛰어난 것같으면서도 가장 어리석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호수를 돈을 위한 개발로 파괴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개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뭔가를 죽이고 파괴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개발을 행하는 사람이 파괴되어지는 아름다운 환경의 가치는 거의 느끼지 못하며 숫자로 나타날 수 있는 돈의 양에만 민감하다면 그에 따라 개발을 하느냐 마느냐, 한다고 해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내가 직접 키운 개 한 마리나 저기 어딘가에 있는 한 번 본 적도 없는 개 한 마리나 개 한 마리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 한 마리의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결정을 할 때 이 개건 저 개건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단 객관적으로 사고하기로 즉 서류나 컴퓨터 화면상의 숫자로만 일을 논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이런 주관적인 느낌을 배제하기 마련이다. 개는 그냥 개일 뿐인 것이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앞에다가 어떤 사실들을 잔뜩 늘어놓으면 뭔가가 증명이 되고 그 사람의 판단이 바뀌게 될까? 자신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책 한 권을 백번 읽은 사람보다 그 시간에 책 백권을 읽은 사람이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 답은 내 안에 있는게 아니라 책안에 있다면서 더더욱 바보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아는 것 이상으로 더 천천히 생각하고 스스로 느끼는 것의 가치를 평가해 줘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지금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적 되고 조립되는 지식.
과학의 두번째 특징은 그것이 누적되고 조립되는 표준화된 지식이라는 것이다. 누적은 문명에서 중요한 문제다. 과거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가지 단순한 사실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그런 지식들이 연결되어 보다 복합적 지식이 되거나 복합적 기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문자를 가지고 인터넷을 가지고 도서관을 가지고 대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식과 기술은 크고 작게 모아졌다가 잊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진 기술들은 다시 재발견되고 또 다시 잊혀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기술과 지식들 특히 과학지식들은 그런 상실과 누적의 반복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라 동적평형의 상태속에서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에 빠졌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수영을 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듯이 이 상실과 누적의 과정을 견뎌내고 발전한 과학은 엄밀한 정의와 표준화를 특징으로 하게 된다. 그래야 정보가 유실되지 않기 때문이고 주변에 잘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언어가 수학인 이유는 수학이야 말로 가장 표준적이고 엄밀한 논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시대에 증명된 피타고라스 정리를 우리가 뭔가 다른 일에 쓰기 위해 그대로 가져다가 쓸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지구반대편에서 만들어진 몇천년된 바퀴를 요즘 자동차에 달아도 그냥 돌아간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표준화와 엄밀성은 소통에도 큰 도움을 준다. 미국신경과학회의 연례학회에는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학회에가도 그 학회에서 발표되는 연구결과의 아주 일부분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한때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만으로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교양인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출판된 모든 책을 읽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지식이 그야말로 폭발하듯이 늘어나는 전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전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지구적 협업을 요구하는 커다란 과학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이 소통과 지식의 조립문제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은 엄청난 수의 지식들이 조립되어진 지적 건축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적 건축물이 포함하는 지식의 대부분을 남에게서 받아쓴다. 현대인이 아무 것도 없이 무인도에 가서 볼펜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는가. 지식도 철학도 과학도 마찬가지다. 현대인의 지능은 고대인보다 그다지 높지 않다. 단지 지식이 누적되어 있고 소통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그 부품들을 받아다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문화의 성공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믿게 만든다. 그것은 누적되지 않고 표준화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때로 이 세상에는 누적되는 지식이 있는가 하면 누적되지 않는 지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우리는 자전거를 만드는 기술은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기술은 그렇지 않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기술도 어느 정도는 축적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의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자전거 타기 교본을 오래 읽은 사람도, 자전거타기의 과학적 이론을 달통한 사람도 자전거를 타자면 자전거에 올라타서 스스로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똑같은 길을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핸들조작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으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자전거타기만 그런게 아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문제도 그러하며 생각해 보면 안 그런게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그렇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책보고 똑같이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안정되게 쌩쌩달리는 누군가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고 해도, 상황도 똑같은 것같은데도, 우리의 '자전거'는 넘어진다. 우리의 인생을 포함해서 많은 일들이 메뉴얼대로 하거나 객관적 지식을 따르거나 여러가지 지식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연애하는 법에 대한 최고의 책은 마땅히 연애는 책보고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하는 것이라는 말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 철학자나 공자나 예수나 부처의 말을 아직도 공부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 있던 최고의 기술자나 과학자는 현대인에게 뭔가 쓸만한 것을 가르쳐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앞에 거론한 사람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하나 모짜르트나 고호가 옛날 사람들이라서 내가 더 훌룡한 음악을 만들고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과학은 누적되는 지식이지만 ‘과학을 하는’ 것은 누적되는 지식이 아니다. 만약 ‘과학을 하는’ 방법이 누적될 수 있는 지식이라면 우리는 모두 뉴튼과 아인쉬타인을 훨씬 능가하는 슈퍼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중세시대의 시계가 오늘날의 수준에서 보면 장난감에 불과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비웃는 더 뛰어난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인쉬타인의 과학은 누적되지만 아인쉬타인이 과학을 한 방식은 누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인쉬타인이나 모짜르트의 클론을 만들수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만약 과학 교육이란 것이 과학자를 길러내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과학 교육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과학을 많이 알면 과학자가 되는가? 혹시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과학교육인 것은 아닐까? 비슷한 질문은 다른 많은 분야의 교육에서도 던져질 수 있을 것이다. 누적된 것이 흔한 시대에 과연 누적되는 것이 중요한가 누적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시각이 일반화된 시대에 현대인들은 과학적 논리로 조직화되고 그 때문에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에서 많은 압력을 받는다. 이것을 위해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여기 부품이 하나 있다. 이 부품의 고장율을 1/2이라고 하자. 둘중 하나는 불량품인 부품이다. 이런 부품 두개를 연결해서 기계를 만든다면 전체 기계가 작동할 확율은 얼마나 되는가.
답은 1/2*1/2=1/4이다.
그럼 이런 부품을 열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 = 1/1024다.
백 개가 모이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1/2)^100 = 1/(7.88*10^31)이다.
이쯤되면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 만큼 정상적인 기계가 만들어질 확률이 낮다. 시스템의 크기가 늘어날수록 고장율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물론 이건 부품의 불량율이 무려 50%나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량율 1%의 기계는 어떨까. 백 개 중의 하나만 불량한 부품이다. 그래도 정상적인 기계가 나올 확률은 36.6%로 약 3대 중 하나만 정상이 된다.
기계와 수학은 한 구성요소가 망가지거나 틀리면 멈춰선다. 조직이 거대화 된다는 것은 그 조직을 이루는 부품들에게 엄청난 표준화를 요구하며 그 내구성을 테스트하는 한계 압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국가를 기계로 볼 때 거기에 얼마나 많은 부분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사회도 이런저런 구성요소를 가지고 일을 분담해서 하지 않는가. 경찰은 범인을 잡고 검사는 기소하고 변호사는 변호하고 판사는 판결을 한다. 오늘은 이 분야 내일은 저 분야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하루도 제대로 돌아가는 날이 없기 마련이다. 국가가 진짜 기계라면 말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누적되고 소통하는 기계부품처럼 작동하도록 훈련되어진다. 이때문에 아주 인간미 넘치는 사람도 어떤 조직의 장이 되면 금새 인정사정없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전체 시스템의 입장에 서는데 자꾸 이곳저곳이 문제가 되서 끝임없이 전체 시스템이 멈춰서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들은 시스템의 부품에 해당하는 작은 조직이나 사람들에게 냉혹해진다. 불량이라고 생각되는 부품을 내다버리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어진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한 낭만적 일탈과 반항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과학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 사고는 우리 문명 그 차체에 깊숙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앞에서 이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말하거나 우리 대충대충 인간적으로 삽시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는가.
더 소비하고 싶은 욕망과 경쟁이 그런 낭만적인 주장을 금새 지워버린다. 대책없는 낭만주의는 냉철한 논리를 앞세운 현실 앞에서 쉽사리 논파 당한다. 논리적인 구조를 가진 여러가지 사회시스템은 인정사정없는 기계처럼 개인들을 압도한다. 현대교육을 비판하면서 학교를 아예 가지 않는다던지 회사를 그만둔다던지 도시를 떠나 산으로 간다던지 하기만 한다고 뭐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첫 걸음은 과학을 직면하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종사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과학을 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다. 중장비를 다루고 싶다면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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